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라스호가 별들의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 3우주 탐사를 위해 새롭게 고안된 초대형 우주선인 아틀라스호는
인공중력생성기나 포탈 기능을 비롯하여 다양한 시설과 기능이 탐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제 3우주 이동 간 교역항로, 화물항로, 탐사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나아가는 중입니다.
제 3우주가 이제는, 탐사해야 하는 개척지가 아니게 되었다는 증거죠.
새로운 임무를 위해 탑승한 라티나 역시 아틀라스호의 엔지니어이자 테라피 시설 관리자로써 제 몫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제 3우주의 포탈 이동 함수와 좌표를 특정짓기 위해 승조원들은 냉동 수면에서 깨어난 뒤 약 1주일간 각자의 임무에 매진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이면 모든 목적을 달성하고 지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오늘. 잠시 오침을 취하던 라티나는 오랜만에 누군가의 꿈을 꾸고 잠에서 깹니다.
당신이 나를 구해줄 날이 올 거에요. 반드시.
라티나:(가슴께에 아직도 어렴풋이 남은 아릿함.)
당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나를 잊지 말아요.
라티나:(마음 속의 노트에 또렷하게 적힌 문장.)
비 온 뒤 안개처럼 어슴푸레한 세상에 조용히 되감기는 목소리는 오래 전의 경험을 반추합니다.
자신을 시간여행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상하면서도 마음 아린 사건을 겪은 후 한참이 흘렀습니다.
오래 전에는 우주선에 탑승하려면 지구에서 사용하던 금속제 제품들은 모두 금지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라티나의 회중시계는 오랜 항해에도 멀쩡하게 지구 표준시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라티나:(머리를 쓸어올리며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그 애의 꿈을 꾸고 난 뒤에 또 다른 습관처럼 확인했던 시계를 어루만진다.)
앞으로 일주일인가...
슬슬 회중시계의 태엽이 다 돌아갔으려나요? 몇 번 정도 더 감아주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라티나:(손가락이 태엽 위를 느리게 쓸다가, 감기 시작한다.)
(기묘하게 새 것 같은 모습이다. )
세월이 지나도 이것만큼은 녹슬지 않는 것이 참 기묘합니다.
잠깐 의식을 잃었다고 판단될 정도로 눈 앞이 깊게 깜빡였었습니다.
라티나:
SAN Roll
기준치: |
58/29/11 |
굴림: |
79 |
판정결과: |
실패 |
시야가 돌아온 라티나는 당황스러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러니까...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곳입니다.
개중에는 브헤누아 탐사를 함께했던 승조원들도 있는데...
라티나:(깜빡, 깜빡. 짙은 속눈썹 사이로 시야가 돌아온다.)
(그보다 먼저 자리한 청각이 낯설다.)
(조용하다고?)
(이 장소가?)
라티나:(방금의 통증은 뭐지? 일단 진료를... ...)
...밍?
캐스.
아녜스?
라티나:(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이름을 부른다.)
돌아오는 답이 없습니다. 분명히 아까까지... ...
라티나가 정말로 정신을 잃었던 걸까요? 그럼 다들 다른 곳에 모여있나?
라티나:(돌발 상황이라도 벌어진 건가? 단말이 반응하지 않았을 리 없다. 단말을 꺼내 긴급 알림이 왔는지 확인한다.)
그럴리가요. 선 내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통신 라인을 쓰는걸요.
라티나:(그럴 리 없다. 단말을 재기동한다.)
[%uC2E0%uD638%uC218%uC2E0%uC5C6%uC74C]
라티나:(단말을 거칠게 품 안에 넣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선임보안책임자를 찾아가거나, 함장에게 보고를 하거나...
라티나:(선내 휴게실을 다급히 벗어난다. 복귀까지는 일주일. 변수가 존재해선 안 된다. 더 이상!)
캡틴!
지금까지 모든 게 순탄했는데! 게다가 아직 정확한 좌표값을 지구로 전송하지도 않았단 말이죠!
그 말은, 여기에서 큰 문제가 발생하면... ...
라티나는 아틀라스호 위층의 함장실로 향합니다.
함장실과 조종실은 거대한 돔 형태로 합쳐져 있습니다.
라티나:어림도 없어. 절대로. (제 3우주에서 조난이라니? 말도 안 된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장소는 더 이상 개척지가 아니야. 집으로 가는 길에 길을 잃는 사람도 있던가?)
아틀라스호의 위치를 표시하는 홀로그램 지도는 안개처럼 뭉그러져 있고...
라티나:... ...(비어있어선 안 될 공간에는 당연하게 부재가 놓여있다.)
움직임이라곤 라티나와 클라크, 그리고 하인라인 뿐...
(다급히 클라크와 하인라인을 확인한다.)
(이 안에 무언가 남아있지는 않나? 하다못해 영상, 아니 음성이라도...기록할 누군가라도 있었다면.)
... ...
(이 질문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지만? 자신이 잠시, 정말 잠시 잠든 사이에 승조원들이 어디론가 탐사라도 떠났단 말인가? 말도 안 돼.)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하인라인부터 확인한다.)
...하인라인이 띄운 선내 자동 점검 시스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적어도 하인라인이 띄운 바로는 그렇습니다.
라티나:(단말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다.)
(탐사보조용 로봇도 마찬가지인 상황인가? 그렇다면...)
[실드 시스템 - 이상없음]
[외부 충격 경고 시스템 - 이상 없음]
[외부 신호 송수신 시스템 - 이상 없음, 신호 없음]
(공허 속에서 들린 알림음에 번쩍 고개를 든다.)
...연결해 줘.
천천히 하인라인의 통신 상태 패널에서 주파수가 돌아갑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니.)
범우주 통신 주파수에서 점점 눈에 익은 주파수가 보입니다.
