윤이영:응... (잠시 멍한 얼굴로 끄덕거리고, 소설 서가에 꽂힌 책등을 눈으로 살피며 점차 안정을 얻어가는듯 했다.)
소설 서가에서는 추리 특별전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유명작 <어쩌면 그 육회비빔밥도 사실은>이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있네요.
윤이영:(제목이 뭐 이래)
(한 권 집어들어서 앞장을 넘겨본다.)
음...첫 장에는 '이 소설을 육회비빔밥집 사장님 ㅇㅇㅇ에게 바칩니다' 라고 쓰여 있네요.
하여간 요즘 감성이란...
윤이영:이상하네... (책을 내려놓고 역사서가로 넘어간다.)
역사서가에는 한국의 역사서 특별 코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료조사를 판정합니다.
윤이영:
자료조사
기준치:
50/25/10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니, 한국의 역사서라고 하는데...비치되어 있는 책이 '환단고기' 입니다.
대체 이런 걸 비치해 둔 사이비 직원이 누구야? 라고 생각하는데...
중간에 다른 책이 하나 끼어있네요.
<세계야담집>이라는 매우 두꺼운 책입니다.
윤이영:음? (잘못 끼워둔 것같아보이는 책을 꺼낸다.)
세계 각지의 야사, 구전 등을 모은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네요.
총 열 두 챕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윤이영:(이거.. 재미있어보이는데.)
(목차를 읽어본다.)
목차를 쭉 읽어보면
눈에 띄는 챕터가 있습니다.
2챕터, '자색 눈의 사내'라는 제목이 적혀 있네요.
윤이영:(자색 눈..)
(2챕터를 펼쳐본다.)
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한데... ...
이영은 2챕터를 펼쳐봅니다.
<자색 눈의 사내>
고대부터 근대까지 수많은 지방에서 구전된 어떤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는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기록마다 항상 비슷한 특징으로 묘사되었는데, 본래 파편처럼 흩어진 목격담이라 당연히 전부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여겨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 졸업논문을 쓰면서 자료를 모으던 캐나다의 고고학 박사과정생들이, 비슷한 특징을 가진 인물에 대해 기술한 사료들이 시대도 지역도 다른 곳에서 어떤 패턴을 가지고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하여 연결성을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발견자들이 이 남성에게 주목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기원전 4세기경 메소포타미아의 기록입니다. 2036년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새로운 발굴 조사가 시행되었는데, 발굴된 사료 중 ‘푸른 머리, 자색 눈, 어두운 피부를 지닌 다른 인종의 사내’에 대해 언급한 유물이 있었습니다. 당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몽골로이드적 특징으로 묘사된 남성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기록상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사료가 너무나 부족하여 자세한 조사가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전승된 기록 중 비슷한 남성이 등장한 다음 시기는 작성년도 110년대로 추정되는 로마인의 편지글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일한 외양의 남부아시아인 남성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후로도 이 남성은 수 차례 전세계의 기록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후대로 내려와 사료의 양이 풍부해질수록, 동일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지언정 최소한 비슷한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는 문장의 개수가 늘어났습니다. 남부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권역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는 외모가 아닌 탓에 특이한 일화가 보이지 않지만, 연구자들은 그가 역사에서 가장 길게 자취를 감추었던 4세기부터 9세기 사이 중국과 베트남, 몽골 기록에서 네 차례 보였던 ‘자색 눈을 가진 남자’가 바로 이 남성이 아닐지 증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각종 묘사를 종합해 보면 이 인물은 보기 드물게 완전한 푸른 머리에 어두운 갈빛 피부결,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지녔으며 신장과 체격은 평균 정도로, 여러 언어와 의료 지식에 통달했다고 합니다. 대체 이 남성은 누구일까요? 세계 역사 곳곳에 흩뿌려진 이 언급들이 정말로 동일인을 가리킨 것일까요?
그렇다면, 어쩌면 이 인물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혹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윤이영:...
......
(완전한 푸른 머리, 어두운 갈빛 피부결,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
(서점을 구경하고 있을 나한을 찾아 고개를 든다.)
나한은 소설 서가에서 '바로 그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육회비빔밥도 사실은> 이군요.
윤이영:(육회비빔밥?)
...재밌게 읽고 있는 것 같네요...
윤이영:(푸른 머리나, 어두운 갈빛 피부나, ... 보라색 눈동자까지, 나한의 특이한 점마다 들어맞는다는게 신기하네.)
그러게 말이에요. 흔한 외모는 아니죠.
윤이영:(그러니까, ... 우연일테니까. 유전적으로 종종 나타나는, 왜, 그런 거... )
DNA의 기적이라던가... ...그런 거 말이에요.
나한은 소꿉친구라고 했는걸요.
윤이영:(... 맞아, 내가 기억을 못하는 것 뿐이지. 초등학교 졸업앨범같은 걸 보면 분명히.. )
(있겠지..., 어린 나한의 모습.)
나한:(어느 새 책을 정리하고는 다가와 뒤쪽에서 고개를 기웃거린다.) 그 책 살거야?
윤이영:아. 그럴까 하고... (슬그머니 책을 덮는다.) 재미있어보여서. 너도 재미있게 보고 있는 거 같던데?
나한:아. (소설 서가를 힐끔 보더니) 재밌긴 했는데... ...사가면 안 볼 것 같아서. 그냥 훑어본 걸로 만족했어.
윤이영:하긴, 집에 책장도 없었지.
나한:종이책은 괜히 공간만 차지해서 안 끌려. 서점도 오랜만에 와 봤는데... ... (이영이 읽고 있던 책을 기웃거리더니) 두껍네.
...베개?
윤이영:흐음. 하긴 요즘은 이것저것 잘 되어있기도 하고, 도서관도 있고.... (잠깐 가만히 마주보다가 책을 고쳐쥔다.) 베개 싸움 한 번 할래?
윤이영:아까 그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네가 미안해할 거 아닌데. (숨을 후 길게 뱉자 어깨가 풀어진다. 꼭 아무 일 없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내민다.) 아니면 말고. 가자.
(그냥, 우연이겠지. 소설 서가에 들어갔어야할 것 같은 내용이잖아. ... 신화나 민담이니 비슷하기야 하지.)
나한:... ...아니면 됐고... ... (제 손과 네 손을 번갈아보다가, 조금 어색하게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향합니다.
조금씩 어두워지는 하늘, 복잡한 머리...
그것은 나한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영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다른 생각에 잠긴 것 마냥 표정이 멍합니다.
나한:(네 집 앞에 도착하면 손을 놓고 슬쩍 웃어보인다.) 잘 가.
윤이영:(풀어지는 손을 더 꾹 잡고, 당긴다.) 잠깐만.
나한:...? (몇 발짝 떨어지려다가, 네가 당기는 것에 조금 몸이 딸려온다.) 왜?
윤이영:(한발짝 더 다가간다. 그 눈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아까는 너무 놀라서, 좀, 한 것 같지도 않아서. (그리고 반발짝 더.)
나한:어... ... ... ... (그 말에 단숨에 눈이 커졌다가,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잠시 망설이듯 고개를 내렸다가...반 발자국 앞으로 나가 가볍게 입술을 맞대고, 떨어진다.)
윤이영:(결심보다 먼저 닿았다 떨어진 입술에 살짝 움츠러들었다가, 멈춘 숨을 뱉을 정도의 텀도 두지않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붙이고, 그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아서 생각이 멈췄다. 아차 싶어진 순간 떨어져나와 빈 손으로 제 입술을 누르고, 시선이 다시 닿자 급히 변명한다.) 아, 아깐 네가 먼저 했으니까 내가 먼저 하려고, ... ...
했는데...
나한:...아, 하. (네가 다시 다가오면 놀란 눈으로 굳은 채 서 있었다가, 이어진 말에 네가 민망해질 정도로 크게 웃는다.) 아, 아하, 하하...그러니까, 그래. 방법을 몰라서. (겨우겨우 웃음을 멈췄다가 손등으로 몇 번 제 입을 눌러보더니 천천히 맞잡았던 손을 놓고 가볍게 흔들어 인사를 한다) 너다워서 좋아.
...잘 들어가. 학교에서 봐. (네 쪽을 본 채로 뒤로 몇 걸음을 걷다가, 곧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윤이영:(입술을 꾹 다문 채 민망한지 손만 들어 흔들고,) 응. 내일 봐. (슬그머니 웃는다. 이쪽을 보다 돌아 걷는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대로 서서 지켜보았다.)
(이런 기분이구나.)
나한이 한참을 더 걸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걷고나면...
지능을 판정합니다.
윤이영:
지능
기준치:
65/32/13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오늘 본 것들은 대체 다 뭐였을까요?
처음 보는 책에 쓰인 묘사, 길거리를 활보하던 검은 연기, 또 '아는 공포'를 마주한 것만 같던 나한의 모습...
인터넷이나 학교 도서관 따위를 좀 찾아보면, 좀 더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문득 차오르는 이 불안함은...
주머니를 슥 만져보면, 분명 넣어두었던 지갑이 보이질 않네요.
