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수양버들이 상흔처럼 그림자 진 궐 안을 걷습니다.
비단과 금실로 장식된 천장과 금빛의 용이 승천하는 사치의 향연.
무엇 하나 허투루 장식된 곳이 없을 정도로 화려한 대궐이었으나, 노아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노아에게는 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옷감과 장인이 며칠 밤을 새워가며 세공한 귀금속들이 걸려 자신을 뽐내길 마다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희나의 부름으로 황제의 집무처인 태창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느릿하기만 합니다.
희문정에서 물끄러미 풍경을 보며 하루를 보내려 했건만.
그 부름에 이끌려야 하는 지금, 어떤 기분이 드나요?
양노아:(황제의 부름에 오고 가는 것이 일이기야 하지만...황비도 아닌 후궁을 구태여 태창전까지 부르는 일이 무엇일지에 관해서는 조금 근심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본래라면 함부로 발을 들일 수조차 없는 곳이겠죠.
양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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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치: |
60/30/12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골똘...)
……듣고 싶지 않아도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통곡입니다.
그것은 분명 노아를 유폐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달라는 간언일 것입니다.
태창전의 앞에 도달하자 노아는 그곳에서 아전 중 하나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폐하, 이 노신의 목을 치셔도 좋사옵나이다. 그러나 후궁 노아만은 제발……."
양노아:(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시 문을 눈짓했다가, 아전을 바라본다) 황제께서 부름하시어 걸음했소만...
무연:(뒷짐을 진 채로 사납게 노려본다. 명백히 적개심을 담은 얼굴로.)
들어가 무엇 하시렵니까.
양노아:(짧게 속으로 한숨을 쉰다. 그래 보이겠지.) 허면 그대의 말을 어명보다 귀히 여기기라도 하라는 것이오.
무연:(입술을 아득 깨문다.) 그 귀한 어명을 사사로이 주무르고 있는 분께서 말씀 하나는 고아하십니다.
양노아:(입이 달싹거리다가, 먼젓번의 말을 삼킨다.) ...물러나시오. 그대가 어찌한다 한들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노기로 떨리는 주먹을 하고도, 제 신분에 감히 건드릴 수 없다. 부들부들 떨며 한 걸음을 물린다.)
궐 안의 간언은 울음과 고통을 섞은 채로 커져 갑니다.
양노아:(비참한 소음 속으로 걸어들어가 황제의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
비단 자락을 부드러이 날리며 아전을 스쳐갈 때, 그의 비통한 혼잣말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드높은 용상 아래에서 노아는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곳에는 충직한 노신과 당신의 황제가 있습니다.
"폐하, 부디 이 노신의 오랜 충정을 생각하시어……."
그리고 그 간언을 무시한 채로 노아에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양노아:(눈을 내리깐 채 입을 다물고 있는다.)
(고개를 괸 채로 시선만 돌려 노신을 바라본다.)
닥치시오.
예까지 걸음한 정인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니.
양노아:...어인 일로 소첩까지 부르셨사옵니까. (불안했던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가기 시작한다.)
은희나:보고 싶어 불렀다. (부드러운 목소리.)
그에 덧붙여...
이 노망난 늙은이가 네가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짐을 희롱하고 있다는구나.
허면 너는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하여서.
양노아:(이 뜻이었구나. 그제서야 좌익위의 말을 이해하고 한참만에 입을 뗀다.)
... ...주상께 아뢰기 외람되오나, 사연국의 인재를 한 자리에 모은다 한들 직제학의 배움에는 미치지 않는 줄로 압니다.
선황께서도 직제학의 직언을 귀담아 들으며 대작하기를 즐거이 하셨던 바, 부디 노하지 마옵시고 너그러이 용서해주옵소서. (말 끝이 떨릴 조짐이 보일 때마다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어간다.)
(한 번 눈을 꾹 감았다 뜬다.) ...소첩의 간청입니다.
은희나:(용상에 등을 기댄 채로 푸른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되려 선황의 그림자를 등에 업고, 너를 내치려 혈안인 이에게 참으로 너그럽구나.
희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기둥 옆에 세워져있던 장식용 검을 뽑아듭니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검은 장식용인데도 불구하고 당장 살을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빛납니다.
드높은 용상에서 한 걸음씩, 그가 다가옵니다.
무엇이 그리 불안할까.
양노아:... (반사적으로 손 끝을 모아쥔다.)
폐하께서 어수에 피를 묻히실까 염려됩니다.
어찌 이리 간절할꼬.
산호와 옥으로 가득한 패물함, 보랏빛 비단... 진주가 알알히 박힌 신이 탐난다 청하면 어여삐 여길 텐데.
일어나거라.
양노아:(손 끝을 쥔 채 고개를 들어올린다.)
짐을 희롱한다는 빈이 이리도 목석같이 굴어서야.
양노아:... ...황송하옵니다. (쥐어짜내듯이 답한다)
무엇이?
(장난이라도 치듯 느긋한 목소리다.)
은희나:(손을 뻗어 흑단같은 머릿결을 가볍게 쥔다. 뺨과 턱을 따라 흐르는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어진다.)
양노아:(푸른 광기가 어린 눈을 잠시 마주한다. 살결에 닿는 손이 분명히 온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서늘함에 뒷목이 섬짓해진다.)
사연국을 제 몸처럼 여기는 가신들입니다.
아양을 부리지는 못할 망정, 입바른 소리나 해대는구나.
그 점 또한...
(손끝을 물린다.)
지루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며 칼을 멀리 던져버린다.)
양노아:(그제서야 한껏 움츠러들었던 심장이 느슨해지며 박자를 되돌린다.)
은희나:방금 경의 목숨을 살린 것은
그 후궁이오.
평생토록 잊지 마시오.
희나는 노신을 물리고, 고개를 조아리고 바들바들 떨던 노신은 태창전 밖으로 물러갑니다.
그 중에도 노아를 힐끔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고요.
양노아:(노신이 물러나고 나면, 다시 고개를 바로한다.) ...허면 소첩도.
돌아가 해야 할 중한 일이라도 있느냐.
양노아:...폐하께서 정무를 보시는 동안 희문정에 머무르려 합니다.
홀로 보는 연못이 그리도 귀하더냐.
양노아:(잠시 침묵하다가 용상 옆으로 자리한다.) 그리 하겠습니다.
(가만히 보다가 다시 용상에 저벅저벅 가 앉는다.)
(고개를 괴고 빤히 노아를 본다.)
양노아:... ... (시선이 내리꽂히는 동안에도 가만히 태창전 바닥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입을 연다.) 정무를 보시지요.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바라보았다.
(고개를 괸 채로 느긋히 눈을 깜빡인다.)
짐이 두려우냐?
양노아:... ...폐하의 옥체가 염려될 뿐입니다.
양노아:화에 잡아먹혀져서야 혼을 갉아먹힐 뿐입니다. 부디 사연국을 위해 충신들의 말을 귀담아 들으소서. (내뱉고 나면 잠시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가 힘을 푼다.)
가까이 오거라.
양노아:(잠시 망설이다가 용상으로 다가간다.)
다시 한 번 고해보거라.
양노아:폐하. (그를 바라보는 얼굴이 참담해진다.)
(고개를 괸다.)
가까이 있으니...
목소리가 보다 청명하게 들려 좋구나.
그래서 오라 하였다.
양노아:... ...폐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들으실 수 있는 것을요.
은희나: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숨은 새처럼 구는 것은 너인데도.
양노아:(잠시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새는 쫒으면 날아가고 바라보면 다가오는 법이지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알고 있느냐?
그저 새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었을 텐데.
(느리게 몸을 일으켜, 노아의 앞에 선다.)
(움직임을 따라 화려한 비녀와 장신구가 반짝이며 무겁게 흔들린다.)
노아야.
양노아:(빛을 산란하는 광경에 잠시 눈 밑이 꿈틀거렸다가 돌아온다) ...예, 폐하.
양노아:(첨언 없이, 가까이 다가가 두 팔을 두르고 부드럽게 황제를 끌어안는다. 이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빌며. 등과 어깨를 감싼 손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가 풀린다)
(너르고 포근한 품 안에서 짧게 속눈썹을 내려 눈을 감는다. 고단한 몸을 간신히 의지한 아이와도 같이.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하고 귀한 존재의 유일한 둥지는 어쩌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체온에 기대어 몇 점의 숨을 내쉰다.)
이대로라면 좋겠구나.
양노아:... (눈 앞에서 흔들리는 면류관 장식이 찬란하게 빛나다가 힘없이 늘어진다. 아이를 어르듯 등에 얹힌 손이 규칙적으로 토닥인다.) ...폐하께서 이 나라의 황제임을 잊지 마시고, 자신을 놓지 마옵소서.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은희나:욕심이 많은 건지, 혹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자로고. (농조로 중얼거린다. 토닥이는 손길 안에서 잠시나마 눈을 감은 채로.)
(품 안에서 고개를 든다.)
양노아:(황제가 고개를 들면 감싸안았던 팔을 내린다.) 소첩은 눈 끝에 닿지 않더라도 항시 폐하의 곁에 있습니다.
은희나:짐을 우롱하는구나. (장난스럽고 느긋한 어조다.)
눈 끝에 닿지 않음에도 어찌 곁에 있다 여길 수 있을까.
(손을 들어 노아의 어깨에 걸쳐진 부드러운 비단을 쓴다.)
(걸쳐져 있는 천 아래로 매끄럽게 손을 넣어 한 겹을 천천히 벗겨낸다.)
양노아:(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비단천이 쓸려나가는 것을 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이 된다.) 폐하, 정무를...
정무. 아니 그러하느냐?
양노아:...중하게 논할 것이 많습니다, 폐하.
이것 또한 중할 터인데.
양노아:(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뱉는다) 중하지 않습니다...
은희나:(비단천을 한 겹 벗겨내고 허리를 끌어안는다.)
(이윽고 몸을 물리며 노아의 허리를 내려다 본다.)
(노아의 허리를 감은 천으로 된 자를 들고.)
무슨 상상을 하는 것이냐?
총애하는 후궁의 연회복 준비보다 중한 것이 있을까.
내 친히 치수를 재는 것인데.
은희나:(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인다.)
양노아:(다문 입매가 살짝 비틀어졌다가) ...직접 상의원에 들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이런 일을 하실 필요는...
보거라.
(비틀어진 입매를 손끝으로 툭 친다.)
이런 표정도 보질 않았느냐?
양노아:... (짐짓 유쾌함마저 띄는 듯한 표정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은 채 시선이 허공에 떠돌다가, 소매 깃을 모은다.) ...물러나 보겠습니다.
더 놀렸다간 토라질라.
양노아:(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곤 물러난다. 여즉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탓해 걸음이 조금 빠르다.)
은희나:(즐거운 듯 얕게 혀를 찬다.) 저리 훤히 보여서야.
노아는 그렇게, 겨우 태창전을 빠져 나옵니다.
어느새 방백처럼 깔리기 시작한 노을이 노아의 신발 앞코를 적십니다.
오늘은 다름아닌 염족의 전달자를 만나 흑양黑羊의 젖을 전달받는 날입니다.
전달자와의 만남은 궁궐의 뒤편에서 은밀하게 진행됩니다.
느리게 발걸음을 옮겨 궐의 뒤편으로 향하자 버드나무의 그림자 안에 갓을 눌러써 얼굴을 가린 이가 보입니다.
양노아:(아주 간소하고 어두운, 짐짓 평범한 유생들과 다를 바 없는 차림으로 나서 궁궐 뒤편으로 향한다. 전달자를 마주하면 무어라 말 없이 근처에 선다.)
오늘의 전달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노아가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부족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얼굴이 없을 노아인데... 사연국에 온 지도 시간이 지났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려나요.
전달자:내부적인 사정이라고만 말해 둘게요. 자.
전달자는 팔을 걷더니 흑양黑羊의 문신을 보여줍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전달자의 표식이죠.
양노아:(문신을 보면 고개를 끄덕였다가) ...혹시 큰 일이 있는 것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읽고 태워버리세요.
제 눈 앞에서.
전달자가 건네준 종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궐 안에서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말로 건네지 않은 것이겠죠.
[사연국 내에서 반역을 도모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우리 염족은 현 황제를 붙잡아 권세를 누리는 것이 목적.]
양노아:... ... (내용을 읽고 잠시 손이 멈칫한다.)
전달자:(경솔하게 중얼인다.) 망국 소리를 듣는 중에 이상할 것은 없죠.
허나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가까이 있는 당신이 뿌리를 잘라야 합니다.
염족을 위해서.
양노아:(
염족을 위해서. 그 말이 명징하게 때려박힌다. 그러나 한낱 부족의 번영을 위해 대륙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옳은가. 태연을 가장하며 편지를 태운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염족의 처우는...
전달자:아직은 모자랍니다. 더, 더 많은 것이 필요해요.
그렇지.
최근 만주 쪽에 쓰이지 않는 너른 들판이 있는데, 그것을 내쫓긴 소수 민족에게 하사해달라고 청을 해 주십시오.
당신의 청이라면 들어주겠죠.
양노아:...염족에 그리 넓은 땅이 필요합니까?
무슨 연유로?
연유를 들지 않아도 그 황제라면 당신의 말을 들어줄 텐데.
전달자:우리 염족을 위한 번영의 발판이라고 해 두죠.
큰 일을 도모하기에 큰 발판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두텁고 어두운 천에 감싸인 병 하나를 내민다.)
이틀치입니다.
양노아:(우선 병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인다.) 고생했어요. 안심하고 돌아가봐도 좋습니다.
전달자:(갓을 눌러쓴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잊지 마십시오.
현 황제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전달자:사사로운 것에 큰 것을 그르치지 말기를.
(곧 수풀 속의 그림자처럼 완전히 물러난다.)
전달자는 물러가고, 당신의 손 안에는 병 하나가 남았습니다.
양노아:(손 안에 쥔 병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염족이 번영할수록 황제는 미쳐간다. 자신이 믿고자 했던 황제는 이미 그 모습을 감춘 지 오래고 총기가 가득했던 눈에는 광기가, 그 시선 끝에는 백성들 대신 덜컥 궁에 눌러앉은 후궁이 담기고 있다. 천천히 손가락으로 병을 굴리기 시작한다.)
양노아:(염족은 종친의 자리도 마다하고 대체 무엇을 바라는가...)
무엇을... ... (그렇다면 나는? 나는 염족의 일원인가, 황제를 홀리고 국정을 희롱하는 후궁인가, 그것도 아니면...)
양노아:(머릿속에 울리는 질문에 침묵한다. 황제가 중한가, 민족이 중한가...저울이 양 어깨를 짓누르게 둔다.)
당신은 저 수풀 너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양노아:
관찰력
기준치: |
80/40/16 |
굴림: |
6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그건, 아까 태창전 앞에서 보았던 좌익위였습니다.
그는 당신과 눈을 마주치고는 쏜살 같이 도망칩니다!
양노아:...좌익, (그를 부르기도 전에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덜컹 떨어진다.)
(봤나? 어디서부터?)
빨라지는 발을 따라 낙하한 심장이 요동칩니다.
그가 사라진 자리를 쫓아 달려 백서전에 도착했지만,
다른 수많은 관원들에 뒤섞여 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양노아:(숨을 몰아쉰다. 낭패다. 좌익위가... ...)
(그가 이 일을 누구에게 고할 것인가... ...)
(나는 죽지 않는다. 아마도 목이 내쳐지는 것은 좌익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몰아쉬는 숨을 따라 손아귀 안의 병이 때마침 찰랑입니다.