하인라인이 송출하는 신호가 조종실 전체에 울립니다.
파작파작 오가는 화이트노이즈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
그리고 동시에 패널에 경고가 울리기 시작합니다.
HEIN-line:[ 외부 접근 물체 감지 ]
라티나:...(그대로 굳은 것도 잠시, 울리는 경고음에 막혔던 숨이 흐른다.)
HEIN-line:[ 긴급 동력 시스템 작동 불가 ]
[ 외부 접근 경고 ]
[ 쉴드 작동 이상 경고 ]
[ 에너지 코어 재가동 권고 ]
[ 에너지 코어 유실 경고 ]
(그와 동시에 찾아오는 섬광.)
시스템이 복구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들립니다.
돔 바깥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는 원형 구체가 있다는 것.
(함장실과 조종실 바깥으로 움직이는 구체. 그것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머릿속에선 온갖 경고등이 울린다. 승조원을 비롯한 함장과 부함장이 모두 사라진 상황. 외부 접근 물체 감지 경고. 망가진 단말...그럼에도.)
창백한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구체는 라티나를 따라하듯 돔으로 천천히 다가옵니다.
...
그러더니 그것은, 마치 벽이 없는 것처럼 돔을 통과해서...
그것으로부터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라티나:(그것과 마주 자리한 자신의 피부 위로 냉기가 전해진다.)
... ...
인간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라티나가 모르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귓속에서 울리는 것 같다가도,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우주선 전체에 울려퍼지는가 하면 우주선 바깥에서부터 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렁차지 않지만 놓칠 수 없을 정도로 명징합니다.
그러자, 라티나의 눈 앞에서 맥동하던 빛 덩어리가 휙 저편으로 움직입니다.
라티나:(그것은 계시인가, 경고인가. 멍하니 그것을 마주하다가 호흡한다.)
...
(이지를 가진 것만은 확실하다. 경계함이 마땅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거리를 두고 걸음을 따른다.)
그것은 아틀라스호를 가로질러 천천히 나아갑니다.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
휴게실에는 승조원들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라운지와, 각종 편의 기구들이 있는데... ...
(비어있던 휴게실에 누군가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다.)
(망설이지 않고 다가간다. 누구지? 누구야? 캐스? 캡틴? 아녜스? 밀?)
(누구라도 좋으니 사람이기를.)
핏기가 없는 창백한 살결. 바람 한 점 없어 흔들리지도 않고 늘어진 흑발.
속눈썹은 눈꺼풀 너머의 생명을 가린 채 닫혀 있습니다.
라티나:(온 감각이 그립고 아릿한 이 시야를 알고 있다.)
그는 마치 깊은 잠이라도 자는 듯, 가슴팍을 고르게 오르내리며 호흡합니다.
라티나:... ...(이윽고 맥이 풀린 목소리가 한 점 이름을 내어놓은 것이다.)
노아...?
라티나를 이끈 빛은 그의 몸 위에서 맴돌다가...
훅 고도를 낮추더니 그의 몸을 통과해 사라집니다.
라티나:(사라진 빛을 더 쫓을 여력이 없었다. 눈 앞에 놓여진 사람은 꿈 그 자체 같았으니까. 표정만은 담담했다. 그러나 잔잔한 수면 아래 심해의 떨림을 담은 손길이 그의 창백한 뺨을 더듬는다.)
라티나:(이 눈동자 안에 아릿한 기억속의 녹색이 없다면? 이것이 우주에서 보는 착란이고 환상에 불과하다면? 아...대체 왜 여기에서. 그 모든 생각을 지우듯 닿는 손길에는 온기가 없다.)
(살아 생을 거머쥔 것들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핏기 또한 없다.)
(무언가 이상하다.)
라티나:(천천히 오르내리는 흉곽을 다시 확인한다.)
그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던 때에,
라티나:(자신도 모르게 흠칫, 고개를 물린다.)
(그 움직임을 따라 목에 걸린 회중시계 목걸이가 반짝 빛난다.)
줄이 끊긴 인형처럼 멍하니 라티나를 바라봅니다.
생명이라면 무릇 지녀야 할 어떤 불씨가 꺼져버린 무존재 같습니다.
노아:... ... ...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이 있는 공간을 살피듯 눈을 굴린다)
노아?
그의 시선은 마치 무정물을 관찰하는 듯 의무적입니다.
라티나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그는 몸을 일으켜 섭니다.
그러고서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무언가에 홀린 듯이 느리게 걸어 휴게실을 나서려 합니다.
라티나:... ...(일련의 행동이 마치 로봇과도 같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와는 너무도 다르게. 녹색은 여전하지만 여전하지 않았다. 그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아 세운다.)
...얼마만의 재회인데 이렇게 지나가시는 겁니까?
게다가 이런 장소에서...예고도 없이.
노아:(아예 고개를 돌려서 라티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눈 앞의 사람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같기도 하다.)
라티나:... (왜일까. 초점은 자신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에게 잡혀있는 것 같은 녹색 렌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듯하게 응시한다.)
라티나:(느린 숨을 내쉰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꼭 가야 한다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까.)
(대신 예전의 언젠가처럼....이번에는 자신이 노아의 옷깃을 쥐고 따라간다.)
그가 느린 발걸음으로 향한 곳은 멀지 않은 장소.
이곳에는 PI 캡슐과 각종 서적, 음악을 들을 수 있는 LP판 따위의...
그러니까 '이런 것까지 있어야 했나?' 들이 있습니다.
라티나:...(자신에게 무엇보다 익숙한 장소.)
그는 시설 중앙에 멈춰 서서 멍하니 안을 살핍니다.
라티나의 눈에 익은 것과는 공간의 분위기가 조금 다릅니다.
가령 옅은 푸른색으로 벽이 칠해져 있다거나...