윤이영:(그런 이상한게 동네에 돌아다니는 건 좀 위험하니까, 아무래도... 신고를 어디 하려고 해도 알아야 하니까... 싶어 핸드폰을 찾으려 양쪽 주머니에 넣었던 손에 걸려야할 것이 걸리지 않았다.)
어?
(후다닥 주머니를 두들기듯 살펴보지만...)
어쨌지!?
기억을 더듬어 살펴보면... ...
아! 설마 서점에 들렀을 때 흘린 걸까요? 분명 광장에서 초상화 값을 지불할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오늘은 이미 닫았을 시간이니, 결국 내일 다시 가 봐야겠네요.
윤이영:(이마를 탁탁치며 집으로 들어간다. 멍청이...)
어휴,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한 걸까요?
이영은 집으로 돌아가,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를 되새기며 잠에 듭니다.
.
.
.
다음날 학교에 온 이영.
최근 열흘간 학교에 잘 나오던 나한은...어쩐지 오늘 아침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 친구들은 자주 있는 일이라며 별 생각 없이 넘기네요.
윤이영:... (무슨 일 있나. . 빈 책상에 자꾸 시선이 남았다.)
어쩌면 평소와 같은 변덕일지도.
이영은 오늘 학교에서 전 날의 괴물 등에 대해 조사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윤이영:(쉬는 시간인 김에, 도서관엘 가볼까싶어 교실을 나섰다.)
이영은 교실을 나서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자료 검색을 위한 컴퓨터와 줄지어 선 책장들이 이영을 반기는군요.
윤이영:(컴퓨터 앞에 앉아 포털 사이트를 켠다. ... 뭐라고 검색을 해봐야하나.)
...막상 컴퓨터를 켜니 막막합니다.
자료조사 판정을 해 볼까요?
윤이영:
자료조사
기준치:
50/25/10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괴물, 연기, 검은연기괴물, 개 괴물, 검은연기...
이런 키워드를 검색하다보니, 책 한 권이 뜹니다.
<괴물들과 그 일족들> 축약 핸드북
대여 상태도 아니고, 진열되어 있는 서가의 코드도 확실히 나와있네요.
윤이영:으음? (이상한 이름에 찌푸리고 본다.)
제목부터 징그럽게.. (서가 코드를 메모해 들고, 책장 쪽으로 걸어간다.)
이영이 해당 서가로 가면, 작은 크기의 책이 한 권 꽂혀있네요.
다른 책들 사이에 파묻혀 있습니다.
윤이영:(책을 뽑아든다.)
책을 읽어보면...
눈에 띄는 항목이 하나 있네요.
'틴달로스의 사냥개들'
이 끔찍한 생물들은 인류는커녕 미생물조차 가까스로 생명을 얻기 시작한 머나먼 과거의 지구에 산다. 일반적인 생명체들은 모두 시간의 곡면 위에 존재하지만,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은 시간의 모서리에 거주한다. 곡면과 모서리라는 개념은 미약한 인간이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 사냥개들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그들이 인식한 시공간의 여행자를 추적한다. 이 세상의 보편적인 생명체들은 가졌으나, 사냥개들은 가지지 않은 어떤 것을 탐하기 때문이라고 하나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각도가 120도 이하인 모서리라면 어디서나 실체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곡면에서는 나타날 수 없다. 처음에는 일종의 연기처럼 보이지만 점차 뚜렷한 형태를 띠는데, 아직까지 이 생물을 목격하고 살아남았다고 전해지는 자가 없기에 그 모양새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냥개’라고 불리는 이유 역시 그들이 정말 개처럼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냥감을 추적하여 끈질기게 물어뜯는 습성이 닮은 까닭으로 추정된다. 아우터 갓 요그 소토스의 애완동물이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이들이 사냥감을 추적하는 가장 확실한 단서는 호흡이다. 목표로 정한 시간 여행자의 숨결을 쫓는 듯하다. 만일 당신이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에게 추적당하는 중이고, 근처의 벽을 모두 곡면으로 만들어 버릴 만한 수단이 없다면, 잠시나마 시간을 버는 방법은 자신의 숨에 타인의 숨을 섞는 것뿐이다.
이 내용을 모두 읽고 난 후, 이영은 크툴루신화 기능치가 +1, 오컬트 기능치가 +3 영구적으로 오릅니다.
윤이영:...
서술에만 따르면, 이영이 어제 목격했던 괴물과 다르지 않군요.
윤이영:(시공간의 여행자, ... 호흡을, .. 섞는다...)
(푸른 머리에 짙은 피부, 보라색 눈동자.)
그 '개'들은 정말로 나한을 쫓고 있던 걸까요?
윤이영:(들고있던 책 모서리를 힘주어 쥐는 바람에 구겨버렸다.)
책이 구겨짐과 동시에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립니다.
윤이영:(하면 안 될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퍼뜩 놀라, 뛰어 교실로 돌아간다.)
도망치듯 교실로 들어가 남은 시간을 보냅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종례가 끝나고...
결국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도 나한은 나타나지 않았군요.
게다가 이영은 지갑을 찾으러 서점도 가야하죠.
윤이영:(바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뒤진다. 왜 또 학교를 빠진거야, 생각하며 번호를 찾고 혹시 어제 그거 때문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그대로 멈췄다. 서점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도 한참 그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
이영의 핸드폰에는 '나한'이라고 적힌 번호가 떠 있습니다.
서점 근처에 도착한 버스에서 급히 내리고 나면,
...어, 어딘가 익숙한 인영이 이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윤이영:(조금 늦게 깨달아 돌아본다.)
돌아보면, ...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푸른 머리.
나한입니다.
주변을 볼 새도 없다는 듯,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서점 방향으로 향하고 있어요.
윤이영:나한! (뛰어가 팔을 잡는다.)
나한:엇, (갑자기 팔을 잡아채는 것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뒤를 돌아봤다가, 이영을 알아보곤 천천히 긴장했던 어깨가 내려간다) 깜짝이야.
윤이영:너 여기서 뭐해?
나한:여기까지 무슨...아, (핸드폰 화면과 이영을 번갈아 봤다가, 눈을 굴리더니) 서점에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윤이영:너도? (갸웃거리다, 나한이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 미간을 찌푸린다.) 학교는 안 와놓고? ...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나한:아, 좀 중요한 일이라서... (그 말에 어색하게 한 쪽 입꼬리를 올린다) 아무 일도 없어.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거 같은데.
그래도 잘 됐네, 갈 거면 같이 가도 되고... (그럴래? 하듯이 서점 쪽을 가리킨다)
윤이영:(더 캐물을 생각은 없지만, 어쩐지 꽁해지는 마은에 입은 그냥 꾹 닫았다. 어제 본 것 얘기를 꺼내고싶지는 않아서 반박하지 않았다. 걱정할 만 하지 않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냥개가 잡아갔으면 어쩌나 걱정했다고, 말 할까 했지만...) 응. 나 어제 지갑 두고 온 것 같아. (잡았던 팔을 놓고 걷기나 했다. )
나한:지갑? 누가 주워갔으면 어떡해? 가져간 사람이 걱정되는데... (네 걱정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속 편하게 농담을 던지며 다시 발을 옮긴다. 웃는 것도 입 뿐이고, 시선은 핸드폰 화면에 한참을 고정되어 있다가 떨어지곤 한다.)
두 사람은 서점에 들어섭니다.
안내데스크가 있는 서점 로비에는, 어제는 보이지 않던 부스가 하나 설치되어 있습니다. '공개 라디오 팟캐스트 코너' 라고 적혀있네요.
윤이영:야, 걱정 받을 사람 따로 있지 않아? (어깨를 툭 치고, 네가 한참을 응시하는 핸드폰 화면에 잠시 시선을 둔다.)
(웬 거람? 부스 앞에 서서 잠시 둘러본다.)
나한이 켜 놓은 것은 아무래도 지도 같아 보이는데...
길치도 아니면서, 왜 자꾸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나한:(부스 앞에 멈춰서서는, 핸드폰 화면과 부스를 번갈아보다가) 아, 오늘 이거 보러 온 거라...지갑 찾는다고 했지?
다녀와. 여기 서 있을게.
윤이영:... 이게 뭔데? (갸웃거리다, 네 말에 생각난 듯) 아, 맞다. 금방 올게. (후다닥 카운터로 향한다.)
이영이 카운터로 향하면, 안내데스크 직원이 이영을 바라봅니다.
안내데스크 직원:도움 필요하신가요?
윤이영:저기제가어제지갑을두고간것같아서요(숨도쉬지않고말한다.)
... 까만색 반지갑인데요.
안내데스크 직원:앗, 어...어, 제지갑? 아, 지갑이요. 잠시만요, 들어온 게 있는지 확인해드릴게요.
(데스크 아래 서랍을 뒤적이는 듯 하더니, 곧 이영의 지갑을 꺼내 내민다) 이거 맞으신가요? 어제 폐점 시간에 들어온 분실물이에요.
윤이영:아. 그거 맞아요. (양 손을 내민다.) 다행이다....