양노아:... ...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당장은...당장은 걱정 말자. 차후에 그를 찾으면 될 일이다. 다시 몸을 돌려 처소로 향한다.)
그 시간에 맞추어 노아도 황제의 처소를 향합니다.
황제는 불면증으로 밤잠을 설치는데, 노아와 함께 석반을 들면 씻은 듯이 잠이 온다며 그 이후로 이 시간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황제의 잔에 흑양黑羊의 젖을 타는 것도 그때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황제의 잔에 흑양黑羊의 젖을 타는 것도 그때입니다.
당신은 황제의 수라상을 들이기 전에 자신이 음식을 기미해야 한다고 상궁들을 물리고 수라상을 점검합니다.
오색의 음식들과 흰 쌀밥들 사이에 보이는 약주가 눈에 들어옵니다.
양노아:(이제는 반동처럼 익숙해진 일과. 약주에 흑양의 젖을 흘려넣는다.)
희뿌연 액체가 약주 안으로 부드러이 흘러들어갑니다.
확인을 핑계로 흑양의 젖을 약주에 타고 나면, 상궁들은 수라상을 처소로 들이고 그 이후에 노아가 들어섭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당신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희나가 있습니다.
양노아:폐하.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곁에 앉는다.)
은희나:외진 동굴에 데려다 놓아도 꼬박꼬박 고분할 자로고.
그래, 희문정은 들렸더냐.
날이 맑아 쉬어가기 기꺼웠습니다.
은희나:(빈 술잔을 들어올리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정자에 가져다 놓은 다과는 먹었고?
양노아:하사하신 찻잎과 잘 어울렸습니다. (잠시나마 미소를 지으며 빈 술잔에 약주를 따른다)
은희나:(희고 둥근 술잔 안에 부드러이 약주가 담기는 것을 담담히 바라본다.)
그래?
이상하구나. 내 오늘 희문정에 다과를 내린 적은 없거늘.
(약주를 가만히 바라본다.)
양노아:폐하께서는 저를 놀리는 것을 즐거워하시는군요.
허면, 내 빈은 희문정이 아닌 어디에 있었을까. (조금은 피곤해보이는 낯을 기울인다.)
되었다.
시장하구나. 어서 들자.
양노아:(잠시 황제의 낯을 바라본다) ...피로해보이십니다.
은희나:(눈을 내리깐 채로 젓가락을 든다.) 그럼 예쁜 짓이라도 해 보든지.
양노아:그런 일에는 재능이 없는 것 또한 아시지 않습니까.
(육전 하나를 집어 노아의 입가에 가져다 댄다.)
아.
양노아:그런 일에는 화빈이 더... (입에 디밀어지는 육전에 결국 마지못해 입을 열어 받아먹는다)
은희나:(우물우물 움직이는 볼을 가만 바라본다.)
다른 빈을 찾으라 말하는 것이냐?
양노아:그리 하셔도 원망치 않겠습니다. (빈 잔에 약주를 더 올린다)
(곧 푸른 눈이 차갑게 반들거린다.)
총애가 부담스러우냐.
양노아:총애보다도, (폐하가 변하는 것을 맨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울 뿐이지만, 하는 생각은 속으로 삼킨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어찌 승은을 후궁 된 몸으로 판단하겠습니까.
은희나:(잔을 들이킨 뒤로 부드럽던 눈빛이 눈에 띄게 변한다. 한 글자씩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매섭게 눈을 치켜뜬다.)
대륙의 지존이 너를 이토록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데.
너는 꼭 날개가 부러진 채로 억지로 들어앉은 새처럼 구는구나.
양노아:(눈이 변했다. 싸늘한 빛을... ...)
네 먼저 나에게 닿고자 했느냐?
양노아:... ... ...폐하. 그런 뜻이 아니오라.
네 먼저 나를 안은 적이 언제인가.
여인이 아닌 괴물을 보듯 굴고 있어!
양노아:(그 말에 순식간에 표정이 일그러진다. 애환, 비통함, 죄책감과 연민, 사랑과 증오와 뜨겁고 차가운 이름을 가진 모든 것...무언가 속에서 왈칵 비집고 나오는 듯한 기분에 다급히 손을 뻗어 그 몸을 끌어안는다. 온 몸과 뒷목을 감싸안고 힘을 주는 것이 꼭 바람에 흩날리는 연 같은 것을 잡는 꼴이다. 황제의 등 너머로 굴러가는 눈이 비참하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매번 남의 손에 휘둘리는 꼴이 다 무어란 말인가. 황제이기 이전에 여인으로 연모했던 자를 나락으로 빠트리며 나는 대체 무엇을...) 자신을 놓지 마세요...잊어서는 안됩니다. 제발...
(몸을 끌어안았던 손으로 감히 황제의 양 볼을 붙잡고 눈을 마주친다. 싸늘한 광기 속에서 자신이 아는 모습을 애타게 찾아보듯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듣고...약조했는지...
은희나:(곧 부서질 것처럼 심하게 떨리는 몸. 부러진 송곳니를 세우는 짐승처럼 몰아쉬던 거친 숨이 그의 품 안에 모두 가둬진다. 천하에 어느 하나 대적할 것 없는 존재를 가둘 수 있는 유일한 감옥이자 비통하게도 유일한 둥지였다. 화려하게 올린 머리와 면류관이 그의 품 안에서 구겨지고 헝클어진다. 분노와 광기에 휩싸인 채로 그의 품 안에서 버둥댄다. 목 안쪽으로 악을 쓴다. 날뛰는 금수와도 같이.)
(천하를 대령하고 싶은 이가 있다. 연모하는 이가 있다. 내게 있는 모든 금은보화와 가치를 바치고 싶은 이가 있다. 그저 그 앞에서 여인이기만 하면 돼. 그냥 그거 하나면. 주문이라도 외우듯 속삭이는 그의 말 사이로 악을 쓰며 그의 어깨를 내리치고 밀어내려 발버둥친다. 구걸해 받는 온기란 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픈 것인가.) 방종한 것! 건방진 것 같으니! 짐을 기어이 벼랑으로 밀어 떨어트릴 녀석!
(감히 닿지 못 한다 여겼을 용안을 잡은 두 손 안에서, 뭍 위로 끌어올려진 연못의 물고기처럼 짧게 숨을 멈춘다.)
(비틀린 눈썹. 악과 화가 묻어 파르르 떨리는 붉은 입술. 헝클어져 내려온 머리. 흘러내린 비녀.)
(그 사이의 푸르른 눈동자는 흐드러지게 핀 매화 사이를 님과 함께 거닐던 연못가를 알고 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애정을 속삭이는지도.)
은희나:(그가 어떤 눈동자로 연모를 말하는지도.)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다.)
(그는 제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양노아:(엉망으로 흐트러진 얼굴, 기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 아마 제 쪽도 마찬가지일텐데 나는 당신이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사랑을 속삭이던 입으로 조정을 욕보이는 것도, 꽃가지를 어루만지던 손으로 가신들의 목을 치는 것도.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괴물이라 생각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이 혼탁한 눈동자에 비친...)
(머리에 아무렇게나 꽂힌 비녀와 머리장식을 빼내고 찬찬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차라리 당신이 울었으면 좋겠어.) ...밤이 늦었습니다.
은희나:(거친 숨을 몰아쉰다. 어떤 기억은 차라리 잊는 것이 낫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약조했는지 기억해서 행복할 것이 있을까. 도화처럼 물든 뺨도, 초승달처럼 휘어지던 눈가도 이제 없는 것을. 비겁하게 돌려묻고 있던 것은 자신이다. 내가 두려우냐. 총애가 부담스러우냐. 그 말들로 결국 진정 묻고 싶었던 것은...)
(그의 손길이 의무 하나를 뽑아내고 회한 하나를 빼낸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그의 손빗 사이로 늘어진다. 올무에 잡힌 금수가 조금씩 제 처지를 이해하듯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차라리 내게 닿기 끔찍하다고 말했으면 좋았을까. 손길의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이것은 너의 의무일까. 혹은...) ...
(창백한 얼굴을 들어올린다.)
양노아:(하얗게 질린 얼굴을 바라본다. 유난히 핏기가 가신 듯한 모습.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궁으로 가는 가마에 오르지 말 걸 그랬다. 그저 한 때의 낭만으로 남겼더라면. 겨우 정돈된 머리를 부드럽게 틀어쥐고 고개를 틀어 입을 맞춘다. 그러고서 마치 상대방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입술 끝이 겨우 닿을 정도로 고개를 물렸다가, 바닥에 힘없이 늘어진 양 손을 쥔 채 천천히 이마를 마주대고 어르듯 중얼거린다.) 날이 밝아도 문안을 올릴 필요 없도록, 오늘은 양자전에서 머물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폐하. (다시 고개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입꼬리를 올려보인다)
은희나:(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하나의 약조처럼 느리게 눈을 감는다. 깨물어 기어이 피를 낸 입술 위로 그가 맞물리고 숨과 살이 섞인다. 그가 속눈썹이 깜빡이는 찰나가 보일 정도의 지척에 잠시 머무를 때 즈음 천천히 눈을 뜬다. 가둬진 감옥 안에서 늘어진 손을 쥐는 그를 느낀다. 고단했다. 그것을 그를 밀어내지 않은 핑계로 하자.)
...허한다.
(무엇이 그리 불안할까.)
네게 그것 하나 못 내어줄까... (악을 쓴 목끝이 잠긴다.)
희나는 당신의 입꼬리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립니다.
그 창백한 얼굴은, 꼭 살아있음을 확인해야 할 것처럼 핏기가 돌지 않습니다.
곧 나인들이 상을 물리고 양자전 안의 침소가 준비됩니다.
당신의 곁에 누운 채로 눈을 감은 희나가 보입니다.
양노아:(한참을 잠에 들지 못한 채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 끝으로 부드럽게 내리감긴 속눈썹을 훑어본다. 절벽 끝에 홀로 선 뿌리 깊은 푸른 양귀비. 겨우 든 잠에서 깨기 전에 손을 물리고 이불 위로 토닥이며 눈을 감는다.)
은희나:(겨우 잠에 든 얼굴 위로 그의 손길이 흐르면, 조금 더 고른 숨소리가 이어진다. 폭풍 속에서 점점 허물어지더라도 그곳이 유일한 보금자리인 것처럼.)
달빛과 밤바람만은 다가올 고난과 시작된 어긋남을 모른다는 듯 푸르고 부드럽습니다.
양노아:
지능
기준치: |
80/40/16 |
굴림: |
4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은 알고 있던 흑양의 젖의 효과를 다시 떠올립니다.
잔을 마실 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 그러니까 노아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 효과 때문에 희나는 노아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젖을 마시기 시작한 이후로 폭군이 된 것은 어째서일까요?
애초부터 희나에게 광기의 조짐이 있기라도 했던 걸까요.
양노아:(그에게서 광증의 면모가 있었던가. 내가 알아채지 못한...)
(눈을 감은 채 쏟아지는 의문에 짓눌리며 잠을 청한다. 허튼 결정은 내리지 말자. 섣부른 생각조차...)
이미 당신의 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놓여있기에.
그 시간만은 꼭, 두 사람만 생각해도 된다는 것처럼...
눈을 뜨면, 그 곳은 젖은 물가의 향기가 나는 어드메.
몽중인듯 걸음 하나, 손짓 하나가 아득하지만...
양노아:(꼭 언젠가의 못가처럼... ...안개에 잠긴 듯한 손 끝으로 허공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나아간다)
저 멀리 수양버들과 함께 누군가의 인영이 나타납니다.
당신의 허리에도 채 오지 못할 것 같은 어린 아이.
제 몸보다도 커다랗고 무거워보이는 면류관을 쓰고.
비단과 금실로 수놓인 의복은 품에 맞지 않아 흘러내리는 채입니다.
아이는 당신에게 등을 보인 채로 풍경을 올려다 보고 있습니다.
양노아:(조심스레 어린아이의 곁에 다가가 쭈그려앉는다.) 모자가 너무 크지 않니.
풍경을 바라보는지, 혹은 그저 숨을 내쉴 뿐인건지. 담담하던 눈동자가 제게 맞춰진 눈동자를 바라봅니다.
제 머리 위에 있는 무게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가,
양노아:(부드럽게 양 손을 내민다.) 조금 들어줄까?
그러면서도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보입니다.
양노아:누가 그런 말을 하던?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맷자락을 몇 단 접어준다)
아이:지존이신 폐하께서 내린 어명이다. (두어 번 접힌 소맷자락을 내려다 본다.)
곧 행차가 시작될 테니.
양노아:행차가 잘 보일런지 모르겠네. 올라타서 보면 조금 나을텐데. (제 팔을 툭툭 두드린다)
아이:(특유의 무감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내 저잣거리의 평범한 어린아이였다면 기쁘게 올랐을까.
태자의 행차에 오르지 않고 말이다.
양노아:(그 말에 아쉽다는 듯이 눈썹을 내리트린다.) 그럼 별 수 없구나.
...다녀오렴. 여기에서 보고 있을테니.
묘한 표정을 하는구나.
날개가 부러진 새 같아.
양노아:...과분한 사랑을 받아서 그래. 하지만 아프지는 않단다. (그 뺨에 기대듯이 고개를 기울이지만, 무게를 싣지는 않고 빤히 바라본다.)
아이:부러진 상처를 안고도 아프지 않단 말이냐. (의아한 듯 눈동자를 마주 본다.)
내 아랫것들을 불러 경을 쳐 줄까.
양노아:(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젓는다.) 그런 것은 바라지 않아.
그저 날개가 나을 때까지, 목 좋은 곳에 몸을 뉘이고 흐르는 물이나 바라보고 싶을 뿐...
아이:싱거운 녀석이로고. (가만히 얼굴을 쓸어 본다.)
찾아 즐기지 않으나, 수라에 오르는 백성의 노고를 그리 취급할 수는 없다.
양노아:(엉뚱하다면 그렇다고도 할 만한 대답에 소리내어 작게 웃는다)
...어진 황제가 되겠구나.
그리 될 것 같으냐.
양노아:...그래. 그리고 그리 되었으면 좋겠단다.
그리 될 것이다.
양노아:태자를 믿어. (손으로 천천히 아이의 머리칼을 쓴다.)
(그 손길에 가만히 작은 고개를 기댄다.)
백성의 한숨 한 점을 우렛소리와 같이 여기고.
백성이 일궈낸 낱알 하나를 옥루와 같이 여기며.
군림하되 군림하지 않을 것이다.
양노아:... ...그래. 마땅히 군주란 그래야 하는 것이지. 금과 돌을 같은 무게로 여기는 것... ...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가 뜬다. 이것은 필시 몽중이다. 그렇기에 다시 천천히 입을 연다.) ...미안하구나.
아이:(무감한 눈동자가 물끄러미 그를 본다.)
사연국의 백성이라면 너 또한 나의 아이인 것을.
무엇을 사과하고 싶으냐.
...손을 잡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해.
(손을 뻗어 흑단같은 머릿결을 쓸어넘긴다.)
양노아:누군가를 위해 고통을 감내한다는 것이 이상하니?
양노아:사뿐히 정자에 나리는 비둘기라 한들 한나절에 대륙을 건너기 마련이지.
...알게 될 거란다.
허면 이것도 알게 되느냐?
아이:너는 울고 있지 않은데도, 나는 이토록 슬픈 연유를.
양노아:(잠시 말이 허공에 헛돌며 입이 벌어졌다 다물어진다.)
(말 없이 천천히 작은 등을, 어깨를 토닥인다.) ...그래. 그것 또한...
사무치도록...