중력 장치가 가동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공중을 떠다니는 기묘한 물건들 말이죠.
이런 커스텀을 한 적은 없는데...(익숙한 장소인만큼 작은 변화에도 큰 위화감이 따른다.)
(장치의 가동에 상관없이 공중을 떠다니는 물건 사이로 눈을 깜빡인다.)
(그러다 노아를 가만 본다.)
노아:(공중에 떠다니던 장난감 기차와 교통사고나는 중)
라티나:... ...(저 모습 보니 노아가 맞는데...)
...(물끄럼 보다가 LP판 하나를 슬쩍 노아 쪽으로 밀어본다.)
라티나는 LP판을 노아에게 슥...밀어봅니다.
LP판은 바닥으로 뚝...떨어지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 공중을 둥실둥실 떠다니네요.
노아:(천천히 돌면서 무언가를 찾는 것 마냥 주변을 바라보다가, 눈 앞으로 LP판이 다가오면 또 이마와 교통사고를 낸다)
그의 손은 허망하게 물체를 통과해버리고 맙니다.
라티나:... (허술한 모습을 물끄럼 보고 있다가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뭐?
노아:... (가만히 손을 내려다보더니, 이번에는 책들이 둥실거리고 있는 책장으로 다가간다.)
(일단 옆으로 다가가 공중을 떠다니는 물건이 노아를 공격하지 않도록 대강 치워 준다.)
...이마는 부딪힌 것 같았는데. 왜 손은.
(노아를 물끄럼 본다.)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무언가를 향해 꽂힙니다.
책 한 권을 집으려는 듯 그것을 향해 손을 뻗지만,
대체 어디서 어떤 일을 겪고 돌아온 겁니까. (그 움직임을 향해 낮게 중얼거린다.)
(옆에 서서 책 한 권을 집는다.)
이 도서가...테라피 시설 내에 있었던가?
... ...
그럴리가...적어도 라티나가 관리하는 도서 목록에는 없습니다.
라티나:
자료조사
기준치: |
60/30/12 |
굴림: |
5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책은 이상하게 앞뒤는 텅 비었고, 목차와 라티나가 읽었던 챕터만이 두루뭉술하게 남아있습니다.
그것조차도 내용이 온전하지 않고,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빌려 쓴 듯이 대강 적혀 있네요.
녹색 눈의 사내였지.
노아의 시선이 책의 내용을 훑듯이 횡으로 움직입니다.
라티나:(하지만 내용은 어딘가 대강 적혀 있다.)
...
보고 싶으십니까?
(노아의 시선이 닿은 책을 손바닥으로 가려 본다.)
노아:(책이 가로막히자, 다시 고개를 들어서 라티나를 바라본다.) ... ...
(느릿느릿 손가락을 들어 툭, 책을 짚는다. 이번에는 제대로 책이 만져진다.)
(뭔가 속은 얼굴이다.)
(그 손가락 위로 손을 대 본다. 만져질까?)
노아:... ... (잠시 시선이 책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가, 한숨처럼 한 마디를 토한다.) ... ...아.
라티나:...(처음으로 들은 음성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한다.)
(제대로 만져지는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노아의 손목을 쥔다.)
노아:(물끄러미 라티나의 손 끝을 바라보고 있다가, 정신이 채 안 든 사람마냥 중얼거린다.) 그거... ...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린다. 처음으로 언어를 말하는 사람같다고 생각하며.)
노아:... (집중이 풀린 듯 다시 고개를 든다. 영화 DVD가 들어있는 수납장을 보다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PI 캡슐 사이사이를 느릿느릿 돌기 시작한다.)
이쪽...
(느릿느릿 돌고 있는 인영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다가 천천히 캡슐 앞으로 다가간다.)
라티나:보가트 씨가 기어이...?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이것들도 오전 점검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노아는 어느새 완전히 테라피 룸에서 신경을 돌린 듯, 또 라티나를 이끌고 복도로 향합니다.
(눈을 가늘게 뜬다.)
견학이라도 시켜드리는 느낌인데.
(아무튼 노아의 다리길이만큼 성큼성큼 걸어 앞을 막고 선다.)
아틀라스 호 견학을 하고 싶다...그런 건가?
편집실은 어떠십니까?
견학 온 노아 학생.
(복도 오른편의 문 하나를 눈짓한다.)
노아:... ... (라티나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다. 편집실이라는 글자를 느리게 읽는 것처럼 한참을 응시하다가) ...여기에...
(중얼거리며 편집실의 닫힌 문 앞에 바짝 선다.)
그야 지문 인식을 안 했으니 열릴 리가 없습니다.
...(문이랑 눈싸움 하고 있는 것 같은 노아 본다.)
...
(노아가 문 앞에 바짝! 서 있는 사이에 지문 인식기 위에 손가락을 올린다.)
짤막한 안내 문구가 패널에 뜨더니 그제서야 문이 열립니다.
라티나:(패널의 음성과 함께 맞물려있던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것을 본다. 편집실이라면 길게 머무른 적은 없었지만... 노아가 기록을 찾고자 한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쩐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싶은 이질감이 듭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니터나, 형형색색의 파일이 꽂혀있는 아날로그한 서류함 따위가 보이는걸요.
라티나:(은색 서랍 안에는 잘 정돈된 파일이 있었다. 이렇게...화려한 색감이었나?)
(모니터 안에는 탐사 영상이나 선내 영상 따위가 아닌 찬란하게 반짝이는 영상만이 있다.)
... ...
내가 정말 꿈이라도 꾸는 건가.
(선내의 모든 장소가 이렇단 말인가? 모두가 한 템포씩 환상에라도 잠긴 것처럼.)
라티나가 처음 보는 풍경들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영상물이 없었을 것 같은 시절의 시장...