안내데스크 직원:찾으셔서 다행이네요! 저희 서점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로비에서 서점을 이용하는 이용객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도 진행하고 있으니까, 시간 나면 한 번 들러보세요.
윤이영:아... 네. (고개를 꾸벅거리고 나한에게 돌아간다. 로비에서 인터뷰? 별 걸 다하네.)
윤이영:네가 말 안 한거. ... 그치. (한 쪽 눈에 맺힌 것을 손등으로 훔쳐내고 그 보라색 눈을, 그... 보라색 눈을 지켜보았다.)
나한은 이영의 손을 잡아 끌어, 옥상으로 향합니다.
해가 점점 지고 있습니다.
하늘이 반은 푸르게, 반은 붉게 물들어
세상을 가르고 있습니다.
도시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항상 봐 온 풍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만은 시리게 아름답습니다.
윤이영:(따라 걷는 뒤에서 숨 깊이 쉬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한:(옥상에 도달한 후에도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언제 봐도 예쁜 풍경이야.
물론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에는 이렇게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은 못 봤지만... ...
(뒤를 돌아 네 손을 놓았다가, 네게 다시 손을 내민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악수를 권하듯이.)
네가 이번에 태어난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거야.
윤이영:... (이 건물, 언제부터 있었더라. 잠시 생각하다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본다. 고르지 못한 숨에 훌쩍임이 한 번 섞이고,)
(내미려던 손보다 먼저 고개가 들린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한:나는 너를, 아주... ...오래 전부터, 아니면 오랜 후부터 찾아왔어.
나는 너보다 몇 천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고, 몇 천년을 먼저 산 사람이야. (허공에 놓인 손을 문지르다가, 어색하게 내린다.)
윤이영:... ... 이해가 안가.
나한:어디서부터... ... (잠시 고민을 하듯이 고개를 내렸다가, 제 뒷목을 매만진다.) 너한테 설명하는 게 거의 백 년 만이라서...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안나네.
윤이영:(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 스스로 꼬집는 손 끝, 시선은 힘없이 낙하해버린 네 손에.)
나한:...박물관에서 네 초상화를 봤어.
누렇게 바랜 종이에, 흑연과 물감으로 그려졌는데도 이상하게 상태가 좋던 몇 천년 전의 그림...
윤이영:몇, 천...
...
나한:그걸 본 후로 고대 지구 유물에 빠져서, 비싸게 주고 라디오를 샀거든.
가끔 조금씩 돌려보면 떠도는 전파들이 잡힐 때가 있어. 대부분은 우주비행사들이 보내는 교전 신호 같은 건데...어느 날 다른 목소리가 들리는거야.
'나를 만나러 와.'라고.
윤이영:나를... 만나러, .. .... 그래서, 아까, ...
그래서, ...만나러..?
나한:(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너를 바라보는 얼굴은 아주 낯선 사람의 것이기도 하고, 아주 익숙한 것이기도 하고...) 인류의 궁금증을 하나 풀어줄게.
인간이 이 지구를 버리고, 화성을 버리고, 또 다른 행성으로 떠날 때까지도...인간은 시간여행을 하는 방법은 개발하지 못했어.
그래서 인간보다 위대한 존재의 힘을 빌려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나기로 했어. 물론 조금 실수를 해서 너무 오래 전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
그 때부터 줄곧, 너를 만나고, 너를 보내면서...기다렸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어깨를 괜히 으쓱인다) 이번이 144번째야.
윤이영:... 멍청이.
멍청, 멍청하게 그런 짓을 왜...
나한:그 말도...꽤, 자주 들었어. 그래, 이번에도 들을 줄 알았어.
윤이영:(입술을 꾹 깨물었다.나를, 너무 잘 아는 너.)
나한:... ...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보다가, 급히 화제를 전환하나.) 아, 그래도...신기하지. 내가 본 초상화가 사실 너랑 내가 놀러 나갔다가 받은 거고, 내가 들은 목소리도 내가 너한테 부탁해서 떠돌게 된 전파라는 게... ...
... ... ...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네게 천천히 다가가서 양 손을 맞잡는다.) ...미안해. 말 안해서...
윤이영:(다시금 눈물이 그렁 맺힌 눈으로 보다, 손을 당겨 안는다.) ...와,줘서, .. 만나러, 와줘서, ... 고마워. (짧고 가쁜 숨소리를 어깨에 묻었다. 감당하기 어렵도록 거대하고,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에 드는 생각이 그랬다. 네가 어떤 기분으로, 생각으로 나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 다만, ) 네가 들은 그 말 끝에도, 네 이름이 있었을거야...
나한:네가 나를, ... ...밀어내지 않아서 다행이야. ...매번. (천천히 두 손이 네 등을 끌어안는다. 마침내 도달한 소실점의 끝에서도, 너는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기에. 삶의 속도조차 다른 고대인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 ...이렇게 슬퍼할 줄은 몰랐어. 전에는 좀 더 관계가 진전된 다음에 말을 꺼내서...
그럭저럭 담백하게 넘어갈 수 있었는데.
윤이영:(무서워서라고 말하면,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네 얼굴 가득했던 공포와, 소름끼치는 그 검은 연기를 기억하는데. 너를 잃어버릴까봐 무서웠다고, 잃고싶지 않다고 말하면, ... ... 네가 기뻐할까, 슬퍼할까?)
(답 대신에 고개만 흔들었다. 그리고 뭉개진 얼굴을 들어 시선을 맞췄다.) ... 144번째 만나는 내가, 네 종착지야? 네 매번의 마지막이, 나야?
(매번 밀어내지 않았다는 말에 전생의 나를, 본적도 없는 내 얼굴을 미워하게 되는 건,)
나한:...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마지막으로 삼을거야. (가만히 결의가 찬 시선을 맞춘다.)
사실은, 이번에도 말 안하려고 했어. 그냥 오늘 사건만 보고 떠나서, 몇 십년을 보낼까 했는데... ...
윤이영:가지마. 없어지지 마.
나한:너는 나와 함께 있을 때, 한 번도 오래 산 적이 없어. ...나 때문에, 항상 나를 위해서 죽곤 했어, 이영.
네 죽음을 143번이나 봤어.
...그래도 네가 죽으면, 나는 다음을 기다리면 돼. 너는 다시 태어날거고, 그 동안 어디에라도 몰두해 있으면 시간은 금세 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너한테는 그 생이 매번 마지막이잖아. 전부 다 다른 너인거야.
어쩌면 내가 너를 찾아오는 바람에, 너도... ... ...불행해지는 게 틀림없어. (네 등에 올라왔던 손이, 천천히 떨어진다.)
윤이영:...
상관 없어.
사람은 원래 죽잖아. 난... 네가 사라지는게 더 두려워.
나한:...이번에도 너는 너무 깊게 관여했어. 날 자의적으로 도왔으니, 너도 사냥개들에게 쫓기게 돼.
난, (그 말에 숨을 삼킨다. 사라진다는 것. 섭리대로라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사라진다는 것.) ...난 사라지지 않아.
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사라지지는 않아.
그리고 나는... ...네가 정말로 계속 배구를 했으면 좋겠어. (씩, 여상스럽게 웃어보인다.) 유니폼 준다고 했잖아.
윤이영:( 그 말에 픽 웃는데, 동시에 눈물이 핑 돌았다.)
받을 사람은?
나한:뭐... ...내 이름하고 싸인 써서 잘 보관해 줘.
미래에 받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윤이영:... ... (원망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나한:미안하다니까.
윤이영:미안하면 다야?
나한:(제 목에 걸려있던 줄을 풀어 네게 걸어준다. 묘하게 새 것 같은, 작은 회중시계.)
... ...나는 사냥개들에게 가, 이영.
윤이영:... 뭐?
나한:나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너는 쫓기지 않으면서 살 수 있어.
윤이영:네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데? (목에 걸린 회중시계를 쥐었다.)
나한:...먼 미래겠지. 내가 원래 살던 곳.
내가 사냥개들에게 먹히고 나면, 모두가 날 잊게 될 거야. 학교 사람들을 포함해서 전부. 기록도, 흔적도 남지 않겠지만...
그걸 가지고 있으면 너만은 날 기억할거야. (회중시계를 쥔 손을 덮는다.)
윤이영:...
....
나한,
나한:응. (여태보다 한 결 편안하진 얼굴로, 고독을 덜어낸 가벼움으로 너를 바라본다)
윤이영: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한:...물론이야.
만날 사람들은, 결국엔 다 다시 만나.
그 초상화, 잊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줘. 그래야 내가 다시 그걸 볼 수 있잖아,
윤이영:(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말에 겨우 웃는 얼굴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만나러 와 달라고, 말해줘.
만나러 갈게, 기다려, 내가 갈게...
나한:... ... (네게 손을 뻗어, 눈물을 훔치며 이마를 맞댄다.) 나를 만나러 와, 이영. 이번엔 네가. ...나를 찾으러 와.
기다릴게.
그렇게 말하는 나한의 뒤, 옥상의 저 구석...