그 품 안에 들어찬 것이 조금씩 가벼이 흩어집니다.
노아야.
곧 당신의 품 안에는 물가의 바람만이 남습니다.
양노아:(빈 품을 바라본다. 마치 한 때의 기억처럼 흩어졌구나.)
눈을 뜨면, 뙤약볕이 살을 꼬집는 불길한 낮입니다.
양노아:(실눈을 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어쩐지 살갗에 달라 붙어오는 의복마저 오늘은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몸을 일으키자 당신의 옆에 있던 촛대가 무너집니다.
어제 전달자와 대화하는 당신을 보았던 좌익위의 눈길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양노아:(촛대가 무너지는 소리에 흠칫 떨었다가, 조금 서둘러서 처소를 나선다.)
곁에 비어 있었던 이부자리만큼이나, 무언가 불안합니다.
양노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황제의 집무처인 태창전입니다.
양노아:오늘도... (태창전으로 걸음을 빨리한다.)
설마 좌익위가...
무연:폐하, 소신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좋사옵나이다!
무연:이 몸을 산채로 불태워 돼지우리에 던져주어도 좋사옵나이다.
양노아:(낭패다. 곧장 태창전의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간다.)
태창전에 들어서자, 그는 어제 이 곳에서 간언을 하는 노신을 기다리던 좌익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황제에게 간언을 하며 바닥에 이마를 찧느라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 꼴이 불쾌한 듯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창전으로 들어선 노아를 보고는 더없이 따뜻한 눈빛을 합니다.
양노아:(뒷목에서 우수수 돋는 소름을 무시하고 소리를 내지른다.)
좌익위! 이 무슨 무엄한 짓이란 말이오!
노아의 불호령에도 좌익위는 이마에서 뚝뚝 피를 흘리며 고통에 찬 울음을 삼킵니다.
은희나:들었느냐. 나의 빈이 친히 예까지 걸음하였구나.
양노아:(입 안을 짓씹는다. 제발, 아직은...아직은...)
이 자가 해괴망측한 소리를 지껄이더구나.
네가 짐의 잔에 독을 탔다고.
양노아:...좌익위, 무슨 연유로 그런 소릴 아뢰었소.
말해보시오. 그대의 입으로.
무연:(선혈이 흐르는 이마를 소리가 나도록 찧으며 울분을 토한다.)
보았사옵니다! 들었사옵니다!
후궁 노아가 묘한 갓을 쓴 사내에게 무언가를 전해받았사옵니다.
이는 사연국을 통째로 삼키려는 저 자와 염족의 간교한 속셈이 분명하옵니다, 폐하! 제발!
양노아:그대는 허와 실을 바로 구분하여 아뢰어야 할 것이오. (미간이 좁혀졌다가 시선이 금세 황제에게로 향한다) 폐하. 부디 좌익위와 독대하게 해주십시오.
무연:뻔뻔하고 무도한 자 같으니! (치를 떨며 노아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황망하게 멈춘다.)
용상에서 내려온 황제가 칼을 뽑아내어 좌익위의 어깨를 벤 것은.
은희나:(뺨 위로 점점이 핀 튀를 닦지도 않고 좌익위를 내려다 본다.)
네 어느 안전이라고.
내 사람을 능멸하는 것은 곧 짐을 능멸하는 것이라.
거짓을 고한 것도 모자라, 간교한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한 번 더 검을 들어 그의 반대쪽 어깨에 날을 내린다.)
양노아:폐하, (급히 좌익위를 밀어내고 검 앞을 막아선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린 채로 벌벌 떠는 좌익위의 의복이 피로 젖어갑니다.
양노아:... (칼날이 눈 앞까지 내렸다가 멈추는 것에 잠시 정신이 아찔해진다.) ...벌이 과하십니다.
소첩의 행동가짐이 감히 지존의 정인에 이르지 못했음이 분명하니 진노를 가라앉히소서.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본다.)
은희나:허면 저 자의 말이 참이라도 된다더냐.
(피가 튄 창백한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독대를 바란다 하였지.
허한다면 저 자는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검을 쥔 손이 점점 불안정하게 떨려온다.)
허하지 않더라도 저 자는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양노아: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어찌 그런 걱정을 하시나이까.
은희나:하늘 아래 모든 것들이 짐에게서 너 하나를 앗아가지 못해 안달이 나 있으니까!
비키거라.
양노아: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손에 피를 묻혀가면서까지 소첩을 얻고자 하는 자가 이 하늘 아래 폐하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결국 손을 뻗어 검을 든 손목을 붙잡는다)
은희나:(그 손에 잡히고도 손목은 심하게 떨린다.)
왜.
이 살갗이 피로 물드는 것이 그리도 끔찍한가.
양노아:...예, 소첩의 눈에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눈썹 끝이 비틀린다.)
허면 말해보거라.
그 두려움 때문에 감히 황제의 앞을 막아선 네가.
감히 짐 앞에서 빈을 모함하는 저 자의 목을 저잣거리에 걸어선 아니 되는 이유를 말해보라.
제 이름으로 인해 가신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폐하.
그래, 네가 짐에게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지.
양노아:부디 성군이 되옵소서. (입술을 깨물고 허리를 깊게 숙인다.)
은희나:네가 짐에게 올리는 청은 고작 이런 것이지.
양노아:...허면 제게 별달리 바라는 것이라도 있으시단 말입니까.
있지도 않은 것을 어찌 바랄까.
양노아:폐하가 바라는 것이라면 모두 드리겠습니다.
안아다오.
양노아:...그리 하겠습니다. (검을 쥔 손을 내리고 팔을 감싼다. 피 묻은 볼을, 용포를 아랑곳 않고 품에 안는다. 이리 온기가 넘치는데 창백하단 말인가.)
은희나:(그의 품에 기댄다. 핏기 하나 없는 뺨에는 죄의 흔적이 묻어 있다. 이 곳은 감옥인가. 둥지인가.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나는 그저 쉬어갈 녹색 품을 바라왔을 뿐이다. 그 품을 해치는 것이라면 뭐든지. 그 품을 방해하려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그를 안은 채로 낮고 차갑게 속삭인다.)
황명이다.
안은 팔을 풀지 말라.
(그의 품 뒤로, 검을 쥔 팔을 들어올려 좌익위의 몸에 깊이 꽂는다.)
양노아:(등 뒤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신을 느낀다. 비명조차 되지 못한 단말마. 하얗게 질린 얼굴. 옷 위로, 머리 위로 피가 끼얹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황제를 감싸안은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한다.)
... ...폐하.
...어찌하여.
은희나:짐에게는 너 하나 뿐이다. (선혈로 젖은 금수와도 같이 그의 품에 고개를 묻는다.)
네가 있어 짐이 있는 것이야.
양노아:...이리 해서는 아니되셨습니다. 이리 해서는... ...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인지, 그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
내 너를 모함하는 세상으로부터...
언제까지고 너를 지키리라.
양노아:(모함이 아닙니다, 폐하. 제가 당신을 광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모른 체 하시는 겁니까. 대체 무엇에 눈이 멀어버리신겁니까... ...입 안으로만 끊임없이 중얼이며 팔을 늘어트린다.)
은희나:(그 품 안에서 고개를 든다. 번진 피가 묻은 뺨은 여상하기만 하다. 광증의 낙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이 차구나.
은희나:(하얗게 질린 얼굴을 언젠가처럼 손끝으로 쓴다.)
차를 내리마.
동백을 띄운 향유도.
흑단같은 머리카락 위로 끈적한 피가 엉깁니다.
그런 당신을 어루만지는 황제의 손에도 그 피가.
태창전을 나서 엉겨붙은 피와 알 수 없는 액체를 닦아내고 의복을 갖춰입은지도 오래.
그러나 감각 끝에 엉겨붙은 것마저 씻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솔종루 부근을 바라본다.)
물소리를 거느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솔종루입니다.
궁궐에서 연회가 벌어질 때면 솔종루에는 밤에도 빛이 꺼지지 않습니다.
누각은 연못가에 놓여져 있으며, 누각 근처의 화단에는 돌담의 아래로 색색의 화려한 모란들이 피어있습니다.
양노아:
관찰력
기준치: |
80/40/16 |
굴림: |
1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언제 봐도 어지럽고...)
이만큼 꽃들이 피어있다면 으레 꽃향기가 나야 정상이거늘…….
호숫가의 물냄새만 날 뿐 꽃향기는 가까이 가도 맡아볼 수 없습니다.
양노아:(향기 없는 꽃밭이라니 이 무슨 기이한 일인가. 가까이에서 꽃을 만져본다.)
여린 꽃잎은 당신의 손아귀 안에서 부드러이 만져집니다.
감상을 건드리듯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소리의 근원을 쫓으면, 돌담 너머로 이어집니다.
양노아:...노래? (홀린듯이 그 노랫소리를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궁에 찬 바람이 돈 뒤로 이런 노래는 오랜만인데.)
홀린듯이 돌담 가까이에 다가서자 노랫말이 들립니다.
양노아:
교육
기준치: |
60/30/12 |
굴림: |
70 |
판정결과: |
실패 |
...게 누구 있습니까.
노래를 부른 이는 머뭇거리는 듯 잠시간 말이 없다가, 한마디를 건넵니다.
"궐 안에 계신 귀한 분이 듣고 계셨나보네 그려."
양노아:...가락이 구슬프고 사무쳐서요. 잘 부르십니다.
양노아:평소에는 이곳에 잘 걸음하지 않는데, 귀인을 만났습니다.
...그 노랫말은 어떤 의미이온지.
"아무래도 듣는 이의 마음이 이미 구슬프고 사무쳐있던 것은 아닌가 싶구먼."
양노아:... (모란꽃. 그 말에 잠시 침을 삼킨다.)
...예. 압니다.
"참으로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이지. 어느 화단에 심어도 그 곳의 주인처럼 빛을 발하니 말이야."
"그래서 어떤 나비도 찾아들지 않으니, 외롭지 않겠는가?"
양노아:(향기 없는 모란꽃.) ...꽃의 기쁨이 단지 나비와 벌이 찾아드는 것 뿐이겠습니까. (아니라고 믿고 싶을 뿐이지만...)
"돌담에 핀 들꽃 하나에도 나비는 날아들기 마련인 것을."
양노아:(잠시 담을 바라본다. 궁중 속의 모란. 향기 하나, 찾는 벗 하나 없는 고고하고 화려한 꽃...)
버선발에 짓밟히더라도 민들레를 꿈꾸는 꽃도 있는 법이지요.
"귀인을 만난 것은 자네 뿐만이 아닌 것 같구먼."
"떠돌이 늙은이가 한마디 첨언해도 되겠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짊어지려 하지 말게."
"돌담을 두고도 자네의 회한이 새어나오는 것 같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눠본 것이 아득한 시절 같기만 합니다.
"이 늙은이는 앞 대신 다른 것을 볼 수 있거든."
"그럼, 언젠가 연이 닿는다면 또 이야기를 나눔세."
양노아:가는 길에 평안이 있으시길. (상대방이 보이지는 않지만, 예를 갖춰 인사한다)
노래를 부른 이의 혼잣말과 함께 그 음성은 점점 멀어집니다.
노랫소리가 멎은 담 앞에는 당신만이 서 있습니다.
더 이상 어떤 노랫소리도, 조언도 들려오지 않는 담 앞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그 묵묵함이 노아를 대신해 어떤 답도 더 내려주지 않듯...
가슴 속에 얹히는 무게도 스스로 해결해나가야겠지요.
양노아:(시끌벅적한 잔치도, 궁을 가르는 살바람도 닿지 않는 곳에서 한참동안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코끝이 아릴 만큼 달콤한 술도, 엄선된 기생들의 춤사위도 없는 곳.
어쩌면 그 모두와는 무관하게 지키고픈 것이 있을지도 모르죠.
걸음을 옮기면, 무심코 내려다본 시선 끝으로 비단신이 보입니다.
양노아:(나라 제일 가는 장인이 금실을 하나하나 끼워넣었다는 비단신. 과연 아름다움에 눈이 멀 정도다. 하지만 무엇을 밟고 이 신에 발을 올렸는가...고개를 숙이면 눈 앞으로 금빛 장신구들이 흔들린다. 어지러이 산란하는 빛에 다시 허리를 곧게 세우고 솔종루로 향한다.)
금실을 꿴 바늘이 뚫고 지나간 것은 백성의 살갗일지도 모르며,
보드랍게 덧대어진 비단신은 백성의 눈물 위를 사뿐히 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솔종루를 걷던 노아의 눈에 의영전이 보입니다.
황제와 함께 할 저녁 수라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처소로 돌아가 잠시 복잡한 마음을 달래는 것도 좋겠지요.
양노아:(우선 옷차림도 가벼이 정리하자. 마음이 무겁다면 몸이라도 가벼워야지. 그런 생각으로 의영전으로 가는 길목에 오른다.)
덜 수 없는 것 대신에 무언가를 덜어낼 수 있도록.
그렇게 의영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처소로 향해야 했을 것입니다.
노아의 처소 앞, 가득한 모란꽃 사이에 선 인영을 발견하지 않았다면요.
그를 향한 애정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진 화단 사이로, 몸을 숙이고 있는 황제를 발견합니다.
면류관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창백한 뺨 언저리가 보입니다.
양노아:(의영전 앞의 황제를 발견하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숨을 죽이고 조용히 다가간다. 황제의 바로 뒤에 다가서서야 입을 뗀다.) 폐하.
은희나:(짊어져야 하는 무게만큼 화려하게 틀어올린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목에는 유난히 핏기가 없다. 한때 꽃가지를 만졌던 손끝이 꽃잎 언저리를 더듬는다. 다가선 기척과 그림자를 모를 리 없었다. 언제 목에 들어올지 모를 검과 화살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폭군이기에 앞서,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기척에 온 신경을 다 하는 여인이기에. 돌아보지 않은 채로 중얼인다.) 덧없구나.
아름다운 만큼.
양노아:... (잠시 모란에 시선을 둔다. 꽃향 대신 허리춤에 찬 향낭의 향이 더 진하다.) 좋은 꽃입니다.
양노아:아름답되 향기를 품지 않으니, 모란을 찾아 시선을 돌린 자만이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아한 꽃이라 좋아합니다.
은희나:향기도 없는 꽃을 향해 시선을 돌릴 나비가 몇이나 있겠느냐. (담담히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본다.)
보거라, 그 향낭 덕에 나는 돌아보지 않고도 너인 것을 알았는데.
허면 궁의 꽃을 바꿔심으셔도 될 터인데.
은희나:나비를 기다리지 않는 꽃이라. (입속에서 작게 굴려 본다.)
네 말이 맞다. 허면 향과 꿀이 가득한 다른 꽃을 심어버리면 될 일인 것을.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스치듯 꽃잎을 본다.)
어리석은 일이구나.
네게 줄 것이 있다.
오늘 저녁 수라는 의영전에서 들자꾸나.
양노아:...제게 하사하실 것이? (눈썹을 둥글게 올리며 잠시 황제를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인다.) 드시지요. 바로 수라를 들이라 이르겠습니다.
은희나:내 빈이 좀처럼 물욕을 내지 않으니, 내 바삐 움직여야 하지 않겠느냐. (손을 뻗어 가볍게 뺨을 쓴다.)
양노아:...송구합니다. (그 말에 잠깐 웃으며 뺨을 쓰는 손에 고개를 대었다가) 소첩이 황금 기둥을 지어달라 청하지 않아 마음을 쓰셨나이까.
은희나:그래. 금으로 기둥을 올리고 옥으로 호수를 만들어 달라 청하지 않아 성심을 어지럽혔다. (느슨히 눈을 뜨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어떤 벌을 내리면 좋겠느냐.