아니, 그 중에 라티나가 아는 공간이 하나 있군요.
모니터 아래에는 각각의 날짜와 시간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제각각입니다.
1500년대, 1900년대, 2050년대... ...
(그 풍경 위에는 인영이 존재할까?)
그러나 시간은 모두 같군요. 2시 4분입니다.
노아:(곧 모니터에서 시선이 떨어지더니, 서류함 앞에 선다.)
(무언가를 찾듯이 손에 걸리는 서류들을 모두 바닥으로 빼내기 시작한다) 이쪽에... ...
라티나:(바닥으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팔랑이는 서류들에 그제야 고개를 든다.)
...무언가 있는 겁니까?
노아:(라티나를 돌아보며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손에 잡혀 떨어진 파일들 사이에, 손을 통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왜..그것만. (그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살핀다.)
(자세히 살펴본다.)
파일을 열어보면, 말린 꽃이 여러 송이 들어있습니다.
라티나:
자연
기준치: |
10/5/2 |
굴림: |
36 |
판정결과: |
실패 |
노아:(라티나가 꺼낸 파일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라티나:...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도 가만히 묻는다.)
(1500년대, 1900년대, 2050년대의 처음 보는 풍경들. 그 중에 단 하나 익숙했던 교실. 2시 4분... 꼭 환자 차트같은 파일.)
노아:(대답을 기대 않는 질문이 흘러들어오고, 몇 번 의미없이 눈을 끔벅이더니...낯선 것을 내뱉듯 이름을 발음한다.) ...라티나 그레이...
라티나:...(그가 딱 한 번 그렇게 불렀던 순간이 있었다. 이별하기 직전.)
...네.
노아:(곧 이어서 몸을 잘게 떨며 고개를 수그린다. 말문이 트인 것처럼 드디어 제대로 된 문장이 흘러나온다.) 왜... ...왜 이렇게 춥죠...?
라티나:(오랜 동면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동물 같았다. 이윽고 마침내 흘러나온 문장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편집실 테이블 아래의 모포를 하나 집어 어깨에 둘러준다.)
(동시에 똑바로 눈을 마주친다.)
당신의 이름은요?
노아:(어깨에 두른 모포를 꾹 쥔 채 고개를 떨었다가 눈을 마주치더니 더듬더듬 대답한다) 노아... ... ...
... 여기가 아니라...
가야 할 곳이 있어요... (힘 없이 중얼거리더니 바닥을 짚고 일어선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싶었던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편집실 바깥을 두리번거립니다.
라티나:...(미간을 좁힌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에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노아를 본다.)
동면에서 깨어나는 동물 같기도 하고, 프로그래밍이 덜 된 기계 같기도 하고...
노아는 모포를 뒤집어 쓰고 구부정하게 걸어갑니다.
기억인지 정신인지...어느 쪽이든 돌아오자마자 따질 겁니다.
(커다란 모포 사나이를 쫓아간다.)
이게 무슨 일이죠? 식당 테이블에 맛있는 음식이 가득 올려져 있습니다.
할라피뇨가 잔뜩 들어간 해산물 오픈 샌드위치?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이 정도의 만찬은 불가능할텐데요?
라티나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테이블이 가득 차 있습니다.
라티나:분자합성 장치로 이 정도를 할 수 있을 리가...
...
(뭐지? 너무 맛있어 보여서 오히려 수상하다. 음식 노려본다.)
대체 누가 이렇게 취향에 잘 맞는 만찬을...?
라티나:(모포 사나이는 뭘 하고 있는지 본다.)
'지구에 돌아가면 먹을 것' 이라는 마음 속 노트에 남몰래 적어두던 음식까지...
모포 사나이는 아무래도 할라피뇨에 관심이 없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테이블을 지나쳐 찬장을 뒤지고 있습니다.
라티나:저걸 지나치는 걸 보니 확실히 어디가 굉장히 심각하게 불완전한 상태로군
라티나:(샌드위치 지긋 보다가 아무튼 찬장 뒤지는 노아 옆으로 간다.)
노아:(벽장에 있던 것들을 싸그리 꺼낸 뒤에도 원하는 걸 찾지 못했는지, 이번에는 쭈그려앉아서 아래쪽 찬장을 뒤진다) 없을리가 없는데... ...
(흡사 뼈다귀 묻은 곳 찾는 개가 아닌가)
하지만 자기가 어디에 뼈다귀를 숨겼는지 모르는...
라티나:(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는 모습.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노아:...모르겠어요. 그런데...있는데...
그게 뭔지 기억이 안나서...
특징이나...그런 것은요?
네모지고 납작한...?
(뭔가 집중하듯 미간 좁힘)
그리고 또요?
노아의 손이 닿은 곳에는 세로로 길쭉하고, 사이사이에 끼워진 것이 많은 노트가 있습니다.
([어떠한] 물건들은 그의 손에 잡히지 않는 건가?)
(그 노트를 꺼내어 본다.)
노트는 매우 낡았고, 귀퉁이가 다 닳았습니다.
겉 표지는 가죽으로 되어있는데, 만듦새는 꼼꼼하지만 현대의 물건은 아닌 듯 어딘가 엉성한 구석이 있습니다.
왜 노아의 손에는 만져지지 않는 거지?
(노트를 열어본다.)
노트에는 마구 휘날려 쓴 영문 필기체가 가득 적혀 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언어도 있지만 누군가의 여행 수기인 듯, 지역의 생활방식과 특색 따위가 메모되어 있거나 간단하게 스케치 되어 있군요.
노아:(그 물건이 반갑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손을 내민다.)
라티나:...(꼭 이 물건을 알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에 눈을 깜빡인다.)
...오래 된 물건 같은데... 직접 엮은 여행 수기인가?
(간단하게 스케치 되어있는 게르를 본다.)