그곳에 검은 연기가 천천히 모여들고 있습니다.
끝을 감지했다는 듯이.
윤이영:(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끝이라면, 마지막이라면, 제발, 한 번만 더 , 마지막이라면 한 번만. 제발. 이 입술이 닿을 시간이 있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짙게 내리누른 입술이 떨어질 때에는 나지막히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
나한:... ...사랑해. 몇 천년 동안, 너를 사랑했고... ...다시 너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렇게 많은 마지막을 봐 왔으면서도, 이번만은 다르다. 나의 끝이라서. 어쩌면 너를 보는 마지막 순간이라서,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랑의 대가가 이것이라면.) 잘 있어.
나한은 이영에게서 떨어져, 천천히 뒤로 걷습니다.
검은 사냥개들이 나한을 향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립니다.
그것이 두렵지도 않고, 이것이 끝도 아니라는 걸 아는 듯이
나한은 지극히 여상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입니다.
윤이영:(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얼굴에 흘러내려도 닦을 수 없었다. 나한이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전부 다 눈에 남기려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옥상 난간 끝에 다다른 나한이
천천히 몸을 뒤로 넘깁니다.
그곳에는 그를 맞이하는 시간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이윽고 나한의 몸이 완전히 어둠에 사로잡힙니다.
어둠이 그를 빨아들이고, 공기 중으로 완전히 흩어지고나면
세상은 너무나도 평범하게 돌아갑니다.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당신을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저 미래인을 보세요.
한 세기를 고작 살아가는 인간은 견디지도 못할 정도의 시간의 무게가 방금 막 사라졌습니다.
그는 가장 확실하기 짝이 없는 무존재로, 사라짐을 극복한 사라짐으로, 온전히 자신만의 죽음으로 녹아버렸습니다.
늪처럼 고여있던 고독이 맑은 피의 온도로 흘러 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검은 연기 나부낀 재 하늘로 흩어져
사람의 손으로 빚어 역시 사람에게만은 아름다운 밤의 환함 속에
단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유적에 가라앉은 먼지처럼.
윤이영:(나한이 사라진 난간을 쥐었다. 길게 뻗은 어둠 사이 어디엔가 네 흔적이라도 남았을까 시선을 멀리 두었다.) 기다려, ... 내가 갈게.
FM은 하늘로 쏘아 올려졌고
당신은 아까 '나를 만나러 와'라고 분명하게 말했지요.
나한도 그것에 화답해, 이번에는 당신이 찾아와 달라고 말했습니다.
시간은 당연하게 흐를 것입니다.
이영은 이영의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정확히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머나먼 행성에서 누군가 반드시 그 전파를 받아 볼 것입니다.
그리고...생각하겠죠.
"누가 보낸 메시지일까?"
라디오 전파는
끝 없이 우주를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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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way Pathfinder]
END.
패스파인더 시리즈 2부작
<스윙바이 패스파인더>
CoC 시나리오
<스윙 바이 패스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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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향유고래가 별들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특유의 거대하고 둥글며,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돌연 툭 튀어나오는 부분을 가진 선체 디자인 덕분에
으레 '고래'라고 불리곤 하는 우주선 테미스 3호는 안정적인 궤도를 유지하며 화성을 향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21세기로 접어들고 근 오륙십 년 간,
유사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문명을 발전시킨 인류의 또 다른 걸작이 어엿한 성공 가도 위에 오른 것입니다.
새로운 입무를 위해 탑승한 이영 역시 자랑스러운 테미스 3호의 승무원으로서 제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번 출항의 목적은 화성 국제우주정거장, DSG II 물자 보급 및 단기 체류.
승무원들은 이제 사흘 후면 화성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는 중입니다.
순조로운 여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잠시 선잠이 든 이영은 오랜만에 누군가의 꿈을 꾸고 잠에서 깹니다.
"나를 만나러 와."
"기다릴게."
"만나야 할 사람들은...언젠간 다시 만나."
"다시 너를 사랑하게 될 거야."
... ...
비온 뒤의 안개처럼 어슴푸레한 세상에 조용히 되감기는 목소리는 오래 전의 경험을 반추합니다.
사진도, 기록도...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아 희미한 인상으로만 기억되는 그 사람.
윤이영:(여느 때처럼 눈가가 잔뜩 젖은 채 깨어난다. 분명 꿈에서는 똑똑히 마주했을 얼굴이 눈만 뜨면 흐려지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서, 덤덤히 눈가를 닦아낸다.)
(다른 행성의 다른 시간에 살던 네가, 이 시점에 꿈에 나온 것은 우연이겠지.)
푸른 머리, 짙은 피부색, 보랏빛 눈.
...어떤 인상이었는지, 어떤 표정으로 웃고, 감동하고, 어떤 목소리로 말했는지... ...
그것은 잔상으로만 남아 영원히 머릿속에 떠돕니다.
벌써 10년이 지났군요.
이영은 나한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켰고, 한 가닥 희망을 바라보기 위해 우주로 떠났습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 날 밤의 사건이, 이영의 삶에 얽혀들어오기 시작했죠.
문득, 늘 지니고 다니던 회중시계가 떠오릅니다.
나한의 흔적이 남아있는 물건 중 하나죠.
윤이영:(목에 걸려있을 회중시계를 찾아 가슴팍 위로 손을 더듬는다. 긴장되는 일이 있거나, 중요한 일이 있거나, ... 네 꿈을 꾸는 날이면 꼭 찾아 쥐는 게 10년간 습관으로 자리잡아서.)
습관처럼, 물기 남은 손을 회중시계로 가져갑니다.
우주로 떠난 지도 꽤 되었으니, 이 쯤에서 태엽을 한 번 감아주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윤이영:(한번 꼭 쥐었다가, 태엽을 감아둘까 하는 생각이 들자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선다.)
이영은 거울 앞에 섭니다. 단 한 번도 목에서 빼지 않았으니, 태엽을 감을 때도 이렇게 하는 수 밖에요.
윤이영:(거울에 비친 상을 보고 태엽을 감는다. 익숙한 일이지만, 새삼스레 시간이 또 이만큼이나 흘렀음을 깨닫는다. 끝까지 감은 태엽이 풀리고, 또 감고, 또 풀리고... 이 다음에 태엽을 감을 때에도 같은 생각을 하겠지. 이 행동이 끝나지 않는 이상 온전히 너를 잊지는 않은 거야. 그렇게 여길거야.)
끼릭, 끼릭, 끼릭...
여전히 새 것 같은 시계를 감아 준 순간,
이영은 아찔하게 시야가 훅 꺼지는 경험을 합니다.
마치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
이성을 판정합니다.
윤이영:
SAN Roll
기준치:
58/29/11
굴림:
53
판정결과:
보통 성공
... ...다시 눈을 뜬 이영은 당황스러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윤이영:(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만 삼켰다가,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든다. 이게, 무슨..)
이영은 분명 우주선 선내 승무원 휴게실에서 잠이 들었었죠.
이영 외에도 쉬고 있는 선뭔이 꽤 여럿이었는데... ...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정적만이 흐르는군요.
윤이영:(옆자리에서 자던 항해사, 3번 침대의 승무원, ... 분명 방금 눈 앞에 있었는데.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연거푸 돌아본다.)
꿈이라도 꾸나. (긴장한 목덜미를 쓸어냈다.)
(쓸어낸 손은 자연스레 회중시계를 쥐었다.)
갑자기 소름이 바짝 돋습니다.
우주란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
꿈인가?
긴 원통형 모양인 우주선의 특성상, 이영이 서 있는 복도를 걸으면 휴게실을 지나 여가 공간, 화물실, 연구소를 거쳐 조종실까지 갈 수 있습니다.
우선 쭉 훑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어쩌면 다들 급한 일이 있어서 집합했을지도 모르는걸요.
윤이영:(이렇게까지 조용한 것도 이상하고, 휴게실에 아무도 없는 것도 이상하고. 다 이상하지만.... 일단은 상황 파악을 위해 발을 움직인다.)
이영은 우선 여가공간으로 향합니다.
자동식 문이 지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네요.
이곳에서는 승무원들이 휴식 시간에 지구에서 가져 온 영화를 보거나, 간단한 운동을 하고, 잡담을 나누는 데에 쓰이고 있습니다.
...만, 여기에도 아무도 없네요.
윤이영:...
이상하네. (아무도 없다니.)
(급하게 나간 흔적이라도 있나 둘러본다.)
급하게 나간 흔적도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네요.
윤이영:(잠깐 입구에 서 있다가 다시 발을 움직인다. 이상해. ... 이상해.)
정말로 이상합니다.
각종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인 화물실에도,
승무원들이 우주 항해 중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연구를 진행하는 업무 공간인 연구소도,
하다 못해 넓은 조종실 조차도... ...
텅 비어있습니다.
윤이영:...
이게 어떻게,
...
조종사까지 사라지다니, 자동 운항 설정이 되어 있다지만... ...
설마 이 거대한 테미스 3호에 이영 혼자 남은 걸까요?