양노아:폐하께서 흡족하실 벌을 내리세요. 달게 받겠습니다. (여전히 미소를 올린 채 답하더니, 가볍게 황제의 등을 받치듯이 민다.) 드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이리 거듭 안으로 들고자 하니, 내 빈은 짐과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모양이로고.
굳세고 영묘하다는 뜻을 가진 궁전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는 중전과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의영전의 뒤로 이어진 정원으로 향할 경우 솔종루로 이어지며,
의영전의 창을 내다보면 노아의 소원대로 정원의 길목따라 심어진 수양버들 가지가 밤바람에 구름처럼 흔들렸죠.
황제는 조금 창백할지언정, 적어도 약주를 마신 직후보단 담담해 보입니다.
본래라면 양자전으로 수라가 올라가기 전 흑양의 젖을 타야 했겠지만...
이렇게 되면 수라를 드는 와중 어떻게든 희나가 시선을 돌리게 한 뒤에 젖을 타야겠네요.
노아와 희나가 의영전 안으로 들어서 자리를 잡자, 수라상이 안으로 들어옵니다.
천에 싸인 무언가를 들고 있던 몸종이 함께 들어옵니다.
아직도 신경 끝에는 끈적한 피와 비명조차 되지 못한 좌익위의 단말마가 남아 있는데도.
양노아:(문득 낮의 일을 떠올리면 뒷목이 섬득해진다. 내 눈 닿지 않는 곳에서 죽어간 이가 대체 몇이란 말인가.)
꼭 주실 것이 있었다면 제가 양자전으로 걸음하여도 되었을텐데.
은희나:(피가 튄 것이 언제였냐는 듯 말끔하게 닦인 얼굴을 들어올린다.)
한 시진이라도 이르게 보고 싶더구나.
입은 모습을 말이다.
양노아:...입은 모습? (눈을 천천히 끔벅인다)
희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궁녀가 비단 천을 풀어 노아에게 바칩니다.
비단 싸개를 걷어내니 노아에게 어울리는 색과 보석으로 황제만큼이나 화려하고 우아하게 장식된 녹색 연회복이 아래로 치렁하게 내려옵니다.
은희나:누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지 모두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양노아:... ... (펼쳐진 연회복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허나 폐하. 이것은,
일개 빈궁이 갖출 만한 예가 아닙니다.
은희나:(정인의 낯 위로 기쁨이 떠오르길 기다리던 얼굴이 굳어진다.)
내 그깟 목 몇 개에 너를 비에 책봉하지 못하였다고 원망이라도 하는 것이냐.
양노아:(눈을 잠시 질끈 감았다가...) 비의 자리도, 황금 기둥도 바라지 않습니다. 폐하.
제가 이리 과시하는 것이 폐하께 독이 된다는 것을 어찌하여 모르십니까. 이런... ... (재물을 바라고 궁에 들어온 것이 아닌데도.)
은희나:허면 귀비를 내릴까. 무엇이 좋겠느냐. 황후를 끌어내려 그 자리에 너를 앉혀주면 좋겠느냐? (눈동자가 떨린다.)
깊은 병이 든 것을 숨기고 궐로 들어와, 감히 옥체를 해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워 끌어내리면 될 일이다.
양노아:제가 바라는 것은 권력이나 보석 같은... ...황제께서 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잠시 황제의 면면을 바라본다. 창백한 피부 아래에 수백가지의 모습이 담겨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제가 연고 하나 없는 수도로 온 것은...
궁에 황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폐하께서 그것만 알아주시면 족합니다.
(그의 낯을 바라본다. 먹을 담뿍 적셔 그려낸 것 같은 눈썹 아래로 연잎같은 눈동자가 깜빡이는 것을.)
나를 바란다고.
은희나:네가 내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잠시 길을 잃으셨을 뿐. 찾게 되실 겁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던 이처럼 말하는구나.
양노아:많은 사람을 만나보면 알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이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그가 어떤 궤적을 그리며 살아왔는지...
폐하께도 분명히 빛나는 궤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다만 별똥별이 떨어지며 빛을 털어내듯이 잠시 그 길을 잊은 것 뿐이지요.
언젠가 뒤돌아보면, 반드시 보입니다. (곧은 눈이 황제를 바라본다.)
은희나:짐의 궤적이 빛난 적이 있다면 빈이 그 곁을 어둡고 포근하게 감싸주었기 때문이었겠지. (기억의 어드메를 더듬듯 아득한 목소리.)
...(손을 뻗어 부드러운 눈썹뼈부터 곧은 눈을 쓸어내린다. 부드러운 붓으로 난을 치듯이.)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내 언젠가 뒤를 돌아본다면...
그 곳에 네가 없기를 빌어야, 멀리 도망쳤기를 빌어야 진정한 연모인 것일진데.
어쩌면 좋을까... (속삭이며 입술을 가까이 한다. 달싹이며 언어를 빚어내는 붉은 입술이 깃털처럼 닿을 듯 말듯 움직인다.)
양노아:괘념치 마세요. 험준한 길을 보필하는 것이 제 몫이니. (푸른 눈이 깊은 그리움으로 빛나는 것을 본다. 한없이 보고만 있어도 차분해지는 시선. 회한과 광기가 담겼더라도 나는 안다. 나만은... 눈을 내리뜨며 가까이 스치는 입술을 겹친다.)
은희나:(피로 덮여 끝없이 너울지는 가시밭을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켜켜이 쌓인 죄의 무게로 으스러지는 뼈와, 지옥불로 녹아내리는 생살을 그저 험준하다고 여길 수 있다면. 나비를 기다리는 모란만큼이나 덧없는 상상은 섞이는 혀끝에서 뭉개진다. 정인의 뺨을 매만지던 손길은 귀끝으로 옮겨가 부드럽게 귓불을 주무른다. 입안을 적시는 것은 독인가, 꿀인가. 닿을수록 갈증이 이는 것은 어째서인가. 목 안쪽으로 눌러 삼키며 팔을 뻗는다. 그의 목을 끌어안아 몸을 붙인다. 무엇인지도 모를 것을 확인받고 싶은 이처럼. 꽃가지를 취하고픈, 봄 속의 평범한 이처럼.)
양노아:(염족이라면, 백성이라면 상상조차 해보지 못할 진귀한 보석을, 금으로 수놓인 옷들을, 궁을 뒤덮고도 남을 황금을 버려가며 바라는 것이 딱 한 번의 맞닿음이라면. 칼을 끌며 피바다를 걷는 폭군이 마치 몽중의 어린아이 같다. 그대는 무엇을 바라매 독을 받아들이는가. 뒷목을 받쳤던 손가락이 가볍게 목을 감싼다. 이게 나의 벌이다. 황제를 폭군으로 만들고 정인을 익사시키는 것이 나의 벌이야. 달디 단 벌이 혀 끝에서 입 안으로 굴러들어간다. 부디 저를 용서치 마세요, 폐하. 반드시 제 목을 치세요. 어진 황제를 홀린 후궁의 목을 쳐 본보기를 보이시고, 피로 물든 모란을 제 시신에 뿌려주세요. 그런 말이 목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것을 참으려 숨 한 번 들이쉬지 않고 단 벌을 받아들인다.)
은희나:(손아귀 안의 천하가 무겁고도 덧없다. 비의 자리도, 황금으로 된 기둥도 마다하는 이를 웃게 하려면 어쩌면 좋은가. 죄에 짓눌려가는 이 한 몸을 온전히 바치면 너는 웃을까. 황제가 아닌 은희나는 죄를 막아줄 용상조차 없는 괴물에 불과할 터인데. 우리의 화양연화는 이미 까맣게 타 들어간지 오래인데도. 그대는 무엇을 바라매 진 별을 바라보는가. 목을 감싸는 손에 익숙하게 몸을 맡긴다. 비단잉어가 뛰노는 못을 주마. 금은보화를 가득 채운 자개함을 주마. 녹음을 비단 위로 옮겨담은 의복을 내려주마. 그러니 이 괴물을 사랑해다오. 네게 있지도 않을 것을 바라는 우매한 지존을 귀애한다 말하거라.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마음이 차오른다. 그것이 가쁜 숨이 되어 울컥이며 차올라, 숨을 찾듯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튼다.)
양노아:(그대를 연모합니다.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말을 언제쯤 믿게 될까. 저잣거리의 여느 연인처럼, 당연히 나비가 꽃으로 돌아올 것이라 여기는 날이. 이 궁궐의 모란을 뽑아 없애면 돌아올 것인가, 피바람에 가신들의 목이 모조리 뽑혀나가면 돌아올 것인가. 이토록 화려한 꽃 사이에서 작은 민들레 하나 찾는 것이 이리 어려울 일인가.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눈가를 쓸어내린다. 꼭 눈물자국이라도 찾듯이. 그제서야 잠시 숨통을 트이며 얼굴은 물리지 않은 채 가만히 눈 앞의 연인을 세세히 뜯어본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폐하.
은희나:(그리 화려하게 피어나야만 하는 꽃이 있는지도 몰랐다. 향기도 나비도 없이 홀로 외롭게 피어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어쩌면 그 모란꽃 안에는 작은 민들레를 닮은 아이가 웅크려 있다. 크고 화려한 꽃에 의태하여 세상을 버텨내야 했던. 그리 피어나야만 정인 앞에 설 수 있었던. 그의 손이 그리는 궤적이 어쩌면 모두 눈물선이다. 숨의 빛깔이 섞이도록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나를 살핀다. 아니, 나를 찾아내려 하는구나. 목 안쪽으로 독과 꿀을 삼킨지 얼마나 되었을까. 숨 끝에 가시같은 애정이 걸린다. 가엾고 어여쁜 짐의 빈. 기어코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릴 방자한 것. 기어코 벼랑 아래로 함께 떨어질 것만 같은 녀석.) ...
끔찍할 만큼.
양노아:(대답이 돌아오면 입꼬리만 올려 웃어보인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지옥으로 떠밀고 있구나. 어쩌면 이미 떨어지고 있는지도, 이곳이 지옥인지도...흐트러진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리다가 귀 뒤로 넘겨주며) 허면 오늘은 소첩이 조금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주시겠지요.
짐을 이토록 약하게 하는 이는 없으니...
입술을 맞대는 연인들의 뒤로는 다가올 지옥의 불길이 만연한데.
어쩌면 추락을 앞두고 비행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둘인데도.
맞물리는 살갗이란 뾰족하고도 기꺼운 것이어서...
그 날 밤만은 꿈을 꾸지 않았던 것만 같습니다.
함께 밤을 보내던 두 팔이 유독 당신에게 매달렸기 때문일 수도,
입술 위의 떨림이 유독 살갗 위로 짙게 남아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입술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하는 것들을 몸짓으로 대신하듯.
아침이 되어 황제는 돌아가고, 노아는 산책을 할 겸 의영전 뒤쪽 궁중의 정원을 거닙니다.
새들은 지저귀고, 계절감 있는 꽃들이 하나같이 당신에게 어여쁨을 받기 위해 울타리 너머로 목을 빼고 있습니다.
가득히 심겨져 있는 것은 모란꽃이기 때문이지요.
이상하죠, 사람을 홀릴 정도로 탐스럽게 피어난 꽃인데 말입니다.
양노아:(아침 공기를 폐에 한가득 담아보지만 맑기만 할 뿐. 나비와 벌이 찾지 않아 잎사귀 하나 갉아먹힌 곳 없는 모란을 가벼이 손에 쥐었다가 놓는다.)
흘러들어오는 것은 맑은 공기 뿐, 향기는 없습니다.
어디 하나 다치지 않았으나 외로이 피어있는 모란이 손아귀 안에 가볍게 잡혔다가 멀어집니다.
그 때, 상궁 한 명이 급하게 달려와 노아를 찾습니다.
그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다가 황제께서 태창전에서 노아를 찾고 있음을 알립니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당신을 찾아대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흑양의 젖이 얼마나 좋은 효과를 지니고 있는지 새삼 실감이 납니다.
양노아:황제께서 또. (그것도 태창전에. 뒷말은 간신히 삼켰으나 무어라 더 묻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희나의 부름에 태창전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 곳에는 당신의 황제가 있습니다.
황제의 어진을 그리려던 중인 것 같은데, 왜 노아를 부른 걸까요?
양노아:폐하, 어인 일로... (태창전에 발을 들이다가 화원을 바라보고 잠시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친다.)
은희나:왔느냐.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다. 어젯밤의 위태로움은 간데 없이.)
양노아:화공이 어진을 그리려던 참인 것 같습니다, 폐하.
은희나:(고개를 괸 채로 잠시 노아를 바라본다.)
셈이 빠르고 영민하다. 주변을 아울러 살피는 일에도 능하지.
그러니, 후세에 알려져야 할 것은 오히려 네가 아니더냐?
목 아래로는 나를 그리고, 목 위로는 노아를 그리거라.
그 망측한 명령에 화원은 단말마 같이 되묻습니다.
양노아:(이쪽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해괴한 명령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을 둥그렇게 뜬 채 황제를 바라보다가) 폐하, 어찌 그런 불경한 명을 내리시나이까.
그것은 예절과 법도에 어긋날 뿐더러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은희나:아니 될 것이 있느냐. 내가 그리 바라거늘.
두 번 명하게 하지 말거라.
화원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희나는 미간을 좁힌 채 당장이라도 경을 칠 것처럼 불편한 얼굴을 합니다.
양노아:(전례가 없던 해괴한 명이라 한들 이 나라의 지존은 황제. 그가 명하는 것이 누구에게 불경하단 말인가. 궁중의 법도 또한 기억하는 자가 존재할 때나 유의미한 것.)
... (그렇다면 차라리 무슨 일이 나기 전에 응하는 것이 옳다. 옷자락을 정리하며 어진의 바탕이 되는 의자 앞으로 다가간다) ...받들겠습니다, 폐하.
은희나:그래, 그리 굴어야 옳은 것이지.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인다.)
(가까이 선 몸에 고개를 기댄다.)
화원은 통탄스럽다는 얼굴로 덜덜 떨며 붓을 움직입니다.
궁중의 법도 또한 기억하는 자의 목이 존재할 때나 유의미한 것.
대신, 그 명제를 지키기 위해 당신 외의 모두를 해칠 순 있죠.
다 닦아낸 지 오래인 피가 새삼스레 목 뒤를 흐르는 것만 같습니다...
은희나:몸이 곤하지는 않느냐. (작게 중얼인다.)
양노아:(잠시 시선을 내리면 여느 여인과 다를 바 없는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선득함에 손이 베일 정도로 잔인하면서 누구보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모란. 이 나라의 지존이자 나의 정인...) ...예, 살펴주신 덕에.
은희나:(그 눈동자는 온 천지에서 단 하나만 담으면 충분하다는 듯 곧고도 흔들림이 없다. 이 감정은 어딘가 찬란하게 뒤틀려 있다. 그러나 무저갱 속에서 누가 그 빛을 마다할까.) 깨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무얼... 섭섭하지도 않으냐.
양노아:(이런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인가. 역사 속을 헤집어서라도 묻고 싶다. 그대들은 어떻게 지존을 품었느냐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답한다.) 국정 앞에서 어리광을 부려서는 아니되지요.
은희나:(짙은 눈썹, 눈꼬리 아래로 내려온 속눈썹. 입꼬리의 움직임 하나를 찬찬히 살핀다. 가엾은 새 한 마리를 벽 안쪽에 가둬놓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격이다.