노아:(옆에서 노트를 같이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손으로 종이의 굴곡을 쓴다. 이번에는 제대로 물건이 만져진다.)
제가 만지고 나면...만질 수 있는 겁니까? (추측일 뿐일까. 가만히 중얼거린다.)
창백하게만 보였던 피부에 점차 혈색이 돌아옵니다.
또렷해진 녹색 눈이 재빠르게 시선 앞의 물체들을 훑다가, 고개를 들면 라티나와 눈이 마주칩니다.
그의 표정은 잠들었다 막 깬 사람처럼 혼란스럽습니다.
노아:(눈 앞의 사람을 알아보자마자 눈썹을 비대칭으로 비틀었다가, 첫 마디를 고르듯 입을 몇 번 벌렸다 다물더니) ... ...당신이...?
라티나:(흩어진 조각들에서 조금씩 숨결을 얻은 것만 같은 노아를 바라본다.)
당신은 제가 아는 노아가 아닌 겁니까?
노아:(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생경한 표정을 짓는다.) ...날 알아요? 어떻게... (그랬다가 내려간 시선 끝에서 눈에 익은 회중시계를 발견하고 천천히 눈이 둥그렇게 뜨인다. 올라오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올라간 입꼬리가 크게 벌어진다.) 맙소사.
당신 그 라티나군요. 티나, 진짜 당신이에요?
세상에, 어떻게...아니, 여기가 무슨...어떻게...? 내가 대체... (채 다듬어지지도 않은 말이 마구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가 네 손을 양 손으로 붙잡고 마구 흔든다.)
라티나:... ...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돌아온
수상이를 보는 것 같은 얼굴이다. 곧 그 얼굴이 마구 흔드는 격렬한 악수를 따라 흔들린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한 채로 힘주어 손을 멈춘다.)
...
어떻게 된 겁니까?
노아:(색색으로 바뀌던 표정에서 튀어나온 질문에 오히려 이쪽이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가)
어떻게 된 거나는건...?
... ...근데 일어나서 말해도 되나요? 아니면 어디 앉거나...
얼마나 이렇게 앉아있었던 거에요?
라티나:(눈을 가늘게 뜬다. 추궁할 것들이 4289428942894289가지 떠오르지만 일단은 입을 다문다.)
(식탁을 눈짓한다.)
...
일단 앉으시죠. 어쩐지 만찬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노아:웬 만찬이... ...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식탁 앞 의자에 앉는다.)
그러니까 일단... ...여기가 어디죠?
아틀라스 호입니다. 제가 승선한 우주선이요.
노아는...방금 선내 휴게실의 빈백에 쓰러져 있었고요.
노아:아틀라스 호... ...아, 그렇군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겠네요...
제가 사라진 이후로 몇 년이나 지났죠?
이런 장소에서 이런 때에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죠.
(근데 좀, 하고 덧붙이며 아틀라스 호 내부를 다시 한 번 두리번거린다)
제가 느끼기엔 정말 찰나였는데... ...
사냥개들에게 먹힌 이후에 모든 의식이 끊겼어요. 저는 그게 죽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정신을 차려보니까 여기에 있더라고요.
(그제야 긴 숨을 내쉰다. 아릿하고 어슴푸레하지만 그 날을 잊을 리 없었다. 천천히 흩어지던 음성. 그의 몸을 휘감던 검은 연기. 무력했던 자신.)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든다. 바다를 닮은 눈동자가 가만히 노아를 본다. 그리고...)
(퍽.)
(주먹을 쥐어 등을 때린다.)
라티나:
근력
기준치: |
65/32/13 |
굴림: |
3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노아:
건강
기준치: |
50/25/10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그대로 식탁에 엎어진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노아:미...미안해요...그런데 진짜 아프게 때리시네요... ...
라티나:(식탁에 엎어진 노아를 향해 2차 공격이 이어진다.)
(곧 주먹이 조금씩 잦아든다.)
...
노아:(일단 맞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반항없이 쥐어터지고...)
(안경을 고쳐쓰며 슬그머니 쳐다본다)
... ...진짜 미안해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노아:... (슥 웃어보인다)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라티나:(테이블 위로 엎드린다. 팔뚝에 뺨을 괸 채로 대답한다. 조금 툴툴대는 투로.)
...됐습니다. 쌓은 친분과 신뢰에 대해 다시 생각할 예정입니다.
노아:... ...호, 혹시 강등된다면 얼마나...
지나가는 동네 강아지 3호 정도로.
앗, 그래도 강아지니까. (긍정적)
노아:... ...질문 몇 개 더 해도 돼요?
라티나:(동네 강아지 3호에게 질문을 받아도 되나 잠시 고민)
일단 해 보시죠.
왜 여기에 탄 거에요? 혹시 조종사가 됐어요?
아틀라스 호는 탐사용 우주선이잖아요.
라티나:...조종사는 아니고, 엔지니어로 승선했습니다.
승선한 이유는...
노아:엔지니어. 잘 어울려요. (그리고 이어진 대답을 기다리듯이 끔벅이며 바라본다)
라티나:저도 시간 여행자라는 것이 되어 볼까 해서요. (담백한 투다.)
행성 사이를 오가면서.
노아:... ... (그 말에 작게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렇군요.
...기쁘네요. 진짜로요. 멋진 시간여행자가 됐군요.
사실은 저를 금방 잊을 줄 알았어요.
라티나:(이제는 익숙해진 목걸이를 만지작거린다.)
이것 덕분인지도 모르죠.
늘 함께 있었으니까요.
노아:저는 좀 무책임했는데.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이다가) 가지고 있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마지막 질문...여긴 원래 이런가요? (양 손에 빵을 들고 허공에 분리된 채로 떠다니던 할라피뇨 새우 샌드위치를 차곡차곡 조합한다)
다른 탑승객들도 없는 것 같고요. (샌드위치를 한 입 먹는다)
라티나:나중에 한 대 때려주려면 명분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담담히 눈을 깜빡인다.)