윤이영:(조종실 의자를 쥐고 서서 너머를 지켜보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털썩, 의자에 앉는다.)
털썩, 조종실 의자에 앉자
계기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윤이영:(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데.)
조종간은 힘 없이 우쭐거리고 있고, 위치를 표시하는 레이더는 텅 비어서 꺼져 있습니다.
알림 사항이 떠 있어야 할 스위치와 패널도... ...
조용합니다.
윤이영:(스위치와 패널 몇 개를 건드려본다.)
툭, 툭...
전혀 반응이 없네요.
애초에 켜져 있지도 않다는 듯이요.
...이런 심각한 상황이라면... ...
윤이영:그럴리가...
적어도 지구의 관제소에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영이 계속해서 패널을 이리저리 두드려보면,
통신 버튼이 눌리고...
지직거리는 화이트노이즈가 들려옵니다.
... ...
윤이영:...
관제탑?
칙, 치익, 치직, 칙... ...
칙, 삑, 치익,
윤이영:들리나?
... 젠장.
몇 번 주파수가 맞추어지는 듯한 소음이 들리곤
화이트 노이즈 사이로 명확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를 만나러 와."
윤이영:...
...
그리고 그 순간,
조종석 전체의 불이 꺼집니다.
윤이영:(입을 떼어 대답하려던 채로 멈춘다.)
...
동시에, 새까맣던 창문 바깥이 번쩍입니다.
눈이 뜨거울 정도로 환하게... ...
윤이영:(번쩍이는 창을 보았다가, 손으로 눈가를 가린다.)
윽, 저절로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면... ...
전면 창문에 동그란 빛이 하나 떠 있습니다.
그것은 손쉽게 창문을 통과하더니, 맥동하는 움직임으로 이영에게 다가옵니다.
윤이영:(당황한 얼굴로 그 빛을 지켜본다.)
빛 덩어리는 기묘한 차가움을 가졌습닏다.
그리고 이영의 앞에서 멈춰 서더니... ...
별안간 머릿속에서 음성이 울립니다.
"들어라."
그것은 한국어도, 영어도, 그렇다고 다른 언어도 아닌... ...
언어가 아니지만, 기묘하게도 이영은 그 음성이 지닌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머릿속, 또는 우주선 바깥, 또는 지구, 또는 퀘이사 너머의 또 다른 태양에서부터 오는 듯한 음성은
또 다시 이영에게 말을 겁니다.
"들어라. 너는 태초의 것이 이끄는 대로 따르라. 저것이 너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윤이영:태초의... 것...
...신의 음성 같은 목소리는 으름장을 놓듯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이영의 눈 앞에서 맥동하던 빛 덩어리가
휙 하고, 복도 쪽으로 나아갑니다.
윤이영:(목격한 것에 대해 판단해 몸이 움직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기도했고.)
이영은 빛 덩어리를 따라갑니다.
그것은 긴 복도를 유유히 지납니다.
연구실을, 화물실을, 여가 공간을 거쳐...맨 끝, 휴게실이 있는 주거공간의 닫힌 문을 쏙 통과해 들어갑니다.
윤이영:(빛 덩어리를 바짝 쫓아가다, 문을 마주하자 벌컥 연다.)
이영은 휴게실로 들어섭니다.
아까까지 이영이 누워서 쉬던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습니다.
윤이영:어.
빛 또한 그 위에 가만히 떠 있네요.
윤이영:(아까는 분명 나밖에 없었는데. 천천히 침대로 다가선다.)
침대로 다가가면... ...누워 있는 사람은 이영이 아는 얼굴입니다.
아니, 거의 잊을 뻔 했던... ...
알고 있던 얼굴입니다.
어두운 색의 피부, 침대 위로 흩어진 푸른 머리, 내리감긴 눈, 콧잔등에 남은 옅은 흉터... ...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눕혀놓은 것처럼, 똑바로 누워 잠들어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윤이영:(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만나게 되는 날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축축해지는 눈가와 떨리는 손, 반사적인 반응외에는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그 얼굴을, 보고싶었고, 그리워했고, 잊어버려가던 그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 ㄴ, 나한.
이영이 그를 확인하자, 빛 덩어리는 공중을 한 번 휙 돌아 나한의 가슴께를 통과해 사라집니다.
그래요, 이렇게 생겼었죠.
이런 모습의 사람이었습니다.
윤이영:나한... (닿으면 바스라질까, 손을 쉬이 가져다대지 못했다. 허공에서 흔들거리는 손을 꾹 쥐고, 심호흡을 길게 했다. 꿈이라면 깨지 않게 해주세요. 손을 뻗어 볼을 쓸었다. )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 보면...
나한의 뺨은 얼음장처럼 차갑습니다.
마치...시체처럼요.
윤이영:나한. 나한, 나한.... 나야. (차가운 뺨을 감싸고, 몸을 살살 흔든다. 꼭 잠에 든 사람을 깨우는 것처럼.) 나야, 내가 왔어. 왜... 왜 이러고 있어...
왜 이렇게 차가워...
...그는 말이 없고, 흔들어보아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
어떻게 했더라? 가령, 동화 같은 곳에서 말이에요.
윤이영:(마지막에 남겼던 인사처럼 입술을 맞댄다. 이게 우리의 인사잖아. 눈을 떠, 일어나, 제발...)
윤이영:... 너한테 권하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는 건데, 그 얘길 들으니까... 생각난 건데.
날 때는 따로여도 갈 때는 함께... 같은 건?
나한:... ...동반 자살 하자고?
윤이영:....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별로다.
나한:죽을 진 모르겠지만... ... ...
아니, 끝부터 생각하는 건 안좋은 습관이라고 네가 그랬어. 언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마 청혼 때였던 것 같아.
윤이영:... 나다운 말이네. (가만히 미소짓는다.)
넌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겠지.
바보같이...
나한:일단 결혼하고 생각해. 알겠지? 라고 했어.
윤이영:(웃음이 터지고, 크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나한:...그래, 돌아가면. 그 때 생각하자.
돌아가면.
윤이영:지금 내 생각 읽은 거 아니지?
(이어 계속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때 가서 생각해.
나한:이 쯤 되면 대충 읽히긴 해.
윤이영:쳇.
나한:나한테 비밀로 하고 싶은 게 그렇게 많아?
윤이영:....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아?
나한:흠... ...큰 생각? 아니면 갑자기 든 생각?
윤이영:갑자기 들었는데 아까부터 참고있던 생각.
나한:키스 하자는 말이지?
윤이영:....
진짜 읽었어?
나한:왜냐면... ... ...
... ... ...아는 이유가 다 있어.
윤이영:... 설명이 너무 빈약한데!?
나한:표정에 너무 잘 드러나.
윤이영:(입을 조금 비죽이더니) ... 그럼 왜 가만히 있어?
나한:네가 먼저 하고 싶어 할까봐... (눈썹을 내리트리며 웃더니, 제 볼에 얹어져 있던 손을 목에 두르며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춘다. 추적에 대한 공포도, 언젠가 다가올 끝에 대한 두려움도 내려놓은 채로.)
윤이영:날 너무 잘 알아, 정말... (웃으며 목으로 내려진 손을 뻗어 두른다. 맞닿은 입술을 벌려 숨이 오가는 그 감각에 꼭 1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몰려든다. 그때의 공포도, 촉박함도, 흐려져버렸지만 설렘만은 생경하게 다가왔다. 다만... 지나버린 시간을 반증하듯 혀를 핥아올린다.)
나한:(저번에는, 까지 생각했을 때 말캉한 감촉이 느껴지면 속으로 조금 웃음을 지으며 응한다. 정말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 것만 같고, 처음으로 '나를 아는' 너를 만난 기분이 매우 생경하다. 뒷목을 손으로 받친 채 입을 벌렸다가, 농밀한 접촉을 탐하고, 잠시 고개를 물려 네 눈을 바라본다.) ...기분이 되게 묘하네.
윤이영:(욕심많은 티를 내며 한참 헤집고 다닌 끝에 떨어져나오고 나면 어쩐지 울고싶은 기분이 된다. 상상하던 어떤 키스보다 실제라는 감각이 짙어서, 아직 꿈인 것만 같아서. 슬며시 웃어보이지만 시선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왜, 이상해?
나한:내 기억으론 아까까지만 해도 입술만 대고 떨어졌었거든. (이마를 한 번 더 콩, 하고 맞부딪혔다가 떨어진다.) 안 이상해. 좋아. (그러더니 네 손을 잡고 복도로 이끈다.) 다른 곳도 가 볼래.
윤이영:네가 눈 감았다 뜬 새 지난 거, 자그마치 10년이야.. 연애는 안 했어도, .. ... (슬그머니 말 끝을 흐리고 따라 걷는다.)
나한:연애는 안 했어도?
두 사람이 복도를 걸어 다음 장소로 나아가면... ...
윤이영:...
어라, 화물실을 통과했으니 분명 조종실이어야 할 텐데,
두 사람이 들어선 곳은 마치 전시실 같은 풍경입니ㅏ.