날개를 자르지도, 하늘을 막아놓지도 않았으나 내 곁에 있어 다오. 이 숨이 거기에 달려 있으니. 그리 끊임없이 속삭인다. 피를 내고 살을 베어가며.) 허면.
내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달랐겠구나.
양노아:(그 대답에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뗀다.) ...그리 되고 싶으신 겝니까?
은희나:불경한 질문이로고. (담담하게 중얼거린다.)
양노아:...소첩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말은 그리 뱉었으나 별달리 반성하는 기색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조용히 시선을 화공에게 둘 뿐. 이것을 조금 더 먼저 물었다면 대답이 달라졌을까.)
은희나:그다지 반성할 생각도 없는 표정이구나. (농을 섞어 대답하곤 잠시 간극을 두고 입을 연다.)
살갗 아래 흐르는 피가 몹시도 무거워...
어디로도 날아갈 수 없을 것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고개를 든다.)
목 아래로는 황제의 용포를 두르고, 목 위로는 노아의 얼굴을 한 어진이요.
화원은 떨리는 손으로 어진을 희나에게 올립니다.
희나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입니다.
양노아:(가만히 그 어진을 바라본다.) ...흡족하십니까, 폐하?
내 대신 나의 정인이 후대에 황제로 남을 것인데, 어찌 흡족하지 않을까.
화원이 고개를 떨군 채 침통한 얼굴을 하는 것은 당신에게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양노아:(시대의 폭군은 이러한 얼굴로 남는다. 기뻐해야 할까. 사람들이 당신 대신 내 얼굴에 돌을 던지고 어진을 불태우는 것을 기꺼이 여기는 것이...)
이제 다른 이들은 당대의 폭군을 당신의 얼굴로 기억하는 것일까요.
어지러운 걸음은 시간이 지나서야 태창전 밖으로 나옵니다.
오늘도 한 곳 정도를 산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노아:(백서전으로 향한다. 몇몇 가신들이 한낱 후궁이 백서전에 발을 들여 정사에 흠을 남긴다고들 하지만...)
황제가 실질적으로 정사를 보는 건물로, 이곳에서 황제는 신하들과 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크고 작은 나랏일을 처리합니다.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양각으로 새겨진 책상 위에는 여러 문서들이 놓여있습니다.
꽤나 바르고 정갈하게 쓰인 글씨들이 눈에 띕니다.
양노아:(찬찬히 상소들을 읽어내린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글들이 올라온다...)
제때에 보급을 받지 못해 지역을 이탈하는 군졸들, 죄를 저지르고도 권세를 등에 업고 활개치는 탐관오리들.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해 모든 기둥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양노아:(개중 위태로운 것들은 은근히 황제에게 언질을 한다. 누군가가 본다면 감히 황제에게 교태를 부려 나라를 쥐락펴락한다 여기겠지. 그러나 이미 염족을 떠나 올 적부터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의 중심은 이미 다른 곳에 있지요.
양노아:
자료조사
기준치: |
70/35/14 |
굴림: |
3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일기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일기는 아닌 것으로, 마치 급하게 작성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양노아:... (상소문 사이에? 의아한 표정을 띄며 내용을 읽는다)
... ... (천천히 미간이 좁아든다. 정신이 돌아와?)
...설마.
양노아:(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급히 종이를 놓는다. 틀림없다. 그 젖 때문이다. 그것이 황제의 정신을...)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급히 의영전으로 걸음을 옮긴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어쩐지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노아의 뇌리에 문득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스칩니다.
아, 오늘은 염족의 전달자와 밀회가 있는 날입니다...!
기다리던 날일 수도, 그리 내키지는 않는 날일 수도 있겠지만요.
양노아:(걸음이 멈칫한다. 하필이면 오늘. 제자리에 우뚝 선 채 주먹을 꾹 쥐었다가 놓는다.)
...이토록 무력하단 말인가.
느린 걸음으로 궐의 뒤편으로 향하자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전달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전달자는 흑양의 젖을 전달하며 노아 덕에 만주의 들판이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염족의 소유가 되었음에 대한 감사를 전합니다.
추가로 전달할 것이 있습니다.
염족의 입지를, 나아가 황제의 입지를 위협하는 치들이 있어요.
붉은 학이 용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매 국가의 존엄이 위태로워지고 있다.라고,
황제에게 은유적으로 전해요.
당신의 안위 또한 위한 것이니.
양노아:그 말은 곧 혁명이 도래하리라 이르는 것이지요.
염족의 안위는 곧 당신의 안위.
명심하세요.
전달자는 노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곧 수풀 속으로 몸을 숨깁니다.
붉은 학이 용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매 국가의 존엄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양노아:... ... (궁 내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양노아:(차라리 내 목이 잘리는 것으로 이 모든 일이 끝난다면 좋을 것을... ...찬 공기가 지나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당신의 목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몇 사람을 해칠지 모르는 황제의 손아귀 아래에서, 숨을 죽인 것처럼.
의영전으로 돌아가는 길, 희나의 몸종이 오늘의 저녁 수라는 희문정에서 들자는 어명이 있으셨다며 전하고 갑니다.
요새 황제께서는 양자전에 머무르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술잔에 먼저 젖을 타는 것은 힘들 것 같으니, 다시 희나의 눈을 피해 자리에서 잔에 젖을 타야겠네요.
희문정에 다다르자 내관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합니다.
"황제께오서 정자 위에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연회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양노아:...만나뵐테니 물러가도 좋소. (희문정으로 오른다. 황제께서 양자전에 들지 않으시는가...)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나는 둥근 어깨가 보입니다.
꽃잎이 떠 있는 거대한 나무 욕조 안에 기대 앉아 있는 당신의 황제입니다.
수면 위로 머리를 길게 늘어트리고, 얇고 흰 비단천을 입은 채입니다.
양노아:(김이 오르다 허공에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를 부른다.) 폐하. 양자전에 들지 아니하시고.
은희나:밤이 좋아 운치를 즐길까 하여서 말이다.
목욕 시중이나 들게 하려고 불렀다.
양노아:장난이 짖궂으십니다, 폐하. (그렇게 이르면서도 욕조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은희나:(목간통에 팔을 괸 채로 한 쪽 뺨을 기대 그를 본다.)
어디 아랫것들에게 보일 수 있는 상태여야지.
아니 그러하느냐.
양노아:(그 말에 욕조 밖으로 드러난 살갗에 시선을 두었다가 슬쩍 눈을 떨군다.) ...송구합니다. 바깥바람이 서늘하지는 않으신지.
은희나:쯧. (짧게 혀를 차며 천 아래로 비치는 몸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를 본다.)
서늘하였는데, 네가 오니 통 모르겠구나.
이 말간 얼굴을 어떻게 놀려줄까 하는 생각에.
양노아:장난이 심하십니다. (그러나 마땅히 더 변명할 말이 없어 괜히 마련된 나무 그릇으로 따뜻한 물을 퍼 황제의 어깨에 천천히 흘려 끼얹는다.)
은희나:고얀지고. 농을 피하려 옥체에 물을 흘리는구나. (장난스레 중얼인다.)
...
(담담히 얼굴을 살피다가 불시에 양 손으로 물을 퍼 노아의 얼굴에 확 끼얹는다.)
양노아:윽, (별안간 끼얹어지는 물에 몸이 움찔 바깥으로 물러났다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리 젖었다가는 고뿔에 드는데.
양노아:(눈을 천천히 끔벅이다가...) 복수하신 겁니까?
은희나:내 그리 좁은 인간으로 보이더냐. (뻔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리 들어오거라.
밤이 차다, 노아야.
양노아:...그리 하겠습니다. (황제를 흘겨보는 것도 잠시, 이럴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놓인 빈 함에 무거운 비단옷들을 개어 쌓아놓는다.)
은희나:눈빛이 불경하기 그지없구나. (짐짓 엄한 말투지만 가시 하나 없다. 고개를 괸 채로 가만히 지켜본다.)
가만.
내가 해 주고 싶다.
은희나:누가 보면 생판 남이 말한 줄 알겠구나.
(젖은 손을 뻗어 한 겹 남아있던 의복과 얇은 비단옷 사이로 손끝을 넣는다.)
내 시중이라도 들어 볼까 하고.
양노아:...농이 심하십니다. (얇은 천 사이로 들어오는 손이 목욕물에 데워져 그리 차지 않다.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남은 의복이 발 밑으로 떨어지면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스레 욕조로 들어서 앉는다.)
은희나:(그의 성정처럼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면을 본다. 눈을 내리깐 채로 속삭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양노아:(흔들리는 수면을 따라 일렁이는 비단옷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든다.) 고요한 밤이 소란스러운 낮보다 기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은희나:허면 나는 그 밤에도 낮에도 함께 할 수 있어 기껍구나.
(손을 뻗어 가까이 자리한 뺨을 쓸어본다.)
양노아:(물끄러미 그를 바라본다. 소란한 낮도, 고요한 밤도 함께... ...) ...폐하께서는.
염려하는 것이 없으십니까.
연모하는 이가 손아귀 안에 이렇게 자리하거늘...
내 무엇을 염려하겠느냐?
양노아:(그러나 그의 손으로 쓴 것이 틀림없는 쪽지는 영 다른 말을 한다.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알면서도 왜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가.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나를 아직도 곁에 두고 있는지...)
...폐하의 근심이 깊어보여 그렇습니다.
염려는 네게 있었구나. (젖은 엄지 끝이 둥글게 볼을 쓴다.)
나는 이 눈동자가 좋다.
기어코 곧게 나를 보고, 때로는 흔들려도 도망가지 않는.
이 싱그러운 눈이 좋아.
헌데 무엇이 그리 두려울꼬.
양노아:(도망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럴 수 밖에. 내가 당신을 이 꼴로 만들었으니 이 궐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해야 한다. 두 눈을 잃고, 두 다리가 잘리고 혀가 끊어지더라도 이를 두고 도망하는 것보다야 마음이 편할 것이다.) ...저는 그저.
...폐하가 걱정됩니다.
은희나:(아이는 세상이 말하는 무게와 세상이 만들어낸 저울에 통 관심이 없는 법이다. 품에 안고 귀히 여기는 작은 완호지물을 어찌 모두가 바라는 천하에 빗대겠느냐고 누군가는 나무랄지도 모른다. 허나 순수하다 여길 만큼 한 길밖에 모르는 애정으로 시작된 것은 새빨갛게 뒤틀린 연정으로 굳어져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궐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한 사람만은 피흘리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보다 잔인한 일이더라도.) 그래.
이 궐 안에서 나의 빈 하나만큼은 오롯하게 나를 걱정하니 된 것 아니냐.
하루에도 수십 장씩 피로 쓴 상소가 올라온다.
살을 저미고 머리칼을 잘라 간청하는 이도 있었다.
(잔잔한 호숫가가 마치 피바다라도 된다는 듯 가라앉은 눈빛.)
그래도 내겐 지금 네가 있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따듯하니 김이 올라오는 나무 욕조에서 편백 나무의 향이 아스라이 올라옵니다.
약주를 가져오거라, 노아야.
양노아:... ... (무어라 입을 떼려다가 말문이 막힌다. 어질고 현명한 황제. 어쩌면 그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 지 안다. 상상에 불과한데도 피가 싸하게 식는 것만 같다. 왜 제게 친절하십니까. 왜 저를 사랑하시나요. 저를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기는 합니까. 매번 약주를 올릴 때마다 용서를 빌고 싶다. 두 손을 붙잡고 통곡하고만 싶다. 어느 길도 제대로 택하지 못하고 갈지자를 그리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비명소리가 잦아든 밤에는 이명이 울린다.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있지. 그 눈으로 대체 뭘 보고 있는거야. 간절함이 담긴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가, 차마 더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술상을 들라 이르겠습니다.
은희나:(호수 위로 비친 달을 헤아리듯 그의 눈동자 안에 맺힌 자신을 바라본다. 너는 그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을까. 나는 이 눈으로 무엇을 헤아리려 하는가. 눈은 마음을 비추는 창이라 했던가. 우리의 창에는 피로 된 성에가 끼어 있구나. 고개를 돌린 낯을 그저 바라본다.)
(성에가 낀 창 위로 마음 속의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적는다.)
뺨이 차다, 노아야.
오래 술을 즐기지는 않을 것이야. 처소를 덥혀두라 이르마.
(그의 언 뺨 위로 손가락을 굴린다.)
(너를 연모한다.그저 그것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양노아:(뺨을 쓰는 손길이 부드럽기만 하다. 누군가를 베거나 칼을 쥐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때마침 궁인이 술상을 들고 정자 아래에 당도하면, 느리게 일어서 겉옷을 걸치고 욕조를 벗어난다. 제 잘못을 깨달을 적마다 심장이 둔해지고 발 끝이 굳어 도저히 그를 마주할 수가 없다. 젖을 흘려넣은 약주를 황제에게 올리는 손이 잘게 떨린다.) ... ...드시지요, 폐하.
(떨리는 그의 손 위로 제 한 손을 겹쳐 쥔다.)
빈을 이리도 추위에 떨게 만드니, 참으로 어리석은 황제가 아니더냐.
(나머지 한 손으로 잔을 들어 느긋하게 들이킨다.)
(빈 잔을 천천히 내려놓는다.)
양노아:(떨리던 손이 멈추면 목소리마저 떨릴 것 같아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폐하. 당신이 무엇이었는지...부디 이 어리석은 빈을 용서치 마세요.)
...침소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잠시 고친다) ...준비되었으니 양자전에 드시지요.
은희나:...아니, 오늘은 의영전에서 보내고 싶구나.
함께 돌아가자.
양노아:(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부드러운 겉옷을 꺼내든다) 예, 함께 하겠습니다.
그래...
그 아래에 선 두 사람의 마음 속엔 무엇이 있을까요.
꿈 없이 깊이 잠들었던 밤이 멀지 않은데도,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저 멀리 수양버들과 함께 누군가의 인영이 다시 나타납니다.
양노아:(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게를 느끼며 눈을 뜬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둔하고 느리다.)
면류관을 쓰고 비단과 금실로 수놓인 의복을 입은 여인.
더 이상 면류관은 흘러내리지 않고, 의복도 그를 위한 것인 양 땅에 끌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양노아:(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선다. 여전히 어딘가, 먼 곳을 보고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 목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그는 대답합니다.
어느 것에도 흐려지지 않고 물들어있지 않았던 때의 음성입니다.
…어떠합니까?
황제:왜. 짐이 미덥지 못하더냐. (부드럽게 농을 건넨다.)
양노아:(단어만 듣자면 서늘한 말에도 슬쩍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눈 앞이 깜깜한 것보다야 선명한 것이 낫지요.
황제:(정면을 응시하던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꽃가지를 어루만지는 이의 눈빛으로.)
허면 선명하고 맑다 하자.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야 하니 말이야.
양노아:(맑고 푸른 눈동자. 내가 사랑했고, 기억하는 시선...)
...허나 가시덩굴이 발목을 붙잡는다면요?
황제:가시덩굴이 어디까지 올라오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발목에서 그치더냐?
황제:지독하게도 걸린 모양이구나.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정면을 본다.)
양노아: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신이 들고 나니 이미 제 힘으로는 무엇 하나 끊을 수 없는 모양이더이다.
황제:그만한 것이라면 산 사람의 심장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온 나라를 휘감을 테지.
그렇게 되기 전에 몸 바쳐 불태우는 것은 어떨까.
양노아:(입을 달싹인다.) ...저는 폐하께서 강건하셨으면 합니다.
덩굴을 잘라내고 선명한 길로 나아가셔야죠.
황제:두 번째로 보는 것인데도 이름을 모르겠어.