...그것 말인데. 원래 이렇지는 않습니다. 샌드위치 외에도요.
노아:(여러 대 때렸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면 또 맞을 것 같아서 얌전히 샌드위치만 먹는다)
라티나:(아무래도 진심 3대와 자잘주먹이 무수하게 들어갔던 것 같다)
어딘가 조금씩 위화감이 듭니다.
승조원들은 갑자기 사라져 있었고요.
이 목걸이의 태엽을 감고 나서,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난 후부터요.
짐작가는 게 있으십니까?
노아:(아마도 자신이 늘어놓았을 찬장 속의 물건들을 한 번, 식탁 위를 한 번 보더니...)
그럼 여긴...아마도 가상 우주겠군요.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했는데, 이러면 설명이 되네요.
노아:네. 가상 우주는... ...제가 처음 살던 곳에서 지구로 갔을 때 지나온 곳이에요.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의 사이, 차원의 틈이라고 할까요. (납작하게 잘린 바게트 빵 두 개를 들고 약간의 틈을 만들어보인다)
혹시 신 같은 목소리도 들었어요?
라티나:(바게트 빵 사이로 깜빡깜빡 보이는 녹색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주억인다.)
노아:그럼 확실하네요. (빵을 내려놓더니) 가상 우주는 틈에 있는 사람의 무의식으로 구성돼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그 내부를 구성하는 것들은 달라지기도 하죠.
이 가상우주는 티나와 제 무의식이 결합된 결과일 거에요.
티나가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어준 덕분에 차원간 암흑 공간에...그러니까... ... (잠시 기억을 떠올리듯이 눈썹을 비틀다가) 21세기 풍으로 말하면... ...
뭐라고 하죠, 그...차원간 암흑 공간...스페이스 하이웨이? 아닌데... ...
아, 블랙홀.
거기에 흩어져 있던 유기체인 제가 짠. (접시에 머랭을 하나 올려놓는다.) 현존할 수 있게 된 거에요.
노아:... ...제대로 설명이 됐나요? 제가 강의에는 조금 소질이 없어서...
라티나:...어느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이 회중시계의 태엽이 운 좋게 접시를 만들었고... 흩어져있던 노아가 이렇게.(접시 위에 올라온 머랭을 톡톡 친다.) 현존할 수 있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접시를 한 손으로 쥐고, 그 위에 올려진 머랭을 다른 손으로 쥐어 분리해 본다.)
이 가상 우주라는 건 언제까지 유한한 겁니까?
이 머랭이 접시 위가 아닌 곳에서도 존재할 방법은 없나요.
노아:(잠시 접시를 바라보다가) 다행히도 이 가상우주는 마법 오븐 같은 거라서, 어디에든 서빙 될 수 있어요.
아까 전에 제가 틈이라고 했지만, 이 틈은 잘만 이용하면 정거장이 되거든요.
어떤 시간, 어떤 공간으로든 갈 수 있는.
일단 식사를 할 시간 정도는 충분해요. (접시 위에 머랭을 하나 더 올려준다)
그렇다면.
이건 제게 주어진 기회인 셈이군요.
(접시 위에 나란히 놓인 두 머랭을 본다.)
저는 이제 당신을 구할 수 있는 겁니까?
노아:(어...하고 잠시 말 끝을 늘이다가) 저를 구하려고 했어요?
라티나:(등을 바로 해 분리된 채로 떠다니는 할라피뇨 샌드위치 하나를 완성한다.)
어린 마음에 조금 남아있었거든요. 앙금처럼.
언젠가 나를 구해줄 날이 올 거라던 말을 기다렸기도 했고요.
(이내 샌드위치를 한 번 문다.)
샌드위치는 라티나가 기대한 바로 그 맛입니다.
라티나:.......................................................
이건 제 무의식이 빚어낸 맛이겠죠?
...맛있다.
노아:기대한 맛이 나고, 기대한 형태가 되죠. (마카로니를 포크로 콕 찍어먹더니) 지구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 같아요.
자료로만 지구 음식을 접하다보면 기대치가 엄청 높아지거든요.
자료 하니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노아:(마카로니를 우물거리느라 눈썹만 들어올려 묻는다)
라티나:저와 노아의 무의식이 결합된 결과라면...
마주한 것들 중 제가 모르는 것은 노아가 그 답을 알고 있겠군요.
'환자 번호 29번'...
그리고 누군가의 여행 수기같던 기록물.
2월 4일이되 해를 달리 하던 영상...
그건 혹시...
라티나:저와 노아가 만났던 이전의 생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노아:(라티나가 말하자 기억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맞아요. 티나는 기억하지 못할 생들이지만...그런 때도 있었죠.
어땠습니까? 저는.
노아:티나는... ...항상 당당했어요.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있었고, 벗어나는 일이 없었죠.
그래서 볼 때마다 신기했어요. 다 다른 사람일텐데도 항상 비슷한 말을 했거든요.
그래서 매번 당신을 만나는 걸 기대했죠. 제가 들었던 목소리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라티나:(자신은 모르는 혹은 잊었을 생 어드메를 더듬는 녹색 눈빛은 즐거워보이기도 혹은 슬퍼보이기도 한다. 자신 이전의, 143명의 라티나 그레이는 몇 번이고 노아를 믿었던 것이겠지.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이상한 기분입니다. 꼭 저를 등장인물로 차용한 작가님의 인터뷰라도 듣는 것 같아요.
노아:한 사람이 주인공인 몇 백 편의 소설이 있는 셈이네요.
저는 매번 생각했거든요. 지금이라도 당신을 찾는 걸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고요.