깨끗하고 넓은 홀 안에 밝은 유리 조명과 유리 진열장이 가득하네요.
윤이영:어라, 조종실이아니라.. ...
나한:...연애는 안 했어도? (재차 되묻는다)
윤이영:(헛기침을 하더니) ... 안 해본 건 아니란 소리지, 뭐.
나한:흐음... ... ... ... (눈을 가늘게 뜨고 너를 본다)
윤이영:뭘 해도 네 생각나서 연애는 못하겠더라. (잡은 손을 끌고 진열장쪽으로 걷는다.)
나한:다른 건 괜찮았고? (여전히 흘겨보는 채로 걸어갔다가, 진열장을 보자 눈을 빛내며 되려 성큼성큼 앞서 걸어간다.)
저거.
기묘하게...아니, 엉성하게 생긴 도자기나 그림 따위를 지나치면
정 중앙에 거대하게 자리잡은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누렇게 변색 되어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초상화.
...이영의 초상화입니다.
군데군데가 번지고, 찢어지긴 했지만... ...
나한:(유리관 앞에 서서, 가만히 손을 올린다.) ...내가 봤던 그 초상화야.
윤이영:아니, 섹스할 때도 생각나서. (가만히 따라 걷다 멈춰선다.)
이거 분명, 집에...
집에 있는건데.
나한:(한창 감동에 빠져 있다가... ...이어진 말에 휙 고개를 돌린다)
내 생각을 하면서 했어? (약간 얼척없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뜬다)
윤이영:.... 어... (눈 동그랗게 뜬 나한 곁눈질한다.)
나한:... ... ... ... ... ... (흐으음, 하듯이 쳐다본다)
괜찮아, 그 정도면 되게 양호하네.
윤이영:... 양호한거야? 난 네가 내 생각하면서 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랑 했다고 하면 좀.....
사실 내 전생들한테 드는 화도 참는 중인데...
(다 말하고 나서 제 무덤인걸 깨닫고 입을 닫는다.)
나한:오래 살면 자잘한 생식 행위에 대한 감각이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거든. 게다가 나는 항상 몇 십년 단위로 보니까... (고개를 끄덕이더니)
연애를 안했다는 게 오히려 놀라울 정도인데.
윤이영:자잘한 생식 행위.......
그야, 할 거면 너랑 하고 싶었으니까. (어쩐지 기준이 달라 옹종해진 기분에 입을 비죽이며 초상화에 시선을 뒀다.)
(옹졸..)
나한:아, 자잘하다는 건 한 마디로 하룻밤을 지낸다거나 하는... ...
네 남편을 두고 나랑 바람 피운 적도 있으니까.
윤이영:.... 뭐?
나한:가끔은 이미 결혼을 했더라고.
윤이영:세상에...
하긴. 남편이 있었어도... (말은 하다 말고 가만히 네 얼굴만 지켜보다가) 응, 그럴만 해. 그럴 수 있어. 난 나를 이해해줄 수 있어.
나한:쉬지도 않고 왔네. 땅에서 뛰다가 하늘로 오고, 우주까지...공부는 안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까 잘 어울리기도 하네. (네 유니폼을 슬쩍 가리키더니) 고대학문이야 꿰고 있지. 사칙연산은 복습이 필요 없는 것처럼 말이야. 돌아가면 의사 면허증이나 딸까? 의사가 좋은 직업이라며?
윤이영:어떻게 쉬겠어. (남은 말은 숨으로 삼켰다. 다만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계속 뛰어서, 그래서 닿은 걸지도 모르고. (네 말에 조금 웃었다.) 의사야 항상 좋은 직업이지. 사람이 더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날이 오지 않으면, 앞으로도 그럴테니까. 그치만...
(잠시 생각하더니) 그럼 내가 땅으로 돌아가야겠어. 우주비행사는 너무 오래 땅에서 떨어져있는 직업이야..
나한:신기해. 나중에는 의사 같은 건 그냥 글로만 본 직업이 되니까... (마주 힘을 준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네가 힘을 준 만큼만.) 난 우주가 친숙해서 좋은데...지구에만 있으면 답답할지도 몰라. 우주의 풍경이 그리워 질 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가 우주비행사가 돼야 할까?
윤이영:... 그런 날이 오긴 하는구나. (약간 벙찐 얼굴로 본다.) ...그런 날에 살았구나. (... 그만큼 멀었구나. 꼭 잡은 손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며 끄덕였다.) 그게 좋겠다. 우주로 나오면... 잘은 몰라도 꼭, 네 고향에 온 기분이기도 하거든.
... 사실, 뭐든 좋아. 같이 있을 수만 있으면.
나한:기왕 도약했잖아. 그럼 내가 널 쫓아가는 게 더 나아. (손을 당겨 이마를 맞댄다. 닿아있음을, 실재를 확인하듯이 입을 잠시 다물고 있다가) 이 초상화 앞에서 널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처음 봤을 땐...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도 못해서. 널 몇 백 번이나 봤지만... 본인을 만나는 건 완전히 다르네.
윤이영:(이마가 맞닿자 전해지는 온기가 , 규칙적인 숨결이 생경해 꼭 한 번 숨을 골라야했다. 꿈은 아닐거야, 이렇게나 느껴지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벅차올라서.)
저 날 나, ... 좀 신경쓰고 나갔었는데. 그러길 잘했나봐. (10년 전이긴 하지만, 그 날을 생각하니 귀여웠다 싶어 조금 낮게 웃었다.) 그래서, 어때, 바로 그 그림의 주인공을 만난 소감은? 그땐 네가 왜 그렇게나 그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몰랐으니까...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거든.
나한:...그랬었어? 몰랐어. 내가 보기엔 항상... ... ...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미간을 찡그렸다가) ...독보적이었으니까. 난 저 날 완전히 실패했었는데.
네가 '진짜' 윤이영이라는 걸 확신한 순간이었어.
윤이영:독보적.... (예상 못한 단어에 살짝 긴가민가한 얼굴이다, 이내 웃는다.) 그래, 머리는 이리저리 흐트러지고, 늦어서 뛰어오느라 숨도 제대로 못쉬었잖아. ...귀여웠는데.
나한:21세기니까 사람이 두 발로 걷는거야 당연하지만... ... ...너무 뛰었어. 진짜로.
그게 귀여워보였다니 다행이네. 난 네가 날 싫어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거든.
윤이영:(진짜. ... ... 그 말이 그렇게나 기쁠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이 만났을 '나'중에 네가 가장 만나고싶었던 단 하나의 윤이영이 나라서, 본 적도 없는 전생의 '나'들에게 피어오르는 질투심 쯤은 녹아 사라지고 그저, 그저...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내가 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전날 화내서 그랬어?
나한:그것도 그렇고... ...진짜 범우주적 양아치였던데다가, 기억도 전혀 안 나는 사람이니까. 타인으로 시작할 걸 그랬나, 싶었지.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최고로 기분 좋은 표정이네, 이영.
윤이영:(그 말에 큭큭 웃었다.) 범우주적 양아치.... 그때 내가, 그 정도면 자랑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잠깐 생각하더니) 근데 진짜 양아치였어? 범우주적인 건 알겠는데.
(이어진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매번의 마지막. 그게 나라서 좋아. ...엄청 좋아.
나한:네가 고등학생이라 적당히 동갑으로 맞추긴 했는데, 실제로는 다 문제 없는 일이었으니까...양아치는 아니지. 애초에 청소년도 아니었고... ...내가 양아치인 게 좋아?
윤이영:하긴, 네가 정말 고등학생인 것도 아니었고, 담배 못 피울 나이는 더더욱 아니었고.... 양아치는 아니었던 거지. 응... (잠시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 글쎄... 그냥, 그 말이 귀여워서. 범우주적 양아치.
나한:범우주적 양아치... ... ...로 직업 방향을 틀어볼게.
윤이영:...
나한:우주해적이라도 해야하나...유행 지났는데.
윤이영:우주 해적...
(잠시 상상해봄)
... 멋있는데?
나한:그렇다고 우주함대는 관리가 까다롭고... ...150년에 한 번씩 전체 정비를 받아야하는데 시간이 장난 아니게 걸려. 구시대적 제복 때문에 인기가 많긴 하... (눈을 감은 채 셈을 하듯 중얼중얼거리다가 네 한 마디에 눈을 뜬다.)
취향이 좀... ... ...
악당 포지션에 쏠려있네.
윤이영:멋있잖아.
그나저나 엄청 잘 알고 있네... 해봤어?
나한:젊었을 때 한 번. 함대 판 지 꽤 됐어.
윤이영:..... 나 지금 좀 반할 것 같아.
나한:... ... ... ...
왜?
너한테 이 얘긴 처음 하는데...
윤이영:약간, 상상했더니...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눈을 깜빡거리다 손을 뻗어 검지 끝으로 네 콧잔등의 상처를 살짝 쓴다.) ... 그럼 이 상처도 그때 생긴거야?
나한:아, 이건... ... (왜였더라? 하고 생각하듯이 상처 한 구석을 만지작거리다가)
... ...아다만트 갑판에 쓸려서? 아마도.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나는데, 지구 일은 아니었어.