그저 날개가 부러진 새 같다.
양노아:(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날개가 있었음을 기억하는 자가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습니다.
양노아:날개가 없어도 두 다리가 있으니 어디든 갈 수 있지요.
방금 폐하께서 길을 봐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면류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양노아:...알지 못합니다. 무엇입니까? (얼굴을 가린 면류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황제:너 또한 알고 있듯이 가장 존엄한 예모이지. 허나...
겉은 검고 속은 붉다.
겉으로는 천하를 굽어살피는 밤처럼 군림하되 군림하지 않을 천명을 아로새기되...
안으로는 천하의 죗값을 자신의 피로 가득 치뤄, 만 백성의 피를 구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한다고 하셨다.
양노아:(잠자코 그 말을 듣는다. 천명을 받았으나 황제 또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나약한 육신. 미간이 좁아들었다가 입을 연다.) 황제란 그런 것입니까.
황제란...맞지 않는 용포 아래의 살을 저며 짐을 이는 것을 천명으로 알고 발바닥이 짓무르도록 길을 잃는 것을 기껍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날 때부터 황제인 자가 정해져있는 것은 아닐지온데.
부당하다고 여기느냐.
황제:그리 생각하는 자가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황제:불경하기도 하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쓸어본다.)
그것이 당신의 바람입니까?
황제:진정으로 꿈꾸는 것,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찾아 떠나버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이의 희생과 바람을 딛고 이 자리에 섰다.
내가 먹는 것, 입는 것, 누리는 것 모두...
양노아:(그런 것조차 상관 않는다 말한다면. 이 나라의 안위는 누군가 챙겨주겠지요. 나라를 생각하여 목 베이는 것을 두려워 않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가 이리도 많은데. 누군가 한 명은 그 짐을 지겠다 나서겠지요. 왜 그것이 당신이어야 하는지, 저로서는... ...)
... ... (그러나 차마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황제의 짐을 헤아려 본 적 없는 자나 할 수 있는 기만이고 못된 상상이다. 인간은 오직 어떤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내해야 할 짐이 있는 법이다. 세상이 어찌 모두 이치에 맞게 돌아가겠는가...)
...그래도 저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어하였는지...
황제:(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리던 손끝이 멈칫 굳는다.)
기어이 심중에 파장을 남기는구나...
양노아:소첩을 벌하세요. (나직하게 대답한다. 깨고나면 이런 말은 할 수 없겠지. 이것도 전부 몽중이라서...)
황제:...(뺨을 그러쥐던 손가락은 붓을 놓듯 움직여 턱끝을 쥔다. 점 언저리를 쓸어보다가 제게로 얼굴을 당겨 속삭인다.)
저잣거리의 어린아이도 웃을 만한 것이다. 진정 듣겠느냐.
양노아:다행히 이곳에는 듣고 웃을 자도 없지 않습니까.
황제:(잠시 머뭇거렸을까. 조그맣게 입을 연다.)
...양희나.
그 말 한마디가 울려퍼지자마자, 아득함이 느껴집니다.
양노아:(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몸을 무겁게 짓눌러 몽중에 남아있게 했던 힘이 빠진다. 귓가에 울리는 세 글자. 그것만이라도 쥐고 있으려 눈을 꾹 감는다. 기억해...)
여기저기서 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황제의 노기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지마다 까마귀가 앉아 웁니다.
노아조차 곡하는 소리에 도저히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어 의영전을 박차고 나와 소리의 근원을 찾자,
태창전 앞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들이 보입니다.
양노아:(태창전으로 걸음을 바삐 옮긴다. 이토록 많은 대신이 모인 것은...)
분명 평소와는 다른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입니다.
어림잡아 오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신하들이 각자 머리를 조아리며 그리 외치고 있습니다.
양노아:... ... ... (반란이 일어난다. 이렇게나 빠르게...)
일부는 감정이 격해졌는지 흐느끼기까지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듯 대신들은 마지막인 것처럼, 저마다 목을 걸고 외치고 있습니다.
"후궁 노아는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해악 같은 존재이옵니다!"
"폐하, 부디 소신들의 충정을 생각하시어 과거의 어진 성군으로 돌아와 주소서!"
양노아:(입을 꾹 짓씹었다가, 태창전 안으로 들어선다. 황제는...)
은희나:(용상 위에 고개를 괴고 앉아 있다.)
노아야. 이 자들이 나라를 말아먹은 네 죄가 깊으니 너를 유폐시키라는구나.
심지어는 네가 반역에 가담하고 있다는 말도 서슴치 않고.
양노아:... (잠시 황제를 바라본다. 분명 몽중에서도 보았던 얼굴인데.)
...그리 하십시오.
백무대관이 입 모아 외친다면 그리 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한낱 후궁이 황궁의 근심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뭐라.
양노아:제가 그리 청하지 않으면 가신들의 목을 베어내실 것이 아닙니까.
(용상 위에서 천천히 일어선다.)
(서늘하게 걸어내려와, 곁에 선 운검이 차고 있던 칼을 빼내어 든다.)
양노아:폐하! (눈썹을 한껏 치켜올린 채, 넓은 보폭으로 따라간다)
은희나:네 어떤 모진 수모를 당했기에, 어떤 음해를 당했기에 도리어 유폐를 청하겠느냐?
양노아:그렇지 않습니다. 부디 진노를 가라앉히고 생각하소서.
은희나:듣기 싫다! 짐을 정인조차 지키지 못하는 천치로 만들 셈이더냐!
(가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대신의 머리채를 거칠게 틀어쥐어 올린다.)
양노아:폐하! 진정 충신과 소첩을 모두 잃으실 작정이십니까!
한낱 후궁 때문에 검을 휘두르는 일이 소첩을 더더욱 궁지로 몰 뿐임을 어찌하여 모르십니까?
은희나:입이 찢어져도 간언은 바로 올려야지. (노기어린 목소리에 되려 낯은 차분해진다.)
내 언제 너를 온전히 가진 적이 있었느냐.
(아니, 창백해진다.)
한낱 후궁이라.
듣고 있소? 참의.
(바들바들 떠는 상투를 잡아 들어올린 채로 망설임없이 그것을 베어낸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아래로 산발을 한 채로 혼절할 듯 떠는 신하를 바라본다.)
은희나:짐의 하나뿐인 정인을 궁지로 몬 것이 당신인가.
혼절할 것처럼 온 몸을 심하게 떨어대는 참의에게서 차분히 시선을 돌린 황제는 다른 대신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립니다.
노아야, 말해보거라.
양노아:... ... (입을 꾹 다물고 황제를 바라본다.) 자르거든 소첩의 머리를 치십시오.
(표정없이 검을 들어 대신의 어깨를 깊게 벤다. 검신을 따라 붉게 튄 선혈이 궤적을 그리며 뺨과 의복을 적신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혼절한 신하의 고개를 따라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숨통을 끊지 않았거늘.
무엄하구나. 짐이 묻고 있지 않느냐?
양노아:(순간 검이 내려꽂히는 것에 크게 숨을 들이킨다.)
그 누구도 아닙니다, 폐하.
신하들의 비명소리가 울리지만,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다시 한 번 고개를 땅에 박습니다.
은희나:(피가 튄 창백한 얼굴이 그제야 노아를 본다.)
양노아:... ... ... (창백한 얼굴을 바라본다. 그늘이 드리운 표정에 새겨진 심정이 복잡하다. 안타까움, 죄책감, 자기 혐오...)
허면...
누구를 벌할까? (목소리 끝이 갈라진다.)
누구를 베어줄까.
(광기어린 푸른 눈동자 속에 길잃은 아이가 스친다.)
어찌 해야 너를 지킬 수 있지?
폐하께서 사람을 베지 않아도 저는 무사합니다.
그렇지 않아!
양노아:... (가라앉은 목소리가 중얼거리듯이 흘러나온다) ...제 탓입니다.
(피가 묻은 손으로 노아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온몸을 떤다.)
저 자들이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네 목 하나만을 노린다.
양노아:... ... (심장을 찌르는 고통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멈칫거리며 올라간 손이 천천히 네 등을 쓸어내린다.)
...그렇지 않습니다. (속삭이듯이 중얼거리지만 이 말이 닿지 않을 것을 안다.)
은희나:(그 손길과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몸은 점점 심하게 떨린다.)
(입술을 덜덜 떨고 짓씹으며 중얼인다.)
누군가는 네 목을 치려 할 것이고, 누군가는 네 사지를 자르려 할 것이며, 누군가는 네 눈을 뽑아 까마귀에게 던져주려 할 것이다. 아아, 아...
은희나:(잡은 소매를 막무가내로 당기며 올려다본다.)
안아다오. 안아다오...
양노아: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폐하.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누구도 제 목을 치지 않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대답하며 어린 아이를 품에 넣는다. 내 죄가 정인을 망쳤구나. 당신이 나를 용서한다 한들 무엇으로 속죄할까...)
은희나:(오래도록 굶은 아이처럼 그 품을 허겁지겁 찾는다. 뺨과 손에 묻은 죄의 흔적을 문질러 없애려는 것처럼 품을 파고들어 뺨을 부빈다. 떨림은 점점 심해진다.)
오직 너 뿐이다. 네가 내 세상이야. 내 모든 것이다. 내게서 앗아가려 하지 마.
피웅덩이 가운데에서 희나는 칼을 놓지 않은 채로 노아를 끌어안습니다.
그 모습은 어쩐지 폭군이라기보단, 당신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가련한 나무줄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양노아:... (무섭도록 선명하다. 무섭도록...)
(내가 붉은 핏길을 닦았구나.)
은희나:(그 품 안에 고개를 묻은 채로도 어떻게든 송곳니를 세우고 털을 부풀리는 다친 짐승처럼 비명을 지른다.)
내 모두 너희들의 목을 벤 다음 시체를 모아 까마귀에게 던져줄 것이야!
내게서 노아를 앗아가려는 자가 그 누구든! 누구든! 누구...
(심하게 떨며 악을 쓰던 목이 그대로 품 안에서 꺾인다.)
양노아:(목숨이 끊기기 직전의 짐승처럼 울부짖는 것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당기며 몸을 안은 손에 힘을 준다.)
...제가 있겠습니다...제가.
당신의 품 안에서 혼절한 짐승을 더 힘껏 끌어안습니다.
둥지인지 감옥인지 모를 품을, 오직 그만을 위해서.
급히 양자전으로 희나를 옮기고 어의가 들었다 했습니다.
여전히 품 안에는 광기어린, 그러나 애처로웠던 떨림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죠.
양노아:(황제의 상태를 전해듣고, 한참이나 서성이던 걸음을 그제서야 멈춘다.)
양노아:(태창전으로 향한다. 머리를 찧던 대신들은 이제 모두 물러갔는지...)
앞다퉈 머리를 찧고 울부짖던 대신들은 모두 물러간 듯 보입니다.
태창전은 제왕의 위용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 어느 전각보다 크고 웅장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양노아:... (그래, 정작 그 때는 몸이 굳어 머릿속이 새하얬는데...돌아보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하다.)
후궁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성대하게 치뤄졌던 혼례였습니다.
당신에게 내려졌던 이름은...비록 불린 지 오래 되었지만요.
양노아:
관찰력
기준치: |
80/40/16 |
굴림: |
93 |
판정결과: |
실패 |
(우)
양노아:
관찰력
기준치: |
80/40/16 |
굴림: |
6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황제께서 보시고 난 뒤 분노하여 구석에 팽개쳐둔 것을 내관이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구석에 처박힌 상소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양노아:... (아무렇게나 박힌 상소문을 읽는다. 염족에 관한 이야기.)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가 상소문을 내려다보는 낯이 어둡다. 염족의 기이함에 대해서는 철이 들 적부터 알았다. 그곳에서 한 발만 빠져 바라보아도 그들은 기묘한 일족이었으나...그와 동시에 은인이자 부모이기도 했다.)
(이 상소를 허하지도, 불허하지도, 상소를 올린 이의 목을 치겠다 말씀도 않고 이 구석에 박아둔 이유는.) ...폐하께서는 무얼 보고 계십니까... (조용히 중얼거리며 상소문을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둔다.)
노아, 당신은 부족 모두가 함께 키운 아이였죠.
철이 들 적부터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은인이자 부모라는 점에서 그런 기이함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명제를 앞서는 단 하나의 가치가 있었을까요.
양노아:(허나 후궁 하나가 무어라고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의 족적과 추억이 묻은 태창전을 한 번 바라보다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양자전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황제의 용태가 염려되어 멀리까지 나서지는 못한다.)
양자전으로 가려던 무거운 발걸음 끝에 무언가가 걸립니다.
양노아:
역사
기준치: |
45/22/9 |
굴림: |
90 |
판정결과: |
실패 |
(서적을 팔락팔락 넘겨보는 정도)
무언가 기록되어 있으나... 읽어 해석해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는 혹시 모르는 암살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희나에게 들은 적이 있었죠.
그러나 당신은 평소 황제가 지내는 건물을 알고 있습니다.
황제의 용태가 염려된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도요.
가장 안쪽에 놓인, 입구가 숨겨지듯 한 건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깥에는 난들이 우후죽순으로 심어져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은은한 난향이 코 끝에 스칩니다.
양노아:(이제는 익숙한 곳이다. 아는 자가 몇 없는 황제의 가장 내밀한 거처.)
양자전 내부로 들어서면 폭군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소박한 내부가 보입니다.
양노아:(황금으로 치장한 궁만 보던 자들이 이 거처를 보고도 그를 폭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침전 옆에 잠시 앉아 숨소리를 들어본다.)
제왕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해 어느 곳보다도 크고 웅장하던 태창전과는 달리,
이 소박한 공간은 그 어느 위세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평범하기만 합니다.
양노아:(잠시 혼절하였다 한들 중태는 아니다. 그것을 못내 다행으로 여기며 거처 주변을 정리한다.)
붉은 천에 황금 실로 용이 수놓아진 침구가 만져집니다.
양노아:
관찰력
기준치: |
80/40/16 |
굴림: |
4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양노아:... (단도. 그것을 발견하자 잠시 숨을 들이켰다가 살펴본다. 호신용으로 두셨는가.)
양노아:(피가 묻어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누구의 피지?)
양노아:(단도를 다시 밀어 넣어두고, 책장을 살펴본다.)
황제가 자주 읽는 서적들과 문서들을 보관해두는 개인 책장입니다.
책장에는 고서부터 논어 같은 기본적인 책들까지 다양하게 놓여져 있습니다.
새벽까지 황제와 함께 침전에 누워, 서로 속살대며 읽어주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양노아:
자료조사
기준치: |
70/35/14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책들 사이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쪽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양노아:...? (이질적으로 튀어나온 쪽지를 빼내 열어본다.)
교육 판정의 결과에 따라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양노아:
교육
기준치: |
60/30/12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노랫말의 일부가 아닌가. (중얼거리며 쪽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런 것을 왜 여기에 끼워두셨지. 하고 물끄러미 책장과 황제를 번갈아본다.)
황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작은 숨을 흘리고 있습니다.
궐 안을 감도는 붉은 학의 기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노아:(연회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좌시할 수 없다. 황제의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걷고,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히 나선다.)
양노아:(귓전에 이름이 들리면 잠시 멈칫한다.)
양노아:(다시 침상 맡에 앉아 조용히 속삭인다.) 예, 폐하.
여기에 있습니다.
은희나:(그제야 끙끙대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
곧 다시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웁니다.
양노아:... ...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으로 가만히 황제를 내려다보다가, 숨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변하면 양자전을 나선다.0
연회의 밤을 향해 하늘은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수십의 기생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비단옷을 입고 나비처럼 춤을 추고, 붉은 꽃 같은 천을 두른 채 두 팔을 하늘거립니다.