하지만 돌아가면 다시 찾고 싶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계속 남아있으면 후회할 것 같았죠.
그리고...마침내 만난 당신이 나를 질타할까봐 조금 무서웠어요.
저는 몇 천년을 살고도 여전히 저를 의심해요. 회의감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고작 몇 십년을 사는 당신은 저를 믿어준다는 게 신기했어요.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는 것도요.
라티나:그래도 저를 만나러 온 것이라면 제가 아는 당신 치고는 꽤 용기를 냈던 모양입니다. 몇 번이나 거듭해서요.
저도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잊고 다시 기억하게 되면서도 빠짐없이, 망설임 없이 당신을 믿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요.
그 몇 백 편의 소설은 기억하는 당신 덕에 세상에 존재했고...
결과적으론 지금처럼 이런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겠지요.
... (조금 눈을 가늘게 뜬다.)
라티나:혹 당신을 질타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셨습니까?
또 맞으면 어떡하시려고요.
티나가 정말 싫을 땐 아예 마주해주지도 않거든요.
아니면 모르는 척... ...
라티나:...(그럴 법 해서 좀 말 없어졌다.)
노아:싸늘하게 경멸하는 표정으로 보고 말없이 지나가기...
그럴 때 대처하는 매뉴얼은 있었나요.
(급 아련한 표정 짓는다) 어쨌든 진짜 무서웠어요.
라티나:상황에 따라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으니 조심하십시오. (끄덕)
정류장이라...
(샌드위치 하나를 마저 우물우물 먹는다.)
무의식 말인데요.
가령... 이 옆에 강아지 쿠션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떠올리면 생긴다거나.
노아:큰 구조를 바꾸는 건 힘들지만, 그 정도는...
하지만 마법처럼 '뿅' 하고 생기지는 않아요. 가상 우주는 어느 정도 현실의 개연성을 지키려는 관성이 있거든요.
이 샌드위치 구성물들이 무중력 공간에 있는 것처럼 떠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죠.
쿠션이 있을 법한 곳에 가면 있을지도 몰라요.
어느 정도 현실의 개연성을 지킨다...
(우물우물)
그렇게만 보면 꽤 꿈같은 공간이네요.
노아:그렇죠? 음식도 먹을 수 있으니까...아마 자주 올 수 있었으면 애용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매번 이렇게 잘 만들어지진 않으니까...
라티나:(어느새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은 채로 접시 위의 머랭을 톡톡 건드린다.)
노아:머랭이 있을만한 가상우주면 아주 잘 만들어진 축에 끼죠. (머랭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는다)
여긴 우주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까, 출구를 찾는 것도 쉬울테고요.
라티나:(하나 남은 머랭을 가만 바라보다가 따라 입에 넣는다.)
그럼 이제부터 이 안을 돌아다니며 출구라는 것을 찾으면 되는 겁니까?
노아:네. 아마도 출구가 있을 법한 곳은... ...외부와 통하는 문, 아니면 아틀라스 호를 움직일 수 있는 조종실 정도겠네요.
티나가 이 곳의 엔지니어니까, 잘 따라다닐게요.
이 곳에는 라티나가 모르는 라티나의 삶도, 노아의 삶도 녹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영원히 남아있을 수는 없죠. 우리는 어디론가 돌아가야 합니다.
라티나:(작은 머랭은 곧 아삭거리며 혀 위에서 녹아 없어진다.)
노아:음, 이건 반물질 맛이네요. (기묘하게 형광색이 도는 마카롱 집어먹는 중)
이 배는 원래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거에요?
라티나:일단 지금은 지구로 복귀하던 중이었다고 해야겠죠. (이 마카롱 먹어도 되는 겁니까? 수상하단 듯 덧붙인다.)
노아:제가 돌아가는 길을 방해했네요. (작게 웃더니) 그럼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구시대 동호회 같은 데에서 만들곤 하는 건데...그래도 생긴 건 멀쩡한 마카롱이니까 제대로 맛이 날 거에요.
라티나:(형광색 마카롱 하나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담담히 고개를 든다.)
글쎄요. 방해일까요?
정류장에 서서 돌아가는 버스를 제대로 탄 걸지도 모르죠.
(마카롱 하나를 베어문다. 의심하지 않고.)
일터 견학 겸 탈출 프로젝트입니다.
정확히 라티나가 상상한 그대로의 맛이 납니다.
라티나:(할라피뇨라자냐맛의 마카롱이 존재한단 말인가?)
(가상우주라는 건 굉장하구나)
그리고 오랜만이잖아요?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요.
노아:제게는 찰나였지만 티나에게는 13년이었죠. 지구인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크는군요...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아직 남은 일터 견학 코스도 있어요?
라티나:어쩔 수 없습니다. 제겐 찰나가 아닌 걸요. (감탄에는 제법 당당하게 양 허리춤에 손을 올린다. 문득, 자신은 그의 눈 앞에서 몇 번이나 성장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어엿한 성인이라고 칭찬 좀 하셔도 좋습니다.
노아:(꽤 당당한 모습에 소리내 웃어버리더니 와아, 하고 박수를 친다) 정말 멋지게 컸어요. 우주선에 탄 티나는 처음 봐서 정말 감회가 새로워요.
라티나:흐음. (더더. 하듯이 느슨하게 눈을 감고 턱짓한다.)
노아:어, 음. 머리도 더 길었고요. 왠지 키도 좀 큰 것 같아요. 지구인의 우주 진출 최전선에 서 있군요. (꼼꼼히 뜯어보는 중...)
라티나:(짚어주는 포인트마다 한 번씩 강조한다. 머리도 한 번 넘기고 신발 앞코로 바닥도 한 번 치고.)