...약간, 범죄에 낭만이 있구나? (어쩐지, 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윤이영:뭐. 나랑 불륜도 했다며.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뻔뻔하게 쳐다본다. 천천히 상처를 따라 흘러가던 손으로 네 볼을 감싼다. 내가 너를 가장 처음 만났던 날에도 여기에 있던 거구나.)
참고로, 아쉽지만 미혼이야.
나한:아니, 모든 이영이 그럴 줄은 몰랐어. (네 손에 조금 기대듯 고개를 기울인다) 그리고 난 불륜을 즐기진 않았어.
그러니까 네가 미혼인 것도 안 아쉬워. 오히려 청혼이 수월해지잖아. (고개를 돌려 네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윤이영:모든? .... 예외가 없었나본데? (장난스레 웃다, 숨을 바짝 삼킨다.) ... 청혼... 내가 먼저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 ... ...
알겠다고 대답하고 싶어지잖아.
나한:기왕 했으니까 알겠다고 해줘. 둘 다 청혼한 셈 치면 더 확실해지잖아.
윤이영:그게 뭐야...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침을 꿀꺽 삼켰다. 팔을 들어 네 목을 감싸안고, 단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답을.) 응, 좋아. 알겠어..
나한:그 표정 좋아. (약간 긴장한 것 마냥 굳은 입가를 문질렀다가, 가볍게 입맞추고 떨어진다.) 내가 예상 못한 일을 했는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서 평생 기억해놔야지, 하는 얼굴.
윤이영:(한없이 기쁜 미소를 짓다, 이어진 말에 경계하는 눈으로 제 양 볼을 가린다.) ..... 이제 솔직히 말해봐. 사실 마음을 읽는거지.
나한:이 쯤 되면 맞는 것 같기도 해. 그래도 다 아는 건 아냐, 넌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윤이영:그럼, 일단 진짜 초능력자는 아닌거지... (경계심 어린 눈빛도 잠시, 금세 다시 웃는 얼굴이 되어서 지켜본다.)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신을 가져, 내가 널 사랑하는 거. 네가 나를 거의 다 알지만, 혹시 모르니까 확언할게.
나한:당연하지.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건 못해. (사랑한다는 거. 그 말을 듣기 위해 달린 몇 천년이 아깝지 않은 기분이다. 설사 무언가 잘못되어 나의 우주가 여기서 끝난다고 해도... ...)
... ...사랑해. 재회한 후로는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것 같아서.
윤이영:(온 얼굴 가득 미소가 흩뿌려지는 기분. 다시금 손을 내민다.) ... 사랑해. 나는...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이곳에서 시간이 멈췄으면, 이 앞도 뒤도 두려우니 멈춰섰으면. 확신없이는 한 발도 내디딜 수 없을만큼 소중해서, 다시는 잃어버리고싶지 않아서, ... 사랑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고있음을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나한:그럼 꼭 돌아가야겠네. 여기도 우주선이니까 조종실이 있을 것 같은데. (들어온 곳과는 다른, 전시실 안의 문 하나를 가리킨다.)
...같이. (문득 생각나서 맨 뒤에 붙여 말한다. 그게 아니면 의미가 없고,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지구의 모든 부부가 그렇듯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 싶은 기분에 빠진다.)
윤이영:원래는 여기가 아마... (네가 가리키는 곳에 문이 있다는 건 지금 알아차린 탓에 얼빠진 얼굴로 보다, 같이. 그 말에 네 손을 꼭 잡는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돌아가지 않을래, 네가 말리더라도... 함께이고 싶었으니까.) 응. 같이. 가자.
두 사람이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
무언가가 챙, 하고 발에 걸립니다.
윤이영:(발에 채인 것을 살피려 내려다본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금빛 액체가 담긴 투명한 병이 있습니다.
나한:...감로주? (바닥에 구르는 병을 주워든다)
윤이영:감로주?
나한:여행할 때 마시는 거.
그러니까... ...정확히는 우주여행을 할 때.
윤이영:... 지금이네?
나한:그렇긴 한데, 신기하네. 비싼 거거든. 기왕 받았으니 가져가자. (병을 한 번 흔들어보이더니 문을 연다)
윤이영:맛있는 건가보네? (누가 준.... 거지? 생각하며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선다.)
그렇네요. 나한은 자연스럽게 '받았다'라고 얘기하는군요.
문 안으로 들어서면, 너른 우주가 펼쳐진 망망대해가 보이는 조종실입니다.
이 곳의 모습은 이영이 알고 있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바닥이 조금 이상하네요.
평범한 타일 바닥이 아닙니다. 옻빛 나무 재질인데,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윤이영:와... (놀란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돌아본다.) 이게, 뭐지..? 이런 거, 원래는 없었는데?
나한:원래 이렇게 안 생겼어? 꼭... ...시계 같네. 종이처럼 찢어놓은 시계. (가만히 바닥을 들여다보다가)
이 부분만 잘 안돌아가.
윤이영:(종이처럼 찢어놓은 시계? 그 말에 둘러보다, 나한이 들여다보는 곳으로 가 내려다본다.) 고장?
나한의 시선을 따라가보면
작은 톱니 두 개가 맞물려 서로 돌아가지 않고 탁탁 튀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무언가를 끼워넣을 수 있는 홈이 하나, 그리고 그 옆에는 시곗바늘을 돌리는 태엽이 있습니다.
윤이영:(태엽...)
(목에 걸려있던 회중시계를 쥔다. 혹시...)
(비슷한 모양인가?)
회중시계에 꼭 맞는 크기인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뺀 적 없지만요.
윤이영:(회중시계를 꾹 쥔다. ... 이걸 빼면, 내가 널 잊을지도 모르는데.)
나한:(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이영을 보다가) ... ...왜 그래?
윤이영:네가 준 회중시계...
여기 들어가는 부품인 것 같아.
(몇 번을 손 안에서 잘그락대다 다시 입을 뗀다.) 내가 이걸 빼면, ... 널 잊을까?
나한:아, 그 시계... ... ... (그 말에 눈이 동그래지더니) ...한 번도 안 뺐어?
윤이영:... 응.
잊어버릴까봐...
나한:어... ... (웃을 듯 입꼬리가 씰룩였다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짓는다.) ... ...내가 너무 설명을 덜 해줬나봐.
가지고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는데, 한 번도 안 뺐을 줄은...
윤이영:..... 그게 무슨...?
나한:그것도 받은 거야.
윤이영:(얼빠진 얼굴로 보다) 아까부터... 신경쓰였는데. 누가?
나한:날 과거로 보내 준 존재. 인간보다 위대한 무언가.
윤이영:... 신 비슷한 거.
(어쩌면 아까의 목소리도...)
나한:시간을 다스린대. 나도 여행해보기 전엔 안 믿었어. (그러더니, 네 손 위에 손을 겹치고 회중시계를 붙잡는다.) 그래도 영 불안하면 같이 해.
윤이영:... 아무튼, 그럼... 괜찮을 거라는 거지. (친구 유품이라서 절대 못 뺀다고 뻗댔다가 굴렀던 게 생각나서 잠시 이마를 짚었다가, 겹쳐진 손을 한 번 내려다보고... 뜯어내듯 당겼다.) 응, 같이 해줘.
나한:시계 때문에 억울한 일 좀 있었겠는데. 다행히 금속탐지기에는 안 걸리는 재질이지만, 그래도. (네 손을 붙잡은 채, 회중시계를 당긴다. 느슨한 줄이 너무 쉽게 네 머리를 빠져나오면, 잠시 시계를 쥐고 있다가...천천히 손을 떼며 바라본다.) 자, 어때.
윤이영:금속탐지기에 안걸리는 건, 진짜 다행이었어. (약간은 불안한 눈으로 네 얼굴과, 시계를 쥔 손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언제나 걸려있던 것이 사라진 목은 가볍기보다는 허전했고, 하면 안 될 짓이라도 한 것처럼 불안한 기분이었다.)
괜, 찮은 것 같은데...
나한:그렇지? 내가 장담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 ...아니, 신...이 아니거든.
(천천히 네 목께를 가리듯이 건드렸다가, 손을 뗀다.) 익숙해 질 거야.
윤이영:(손 안의 회중시계를 여전히 만지작거리다, 닿았다 떨어지는 손에, 이어 네게 시선이 닿았다. 벌써 괜찮아진 것 같은 기분은 네 말이 건 마법같아서, 조금 웃었다.) 응... ... 자, 그럼... (빈 자리에 시선을 옮겼다.)
나한:속박에서 벗어나는 셈이지. 불안해서 어떻게 견뎠어? (해 보라는 듯, 가만히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이영을 바라본다)
윤이영:(고개를 저었다.) 안 해. 열심히 지내는 건 다시 돌아가도 또 똑같이, 아니면 다르게도 할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없었던 10년에 널 채워넣고싶어.
나한:(천천히 얼굴에 미소가 피더니, 조종간 위로 손을 올린다) 그럼 나도 하나 조건을 정해야겠어.