가신 하나 없이 오로지 사치와 쾌락으로만 채워진 연회장은 희나와 당신만을 위한 것입니다.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어둔 밤에 물결을 타듯 울려퍼집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노아는 희나의 잔에 젖을 타야 합니다.
은희나:(고개를 괸 채로 차려진 산해진미를 가만히 보고 있다.)
입에 맞지 않느냐?
통 들지를 않는구나.
양노아:...아닙니다. 식사를 조금 배부르게 한지라.
(이 때만 찾아오면 영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산해진미도 좋은 술도 입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시 기생들의 춤을 바라보다가) 드시지요, 폐하.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내 배가 부를 것 같은데. (육전 하나를 집어 입가에 대 준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양노아:(입가에 대어진 육전을 겨우 받아먹는다.) 오늘 폐하께서 혼절하셨을 때에 놀란 것이 아직 남아있는지도 모르죠.
옥체는 어떠십니까?
은희나:(볼이 움직이는 것을 고집스레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그리 쉽게 상해서야 되겠느냐.
이 피는 무겁거늘.
(담담히 중얼이며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몸짓들이 곱구나.
꽃밭이 멀리 있지 않아. (여상하게 기생들을 바라본다.)
양노아:(화려하게 흩날리는 천, 아름다운 몸짓... ...) 허나 여전히 향기 없는 꽃이라 여기고 계시지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더냐.
양노아: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이든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텐데도.
특히나 궐 안에서는 더.
양노아:... ...허나 누군가는 기억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아픈 것이라도요.
무엇을 그리 짊어지려 해.
내 네게 그런 것을 바랐느냐.
꿀과 금 아래에서 행복히 웃기만을 바랐는데.
양노아:사람이 한 걸음을 내딛을 때조차도 수 많은 생각을 하는데, 어찌 꽃처럼 아름답게만 피어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기에 사람이 아름답다 여겨지는 것이지요. 소첩은 원체 생각이 많아 이것이 흠입니다.
은희나:(그는 늘 그런 사람이다. 걸음 하나와 말씨 하나에도 어떤 씨앗을 심어 틔워낼지 고민하는 사람. 나비의 날갯짓같은 손짓 하나를 하면서도 모든 가능성을 생각하고 주변을 헤아리고자 하는 사람. 꽃가지를 어루만지는 제 손 끝에 벌이 날아들지는 않을까 염려하던 다정한 녹색 눈동자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
내 몸 위로 어느 꽃을 심더라도 네 향기에 비할 바는 못될 것이야. (그렇기에 사랑스럽다. 딱 그만큼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
생각이 많은 나의 빈.
허면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어느새 얼굴은 가까워져 있다.)
양노아:(눈 앞에 가득 찬 창백한 얼굴과 푸른 시선을 마주한다.) 그저 이 궁이 평안해지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황궁에 꽃이 피고 춘풍이 들면 온 대륙이 절정을 맞이하기 마련이니까요.
양노아:어찌 폐하에 견주겠습니까.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빈의 망상일 따름이지요. (슬며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이리도 농담을 모르고 재미없는 빈을 곁에 두어 심심하시겠습니다.
(미소가 묻은 입가를 꼼꼼히 눈으로 훑는다.)
온종일 네 생각 뿐이라 심심한지도 모르겠어.
(눈으로 훑은 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진다.)
허면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할까.
폐하께서 환히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몽중에 태자를 만나보았는데, 의젓하더군요.
...나조차 기억나지 않는 때를?
무어라 하더냐.
양노아:이 나라를 위해 기꺼이 짐을 짊어지겠다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도 궁 한 켠의 그네를 뛰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묻는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럽게 가라앉는다.)
없었다.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은희나:혹여 어딘가 부러지거나 상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으니까.
서책을 읽으며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는 했었지.
너는 어땠느냐.
양노아:...저는, (잠시 시선을 내리면 금실이 화려하게 수놓인 연회복이 눈에 들어온다.)
...손과 얼굴에 흙이 묻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몸이 작고 재빨라 사람들 틈바구니로 숨어드는 것이 특기였죠.
행상인이 마을에 오거나 궁에서 행차가 지나가는 날이면 남의 집 지붕에 매달려 거리를 구경하기 일쑤였습니다.
(과거를 그리는 시선이 아득한 허공으로 던져진다. 저 먼 밤하늘, 궁이나 대륙보다 더 멀리. 시간조차 넘는 듯한 모습이다.) 무역항이나 이야기꾼들이 오는 저잣거리도 아름답다 하나, 사연국에는 낮은 산과 들판이 많다는 것을 아십니까.
염소를 치다가 지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태양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주 귀중합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새와 짐승들이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들리죠.
은희나:...(부드럽게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을 듣는다. 그의 음성을 따라 어린날의 그를 그린다. 손과 얼굴에 흙을 묻힌 아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숨어 벽과 지붕을 오른다. 크고 동그란 녹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아이는 세상을 베어물어 삼켜본다. 달았을까. 혹은 쓰기만 했을까. 추억 속 그 때의 너조차도 나의 온 신경을 이렇게 앗아가는구나. 들판 가운데에 선 아이를 그린다. 어쩌면 너는 그 곳에서 가장 행복했는가.)
...더 이야기해다오.
내가 모르던 것들 투성이구나.
양노아:황금보다 더 노랗게 물든 논밭이나, 여름이면 잎사귀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는 과수원 같은 것들이지요.
(잠시 시선이 가깝게 돌아온다. 저 먼 과거에서 대륙으로, 황궁으로, 마침내 황제에게 가 닿는다.)
언젠가 그 광경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하니.
은희나:(얼음으로 된 바다, 불로 이루어진 대지, 바람을 따라 들풀이 춤을 추는 초원. 상궁의 도움으로 수업이 끝난 후 잠시나마 읽을 수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책을 넘기듯 가볼 수 없을 그 곳에 있었던 정인의 이야기를 듣는 눈동자는 몹시도 평화롭다. 환상이 깨어질까 두렵다면, 영원히 그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된다. 꿈이 깨질까 두렵다면 꾸지 않으면 된다. 그러한 생각의 한가운데에 기어코 깊은 파장을 만드는 한 문장에 입술을 세게 깨문다.)
(무어라 말할 듯 입을 열었다가 그저 입술만 달싹인다.)
양노아:...노랫가락도 담을 타 넘는데, 사람이라고 못할 것 있겠습니까.
은희나:...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양노아:(다시 시선이 너머로 던져진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깝게, 딱 담을 넘을 정도로만...) ...압니다. 조금은.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것.
내가 무엇을 원할 것 같으냐.
...그저 손을 내밀 뿐이죠.
바로 그 점이 어리석다는 거야.
그의 눈동자에 서린 이채를 엿본 것 같은 느낌.
그 순간 기생 중 하나가 연회장을 뛰쳐나와, 희나와 노아가 있는 곳으로 올라섭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노아는 기생의 손에 들린 작은 단도를 발견합니다.
기생은 순간 박차고 올라서 희나를 향해 돌진합니다.
양노아:
민첩
기준치: |
60/30/12 |
굴림: |
82 |
판정결과: |
실패 |
당신이 기생을 밀치는 것으로 가까스로 치명상은 피했습니다만,
가족을 죽였다는, 지옥이 있다면 그곳에서 황제의 사지가 찢어질 거라는 기생의 절규가 울려 퍼집니다.
양노아:폐하! (비단옷 위로 배어나오는 피를 눌러 막는다. 기생의 절규도, 주변의 술렁임과 비명도 모두 먹먹하게만 느껴진다.)
궁의! 궁의를 부르시오!
절규와 같이 외치자, 혼비백산해있던 운검들은 서둘러 궁의를 부릅니다.
방금 그런 상황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희나는 되려 침착하고 평온합니다.
어쩐지 희나에게는 애초부터 칼을 피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양노아:... ... (기생을 밀칠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폐하.
얼굴이 창백하다, 노아야.
양노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정신을 놓으시면 안됩니다. 곧 궁의가 올 것입니다.
은희나:소란피울 것...없다. 목이 잘린 것도 아닌 것을...
양노아:(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오늘은 기생이 단도를, 내일은 무관들이 장검을, 모레는 백성들이 장창을 들 것이다. 이건 그냥 시작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일...)
...왜... ...
어찌 그리... ... (옷 사이로 배인 피를, 상처를 누르는 옷깃에도 피가 번진다.)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조금씩 눈가가 저물어간다.)
(떨리는 손을 뻗어 잔을 한 번 쥐었다가 놓는다.)
괜찮다.
괜찮아.
양노아:출혈이 심합니다, 폐하.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
그러니...
그런 표정은 하지 말거라.
양노아:...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죽지 않습니다. 저보다는 폐하를... ...
순간 당신과 희나가 있던 곳으로 뛰어오른 기생, 그가 휘두른 단도, 조금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던 희나…….
오늘은 단도를. 내일은 장검을, 모레는 장창을.
이 모든 날이 궐 안에 들어앉은 주인의 피를 기다립니다.
당신 또한 그 반역에 동조한 것이 되겠죠...
운검들의 손에 맡겨진 황제는 다급히 궁의와 함께 양자전으로 옮겨집니다.
운검들의 검은 무복 사이로 붉은 옷깃이 흔들리는 것이 보입니다.
그 옷깃 끝에 툭 늘어져 옮겨지는 흰 팔도요.
양자전으로 들었다는 황제의 소식을 들었으나, 그의 부름이 있기 전에는 걸음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의 배후에 노아가 있다고 의심하는 대신들이 손을 써 뒀기 때문이겠죠.
겨우 의영전으로 돌아온 당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머리맡에는 작은 쪽지가 놓여있습니다.
양노아:(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뜨자마자 놓인 쪽지를 확인한다.)
... ...
(염족의 전언이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자리를 나선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접선 장소로 향하는 동안,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 했습니다.
궁궐의 뒤편으로 향하자, 그곳에서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염족의 전달자가 당신에게 급하게 다가옵니다.
(불안하게 온몸을 떨며 제 머리카락을 쥔다.)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막무가내로 젖이 든 꾸러미를 품에 쥐어준다.)
양노아:... (눈가를 좁히며 꾸러미를 받아든다.) ...그래서 어찌하란 말입니까?
전달자:어찌하라니? 어찌하라니요! (길길이 날뛴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입니다. 황제에게 젖을 먹여 반역을 꾀하는 무리들을 오늘 밤 모두 처형하라 이르세요!
(품 속에서 다급하게 서책 한 권을 꺼낸다.)
반역을 도모하는 자들이 뜻을 모아 제 이름을 적어 나눈 것입니다.
한시가 급해 안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황제에게 젖을 먹인 뒤 이것을...이것만 주기만 하면!
양노아:(서책을 받아든다. 아, 그래. 이들은 나를 빌미로 이 나라를 곪게 하려 하는구나.
...알겠습니다. 진정하고 돌아가보세요.
(불안한 듯 숨을 몰아쉬다가, 순식간에 기이하리만큼 차가운 눈을 하고 바라본다.)
...이전의 전언을 전하긴 한 겁니까?
혹 사사로운 정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면 접어야 할 겁니다.
반역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물론 염족의 모든 이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당신을 먹이고 기른 자들을 저버릴 셈은 아니겠죠?
양노아:(나의 부모와도 같은 자들. 그러나 모든 자식은 부모를 잡아먹고 자란다지 않나. 전달자를 향하는 시선은 전에 없이 무감하다.) 염족에게 전하도록 하세요.
만주로 도망치라고.
양노아:이미 수 백명이 죽었습니다. 당신들의 농간에, 내가... ... (그 말을 하는 것조차 고통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다.)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정입니다. 당신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혜고...
...이런 호리병이 아니라, 나를 죽일 검을 들고 오셨어야 했소.
전달자:이...이! 이! 배은망덕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부들부들 떤다.)
이제와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온 죄가 사해지기라도 할 것 같아!
황제를 먼저 기만한 건 당신이야!
양노아:당신들이 키운 머저리 천치가 어떤 죄까지 지을 수 있는지도 아셨어야지요.
...내일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요. 제 목이 효수되거든 그 앞에서 나를 실컷 비웃으시오.
(호리병과 서책을 꾹 쥔 채 몸을 돌려 양자전으로 향한다.)
걸음 하나에 몇 개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인가.
전달자는 당신을 붙잡지 못하고 등 뒤에서 온갖 저주가 담긴 말을 중얼입니다.
언젠가의 몽중에서 들었던 말이 귓가를 스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몸 바쳐 불태우는 것은 어떨까.
양노아:(황제보다 빨라야 한다. 반란군보다도.)
당신에게 허락되었던 깊숙한 곳으로 들어섭니다.
다급히 들어서자마자, 침전 위에 앉은 당신의 황제가 보입니다.
양노아:(황제를 보자마자 큰 숨을 들이킨다.) -...폐하.
희나는 죽은 이처럼 가만히 앉아있다가, 노아가 도착하자 조용히 눈을 뜹니다.
은희나:부르지 않았는데 걸음하는 일도 다 있구나.
양노아:(막상 도착하고나니 막막하다. 어디부터 말해야 하지. 대체 어디서부터... ...)
(천천히 황제의 침전 앞에 무릎을 꿇는다.) ...폐하.
(손을 뻗어 습관처럼 그의 뺨을 어루만진다.)
노아야.
양노아:... ...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나의 짐작으로는. 정말 나의 짐작이 맞다면. 그의 앞에 호리병 꾸러미를 풀어놓는다.
...알고 계셨지요.
양노아:(눈을 꾹 감는다. 당신은 이런 때 마저도.)
...아뇨. 드리지 않을 겁니다.
다시는... ...폐하께 약주를 올리는 일이 없을 겁니다.
허나 어째서.
...다 아셨으면서도 제 목을 치지 않으셨습니까.
은희나:(초승달처럼 휘어지던 입꼬리가 굳은 것이 못내 아픈 것처럼 입가를 매만진다.)
(대신 그 미소를 어설프게 흉내내보듯 입꼬리를 올린다.)
(너무도 오랜만에 부르는 그 이름을 담기 위해 작게 숨을 들이킨다.)
녹빈.
양노아:... ...예, 폐하. (따라 웃는 것조차 힘이 든다. 점점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진다.)
은희나:(연못 위에 작은 얼굴을 내밀어 비추는 제 표정을 따라 해 보듯 굴던 아이처럼, 그를 달래듯 어루만진다.)
연모하여서.
양노아:... ... (그 말에 속에서부터 왈칵 눈물이 비집고 나오는 것만 같다. 연정. 그것이 다 뭐란 말인가. 처음부터 그랬다면 이런 것 없이도... ...)
허면,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 ...허면...이 녹빈을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폐하를 농락하고, 태자가 사랑해 마지않던 이 나라를 깨부수던 자를 용서하시겠습니까.
은희나:(그래. 연정, 그것이 무엇이길래 이리도 먼 길을 왔는가. 잠든 네 얼굴을 어루만지며 묻고 싶어도 묻지 못하던 날들이 숱하고도 깊었다.
그것은 독주였다. 잔을 마신 후는 날로 베어낸 듯 조각조각 기억이 찢겨 있었다. 밤이 되어 기억이 돌아오고 나면 내 손으로 베어 없앤 백성의 피가 머리맡에 흥건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죄 없는 백성들의 피가 욕간통에 피거품을 만들어 냈다.