윤이영:조건?
나한:돌아가면... ...너랑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태어나고, 100년 정도를 살고, 성장하기도 하고 노화도 찾아오는... ...
더 이상 영원을 살지 않는 인간으로, 널 만나고 싶었어. 항상.
윤이영:.... 응. (가만히 미소지었다. 너는 몇번을 나를 잃고 또 나를 찾아야했을까. 영원을 산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외로운 일이었을 것 같아. 조종간에 얹은 네 손 위로 내 손을 얹었다.) 평범하게, ,같이.
나한:10년 전으로... ... (조종간을 한 번, 이영을 한 번 바라본다.)
어때, 긴장했어?
윤이영:.... 엄청.
나한:...나는 그냥 여행자였지만, 너는 이제 비행사잖아.
제대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거야.
윤이영:(10년 전으로, 내가 널 잃었던 그 날로. 네 마지막으로.) ... 배운 거, 몸으로 하는 건 자신있어. 아마, ... 문제없을거야. 우리는 그날에 도착할거야.
나한:난 안 무서워. (너를 안심시키듯, 평온하게 웃어보인다.) 좋아, 그럼 한국인들이 항상 하는 걸로. 셋 세면 당길까.
윤이영:... 응. (따라 웃어보였다. 이젠... 괜찮은 것 같아. 조종간을 쥐었다. 숨을 골랐다.) 하나,
나한:둘,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윤이영:셋. (당기는 순간, 고개를 들어 네 얼굴을 보았다. 푸른머리, 짙은 뺨, 보라색 눈동자. 콧잔등에 난 흉과 입가의 점, 나를 볼 때면 빛나던 눈빛과 웃을 때만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 그리고 네 목소리, 웃음소리, 네 말들, 네... 모든 것. 기억이 흐려졌던 게 거짓인 것처럼 눈앞에 선명해서, 확신을 얻었다.)
두 사람은 조종간을 당깁니다.
영원히 망망대해 속에 멈춰 있을 것 같던 테미스 3호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시시각각 별빛이 선체 뒤로 흐릅니다.
3차원도 4차원도 아닌 듯한 어떤 날들을 건너,
찬란한 행성의 바다를 타고 넘어...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정신을 차려보면...
테미스 3호는 기이한 공간에 멈춰섭니다.
그리고 바닥에서 이전의 빛 덩어리가 솟아오르더니
맥동하며 기압실 문 방향으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저 밖은
우주인데요?
나한:(가만히 기압실 문을 쳐다보다가, 퍼뜩 생각난 듯 병을 들어보인다.) 감로주.
마시고 가야 돼.
블랙홀로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거드.
윤이영:(덤덤히 기압실 문을 보다 감로주 병을 돌아보고, 끄덕거렸다. 블랙홀 소릴 들었을 떈 입을 쩍 벌렸지만.) .... 마시면... 괜찮아?
나한:음, 아마도.
나는 괜찮았어. 도착하고 나서 멀미를 좀 하긴 했지만.
윤이영:블랙홀에 들어가서 멀미만 좀 하면, 양반이지. (네가 든 감로주 뚜껑을 연다.)
감로주 병 안에서는 향긋한...공기 향이 납니다. 이영이 아는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들이키는 숨이 차갑고 향기로워지는 기분이네요.
윤이영:... 신기한 냄새.
나한:마셔도 신기한 맛이 나.
술이랑은 좀 다르더라고.
윤이영:흐으음... (병을 가져가 한모금 마신다.)
감로주를 마셔보면
몸 속에 따뜻한 기운이 차오르면서도... ...입가가 시원해지는 기분입니다.
액체라기보단, 마치...
달을 통째로 삼킨 듯한 기분이에요.
윤이영:.... 이상한... 맛.
나한:그래도 나쁘지 않지?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마셔보겠어. (감로주 병을 가져가 한 모금 마시더니, 퍽 비장한 눈으로 기압실을 바라본다.)
윤이영:응... (입가를 누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도 못 마셔봤을 것 같아. (따라 기압실을 본다. 이대로 나가면, 어디일까. 바라는 곳이 있으니 발이 성큼 내디뎌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완전히 결심을 하고,
기압실 문을 엽니다.
... ...
그곳에 있는 것은 유백색 허공.
딱딱하지도, 흐르지도 않는 기이한 감촉의 바닥...
빛과 색의 삼원색을 백만 번 겹쳐 쌓고, 온갖 조명과 필름을 가져다 붙여도 이 광경은 묘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뜨거운 항성의 명멸이 감미롭게 뺨에 내려앉고,
기계 장치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잘 짜인 커튼의 모양으로 머리칼을 드리웁니다.
조용한 진동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발과 발 사이, 부드럽게 엉기는 무중력이 마치 비단 같습니다.
보석처럼 맺혔다 흘러 떨어지는ㄴ 위성들,
멀리 반짝이는 은하,
분명 공기조차 없을 우주의 저 편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과,
두 사람이 함께 느꼈던 여름밤의 시원섭섭한 공기... ...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휘몰아치듯, 두 사람이 걷는 길의 양 옆에는 거울이나 유리, 혹은 창문, 수면같은 스크린이 무수히 달려있습니다.
그것은 저 먼 지평선 너머까지 쭉 이어져 있군요.
화면 안에는 여러가지 풍경이 있습니다.
이영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배구대회 우승을 한 날,
졸업식에서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행가레를 받는 모습... ...
그리고 중간중간에, 낯선 나한의 모습도 섞여 있습니다.
머리가 짧거나, 길거나, 어느 세기의 사람처럼 이상한 정장을 차려입었거나, 화를 내거나, 웃거나... ...
그러다, 무수한 스크린 사이에서 아주 익은 광경을 하나 발견합니다.
날씨가 유난히 화창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는 소소한 점을 제외하면
다른 날짜와 다를 것 하나 없던 날.
바로 '그 날'입니다.
스크린 안으로 평소처럼 등교를 하는 이영이 보입니다.
원래대로라면 혼자여야 할 이영의 책상 옆에 새로 놓인 책상.
게다가 거기에 앉아있는 것은...
나한:아, 저 날.
처음 만난 날이야.
윤이영:만나자마자 네가 날 구했지.
나한:그렇게 거창했었나? 하긴, 네가 갑자기 위험에 처할 줄은 몰라서...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이영의 책상 옆에 앉아있는 것은 나한이 아닌 초면의 학생이고,
아무리 기다려도 창문 유리는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군요.
윤이영:그야, 아무도 몰랐지... ... ...어?
창문, 유리...
나한:아... ... (무언가 살피듯이 화면 안을 들여다보다가, 급작스럽게 눈을 빛내며 이영을 바라본다.) 손, 손 줘봐.
윤이영:응? (손을 주고, 나한과 스크린을 번갈아본다.)
나한:(이영의 손을 붙잡더니, 천천히 스크린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윤이영:어!?
스크린이 수면처럼 일렁이며 두 사람이 손을 통과시킵니다.
차갑게만 느껴지는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의 체온만이 완전히 맞닿아있고...
판판하고 매끈한 무언가가 손 끝에 닿습니다.
윤이영:....(유리.)
나한:지금 손에 뭐 닿았어?
윤이영:(나한을 돌아본다.) 아마도, 창문 유리.
나한:좋아, 밀어버려. (잡은 손에 앞으로 꾹 힘을 준다.)
윤이영:(푹 웃었다. 내 등을 밀던 네가 생각나서. 네 그 반응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손에 힘을 주어 밀었다.)
두 사람이 손에 닿은 것을 밀자...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스크린 속의 창문이 이영의 머리 위로 넘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안돼, 이영."
...
경악 어린 깨달음이 내달립니다.
나한은 스크린에서 천천히 손을 거두고 머쓱한 웃음을 짓고 있네요.
나한:... ...'우리'가 했네. 공범이야.
윤이영:그래... '우리' 짓이었어.
나한:저게 떨어지지 않았으면, 네 앞에는 모르는 사람으로 나타날 생각이었는데.
윤이영:... 그랬으면, 지금이랑은 달랐으려나.
나한:아마... ...여기까진 오지 못했겠지.
고작 며칠 안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쉽지 않은 일이잖아.
윤이영:(스크린에서 빼낸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정말 범죄 쪽에 스릴을 꼭 느끼는 건 아닌데,, ... 하길 잘 했어, 방금은.
나한:특히나 평생을 바칠 호의는 더더욱.
(고개를 갸웃, 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긴 여행을 떠날 때 자신에게 얽힌 모든 인연과 시간이 동시에 흐르는 길을 걷게 된다고들 하던데... ...
우리의 인연은 아마 범죄였나봐.
윤이영:(고개를 끄덕거리다, 웃음을 터트린다.) ... 그런가?
그래도 나쁘지 않아. 공범이 있어서.
나한:적어도 외롭지 않아서 좋다. (씩 웃어버리더니,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길을 다 지나면, '목적지'가 있을거야.
윤이영:(나란히 걷는다. 이 길에 혼자였다면 나는 이 곳을 걸었을까. 아마... 오지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