아니, 하지만 네가 내게 내렸다면 그것은 약주였다. 천지 아래에 오직 하나 사랑하고픈 이와의 뒤틀린 무릉도원을 살아가는 날들은 찬란하게 뒤틀려 있었다. 내일이 되면 나는 저 대신을 죽일까. 그 다음날이 되면 그 아비를 죽일까. 그럼에도 진정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어쩌면 황제라는 이 자리만으로, 되려 내가 너의 잔에 무언가를 타고 있던 것과 다름없지 않느냐고.)
... ...
못난 황제의 바람을 들어준다면.
양노아:...들어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들어드리겠습니다. (제 얼굴에 얹어진 손을 붙잡고 토하듯이 내뱉는다. 이것으로 죄가 사해질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울 수 있다면...)
은희나:...(손 안에 날아든 작은 새를 보듬듯, 고개를 숙여 이마 위로 입을 맞춘다.)
(천천히 입술을 물리고, 담담하고 부드러운 낯으로 속삭인다.)
너는 반군이 들이닥칠 시간을 알고 있겠지.
양노아:... ...무슨 말씀을 하시려 합니까.
양노아:(서책을 꾹 쥔다. 아마도, 그렇겠지.)
은희나:...그리고 그 이름이, 나 다음으로 그들이 베어 낼 이름이다. (입술을 꽉 깨문다.)
그 청만은 못 들어드립니다.
은희나:반역에 가담하겠다는 너의 말을 그들이 어디까지 믿었을 것 같으냐.
양노아:(그렇겠지. 안일했다. 고작 하루 치의 목숨을 늘리는 수 밖에 더 되나.)
은희나:(그의 어깨를 꽉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한다.)
양노아:(크게 뜬 두 눈이 황제의 안색을 살핀다. 곧다. 아주 또렷한 정신으로 하는 말이다.) ... ...
몽중에...
...폐하를 만나뵈었는데...
무엇이 되고 싶냐 여쭸습니다.
(천천히 눈을 내리감는다. 그 대답은 아마도 내가 원했기에 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대답은...)
...솔중루 뒤편에 황궁 너머로 향하는 담이 있습니다.
양노아:폐하. (이번에는 이쪽이 황제의 어깨를 끌어당긴다.)
무엇이 되고 싶다 하더냐.
양노아:(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잠시 고민하고...천천히 답한다.) ...양희나.
이미 이뤄졌구나.
네 지금 그렇게 불러주었으니...
그것으로 되었어.
(천천히 이마를 맞댄다.)
양노아:...저는 폐하와 너른 들판을, 낮은 산과 항구를 보고 싶습니다.
양노아:이기적이고 어리석다 하셔도 좋습니다. 허나 저는...
...폐하를 이대로 둘 수 없습니다.
내가 해친 이들이 나의 어깨 위에 올라 서 있다.
나의 피는 꼭 그만큼 더 무거워 있어.
담은 무너질 것이다.
올라설 필요 없이 밟고 넘어가면 되지 않습니까.
저는, (황제의 두 손을 감싸쥔다.) 폐하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정의로운 자도, 현명한 자도 아닙니다.
그저 제 목숨 하나 붙이려 이리저리 도망치는 자에 불과하죠.
...누군가는 이를 두고 비겁자라 기록할 겁니다.
허나 저는 역사보다도 당장이 두렵습니다.
양노아:그러니 저는 또 도망칠겁니다, 폐하. ...저 멀리. 아무도 저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은희나:(그의 손 안에 들어찬 제 두 손을 본다.)
네가 황금같은 논밭과 햇빛이 열리는 과수원을 보며 살았으면 한다.
가만히 물가를 바라보며 시 두어 편을 짓는 사내로 살기를 바라.
노아야.
나는 황제다.
그럴 수 없음을 알며 왜 고집을 부리느냐. (목소리 끝이 안타까움에 잠긴다.)
양노아:(안다. 알고 있다. 그가 진정으로 내릴 답은 이렇다는 것을. 어째서 당신이 몽중에도 면류관을 쓰고 있었는지. 어째서 당신이 이름을 불러달라 하지 않는지...)
저는, (목소리가 잠겨들어간다.) ...저는 폐하를 해할 수 없습니다.
양노아:...어찌하면 좋습니까. 제가... ...
양노아: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잠시 숨을 삼킨다.) ...같이 떠나고 싶습니다.
은희나:(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든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그를 본다.)
무어라 하였느냐.
양노아:...정인을 망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서 홀로 살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이 때에 정인이라는 말을 해...
양노아:항상 저를 그리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연모하는 이를 그리 부르는 것이 이상한가.
네겐 선택권이 없었다.
양노아:제가 선택해서 황궁에 온 것인데 어찌 그리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은희나:... ...(잠시 입술을 달싹인다.)
그런 네게 이런 세상을 준 것은 결국 나인데도...
...노아야.
(무언가를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처럼 잠시 말이 없다.)
정녕 함께 떠나고 싶으냐.
양노아:(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대답한다) 함께라면 어디든 가지요.
(손끝이 잘게 떨린다.)
나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게 언제든.
양노아:저 또한 그리 될 것입니다. ...죄가 세지도 못할 정도로 크지 않습니까.
너는 나의 빈이니.
(뺨을 쓸어주는 손끝이 점점 더 떨린다.)
... ...
채비를 하마.
솔종루에 먼저 가 기다리고 있거라.
양노아:(떨리는 손을 힘을 주어 붙잡는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폐하.
(눈을 꾹 감았다가 뜬다. 그 누가 나를 용서할까.)
(네가 아니라면...)
곧 가마.
당신은 정의로운 자도 현명한 자도 아닐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비겁자라 기록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역사 속에 남을 몇 줄보다 살아갈 숨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양노아:(솔종루의 고즈넉한 풍경을 눈에 담는다. 폭풍전야란 이리도 고요한가.)
솔종루에 도착해 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렇다 할 궁인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곧 동이 틀 터인데.
양노아:... (폐하께서 오지 않으신다.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그런 생각에 망설이던 발걸음이 양자전으로 향한다.)
망설이던 발걸음이 양자전으로 향하려던 찰나, 그제야 솔종루의 문 밖에서 희나가 걸어들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양노아:-폐하. (황제가 눈에 들어오자 눈에 띄게 안도한 기색으로 맞이한다)
은희나:너를 불안하게 했구나. (다가와 가까이 선다.)
솔종루는 넓다. 뒷편까지는 어서 걸어야 할 것이야.
마지막으로 궐 안의 산책이나 하자꾸나.
양노아:둘러보고 싶으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손을 가볍게 감싸고 묻는다)
은희나:그저 솔종루 안의 익숙한 풍경이라면 되었다.
헌데, 담을 넘을 줄도 아느냐.
양노아:어릴 적에는 자주 넘었지요. 이 황궁으로 오기 전까지도.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은희나:궐 안에서 몸이 근질거려 혼이 난 것은 아니냐?
양노아:무거운 옷을 입고서 그럴수야 없지요. 참는 것은 익숙해졌습니다. (생소한 질문에 웃는다)
은희나:가벼운 옷을 입은 네 모습도 궁금하구나.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니, 이미 보았던가.
양노아:...그런 것도 가벼운 옷이라 치십니까. (머쓱하게 웃는다)
비단으로 만든 것은 다 무겁지요.
은희나:그래. 만들어지기까지의 노고도 더하여서.
무엇부터 하고 싶으냐?
양노아:글쎄요. 우선 무명 옷을 입고, 마음껏 달리겠습니다.
또 무엇을 먹고 싶으냐?
양노아:길거리에서 아침마다 파는 흰 죽으로 배를 채우겠지요.
(골똘)
양노아:속 든 것 없이 크기만 큰 과자도 있고요.
속에 든 것도 없이 크기만 크다니?
참으로 상도덕이 없는 것 아닌가?
양노아:한 봉지에 1전 뿐이 하지 않으니 아이들에게는 좋은 간식거리죠.
(가격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수긍한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것이냐?
양노아:(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작게 웃다가) 예, 좋아했습니다. 어쩌다 심부름값이 남으면 사 먹곤 했으니까요.
은희나:조금 분하구나. 고 어린 모습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
양노아:어찌하겠습니까. 저 또한 폐하께서 궁에서 공놀이 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하였는데.
...몇 번 안 했다.
(웃는 소리를 내더니) 즐거우셨습니까.
... 뭐.
조금은.
흙먼지에 나쁜 병이 들 수도 있다고 혼이 났지만.
재미있었던 것...같다.
양노아:(슬며시 입꼬리를 올린다) 나가면 그것도 하지요.
양노아:폐하께서 즐거워하시는 것이 보고싶을 뿐입니다.
양노아:그보다 더 즐거운 것이 많을 것입니다.
궁 안에 있으면 많은 것을 보는 동시에 많은 것을 보지 못하니...
조금은 시야가 좁아지는 것도 좋거든요.
노아야.
한 번만 더.
그 이름으로 불러다오.
양노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주본다.) ...희나.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허공을 맴돈다.) 양희나.
...나가면 많이 부를텐데. 꼭 못 듣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은희나:(그 세 글자를 얼마나 꿈꿔왔던가. 달고도 깊은 그 말에 발끝부터 두 뺨까지 피가 돈다. 거대한 감정 앞에 항복이라도 하듯 눈을 휘어 미소짓는다.)
연모에 빠진 이는 이치라곤 모른단다.
양노아:(그 말이 이리도 기꺼울 수가 없다. 연모. 연모한다니. 절로 웃음이 차오르는 기분이라, 정말 이상한 표정이 되기 전에 양 손으로 볼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천천히 물린다.) ...예, 그런 법인가 봅니다.
은희나:(그에게 뺨을 맡기고 지긋 눈을 감는다. 입을 맞추었다 물린 자리에는 잔잔한 미소 한 조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지금 자신은 온전히 그의 여인일 뿐이다. 그의 손짓과 입술 한 번에 나비가 날아든 듯 봄을 맞는 모란일 뿐이야. 무엇이 되고 싶냐 물었던 너는 결국 그를 이뤄 주는구나.)
체통도 모르고 저 앞까지 달려 볼까.
이끌어 다오.
양노아:옥체를 올려드리겠습니다. (담 앞에 이르면, 올라타라는 듯 팔을 내민다)
은희나:(가만히 보다가 팔 위로 올라타 담 위에 올라선다.)
양노아:(희나가 담 위에 올라선 것을 보면, 이쪽도 훌쩍 담 위로 올라서서 다시 팔을 내민다) 가실까요.
...
예쁘다.
새는 이런 풍경을 보고 사는 것이겠지.
은희나:이제 보니 빈이 아니라 아첨꾼 한 명이 들어앉았어. (농조로 중얼거린다.)
양노아:이제 빈도 아니니 아첨꾼으로 살아볼까요. (작게 웃으며 희나의 허리를 감아 안고 담 아래로 훌쩍 내려온다)
(낯선 땅을 디디고 선다. 멈춘 채로 몇 번 걸음을 딛어 본다.)
...
이리도 쉬운 것이었구나.
이리도 쉽게 이뤄지는 거였어.
양노아:얇은 담 한 장 뿐인데 이리도 다르지 않습니까.
담을 따라 숲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좋겠어.
양노아:...그리 하시지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희나의 손을 굳게 잡고 조금씩 걸음을 빨리한다)
숲길을 따라 그들은 조금씩 걸음을 빨리 합니다.
희나는 믿을만한 이에게 부탁해 숲 깊은 곳에 말을 매어두었다 합니다. 그 장소는 희나가 알고 있겠지요.
수풀 사이에 자란 가시나무가 살을 찌르고, 의복을 할큅니다.
숲 안은 험합니다. 마음 먹고 몸을 낮춰 숨는다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아요.
어쩌면 이것은 그간 지은 죄와 업보가 뭉쳐져 앞길을 막아내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희나를 이끌고 숲 속으로 한참이나 급하게 걸어들어가던 중.
꼭 어딘가를 찾기라도 하듯 헤매던 걸음이 길을 찾은 것처럼.
당신은 급히 걸어가던 중, 손에 힘을 빼고 멈춰 선 희나의 손을 놓칩니다.
아직 돌아보지 않은 등 뒤에서 곧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너의 황제이자 정인이라고 하였지.
양노아:(갑직스레 손이 빠지면, 우뚝 멈춰섰다가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보려던 몸이 정지한다.)
... ...예.
무엇을 묻고 싶으십니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가거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장!
양노아:... ...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부터 먹먹하게. 그 기척을 인지하자마자 뒤를 돌아 희나를 붙잡는다.)
... (도망칠 방법이 없다.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한들 말보다 빠를 수 없다. 시기가 일렀다.) ...당신은 더 이상 황제가 아닙니다.
저 또한, 당신의 빈이 아닙니다. 더 이상은.
(어깨를 잡은 두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죽는다. 삶의 제 1 목표로 삼았던 것이 뿌리부터 흔들린다.) ...제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은희나:(다가오는 것들을 인지하고 있었다. 숲 속 사이에서 소리를 잠재운 죽음의 소리. 핏기 없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죽기 전의 발악을 하듯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살려야 하는 자는 명백했다. 죽어야 하는 자 또한 명백했다. 그런 자신의 명제를 모조리 부수는 이 방자한 빈을, 아니. 방자한 정인을 어찌 하나. 자신이 추하게도, 돌아서 자신을 감싼 그의 품이 너무도 따스하다.)
(그로써 절절히 깨닫고 만다. 그렇게 숱한 죄를 짓고도 내 심장은 이렇게도 박동한다. 고작 삶 하나로 죗값을 치룰 것이냐고 조롱하기라도 하듯.)
...(황제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내 손에 죽은 이들 앞에 이리 알량한 질문을 던져도 좋은 것인가. 살아도 좋은가. 그리 해도 좋은가. 아,무엇이 중요한가. 죽음을 예감한 그의 손이 떨린다. 그의 품 안에서 주먹을 꽉 쥔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는다. 그를 부둥켜안은 채로 수풀 속으로 몸을 날려 눕는다.)
소름끼칠만큼 빠르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양노아:
민첩
기준치: |
60/30/12 |
굴림: |
1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하늘은 천벌을 내리긴 커녕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은희나:(숨을 몰아쉬며 몸을 떤다. 면류관도, 붉은 의복도 걸치지 않은 한 여인이 죄를 짊어진 생의 끄트머리에서 몸을 떤다.)
양노아:(흐억, 화살을 피하자 막혔던 숨이 단번에 폐부로 들어오며 숨통을 트게 한다. 소중한 것을 쥐고 놓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희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는다. 이곳에서 죽더라도. 그래. 생을 버리더라도. 연심 앞에 이치가 무너진다 하지 않았던가.)
은희나:...방자한 것. (입술을 까득 깨문다. 분에 찬 듯한, 허나 어딘가 탁 트여버린 것 같은 얼굴로.)
풀어라.
함께 달려야 한다!
양노아:(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모양으로 상대를 바라보다가, 미끄러지는 발을 세워 다시 손을 붙잡는다. 내달린다. 거친 가시가 살을 가르는 숲 속으로.)
은희나:(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다. 자상을 입은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오든, 가시에 찔린 살이 쑤셔오든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손을 굳게 잡고 달린다.)
누군가는 희나를, 그리고 노아를 삶이 다 하는 날까지 원망할 것입니다.
허나 그 죄가 피 한 병으로, 살 한 자루로는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라면요?
이제와 그런 위선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마지막에서야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는 악인들도 부지기수로 있는 법 아닙니까.
당신과 희나는 더 이상 첩과 제왕이 아닙니다.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야겠죠.
숨이 차게 달려 말에 올라, 모를 길을 달려나갑니다.
둘은 어쩌면 행복할 겁니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