노아:엔지니어 생활은 어때요, 적성에 잘 맞나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가볍게 식탁에서 일어선다)
라티나:(제법 만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둥실 떠오르는 마카롱을 톡 치며) 생각했던 것보다 더요.
(이어 떠 있는 마카롱과 머랭을 따라 헨젤과 그레텔이라도 된 것처럼 식당의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뭔가를 구축하고 또 허물 수 있다는 건 제법 흥미로운 일이니까요.
두 사람은 마치 마녀의 과자집처럼 변모하는 식당을 나섭니다.
다시 나선 복도는 아까와도 조금 달라져 있습니다. 라티나가 이곳을 가상우주라고 인식했기 때문일까요?
복도 군데군데에는 담쟁이 덩굴이 올라가고 있기도 하고, 어떤 곳에는 문 대신 화려한 자수가 놓인 천이 걸쳐져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아틀라스 호 내부를 꾸미기라도 한 것 같네요.
노아:아, 화려하네요. (복도를 채운 기묘한 풍경을 바라보며 기분좋게 미소짓는다.) 잘 어울려요.
좋은 사람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하던데, 그 말이 꼭 맞는 것 같아요. 티나 주변에는 항상 멋진 동료들이 있었죠.
라티나:(꼭 사용하고 난 세트장과 소품 모음집같다. 기묘하고 아기자기한 풍경을 보며 미소짓는 노아를 본다.)
고난도 잘 헤쳐나가던가요.
노아:누구나 그렇듯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기곤 했지만...네. 적어도 제가 본 바로는 그랬어요.
거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각기 달랐어도요. 당신이 가는 길이 틀렸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이렇게 거대한 칭찬 앞에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고맙다며 웃기라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표정은 되려 심각해진다...)
노아:(어쩐지 옆에서 점점 심각해지는 표정을 보면서...) 아, 인생에 문제가 많다는 게 아니라요!
라티나:(ㅍ''ㅍ 표정으로 척척 걷다가 공중을 떠 다니던 마침 책 모서리에 이마 박는다.)
...~!...(이마 문지름)
노아:으악. 괜찮아요? (부딪힌 뒤에야 책을 저 멀리로 치워놓는다)
...헉. 혹시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자신의 이름과 직업은?
누구신데 여기 계시는 겁니까?
(노아의 기억 속 [싸늘하게 경멸하는 표정으로 보고 말없이 지나가기] 해 본다.)
라티나:
위협
기준치: |
50/25/10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노아는 아주 놀란 표정을 짓는 듯 하다가... ...
노아:농담도. 진짜 놀랐잖아요. (라티나의 볼을 콕 누른다)
라티나:(볼이 콕 눌린 채로 험악한 표정 짓는 중)
제법 간이 커지신 것 같기도 하고...
찰나가 지난 것 맞습니까?
어디서 훈련이라도 하고 온 것 아닌지...
라티나가 진짜 저를 경멸할 때에는... ...
제 직감이 먼저 반응하거든요.
피가 식는 기분이 오래 가지 않는 걸 보니까... (그래도 눈치 보다가 손가락 슥...내려놓는다)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은 노아의 볼을 꾹 잡아본다.)
또 그런 경험을 할까 봐 두렵기라도 하십니까?
노아:(반항없이 볼 잡힌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수천년을 쫓아다니던 사람이 저를 싫어한다고 하면 충격이 심하지 않을까요?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려보인다)
두 사람이 복도를 걷다보면 어느새 격납고와 외부 문으로 향하는 격벽이 있는 가장 아래층에 도착합니다.
흐음, 정류장의 밖으로 가야 하는 거니까 제법 설득력이 있는 장소에요.
라티나:고등학생 때였다면 부수고 나갈 수 있나? 부터 말했겠지만.
노아:부수... ... (눈을 동그랗게 뜬다)
...걱정 마세요. 열쇠가 있으니까...
라티나:(개폐 절차를 찾으려던 눈이 노아를 향해 움직인다.)
가지고 계신 방법이 있습니까?
노아:그거에요. (라티나가 걸고 있는 회중시계를 가리킨다.)
왕복 통행권이라고 할까요...제가 돌아갈 때 그 시계를 쓰지 않았으니 티켓이 남아있는 셈이죠.
격납고와 외부 문은 모두...평소와 달리 초록색 불이 들어와 있습니다.
라티나:(그 말에 천천히 가슴께로 시선을 내린다. 빛나는 목걸이에 닿았던 시선은 문 위의 초록색 불에 깜빡깜빡 닿는다.)
이걸 사용해서 문을 열 수 있는 겁니까?
어떤 방법으로요?
노아:그건 가상우주마다 달라요. 가상우주의 배경에 맞춰서 만들어지거든요. 여긴 우주선이까 조금 멋진 방법으로 이뤄져 있지 않을까 기대 중이에요.
라티나:(초록색 불빛을 바라보다가, 다시 노아를 본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여기에는 그 개들이 쫓아오지 않는 것이고요?
노아:아, 그렇죠. 그것들은 저를 분해시키는 걸로 모든 임무를 다 해서... ...아직 그걸 걱정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미리 말해드릴 걸 그랬네요.
라티나:기껏 만났는데 방해꾼이 찾아오는 건 싫으니까요.
(천천히 외부 문 위에 손을 댄다.)
노아:(바람빠진 소리로 웃는다.) 강해졌네요.
라티나:지킬 약속이 있으면 으레, 그렇게 되죠.
보안문이 가벼운 승인 알림음을 내며 열립니다.
격납고와 외부 문이 있는 거대한 문이 열리면, 그 안에 있는 것은...
이곳은 분명 탐사선들이 모여있는 곳일텐데...
두 사람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전시실 같습니다.
깨끗하고 넓은 홀, 주황빛 레일 조명과 유리 진열장이 가득합니다.
노아:(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안으로 들어선다) 이게... ...
높은 천장을 가득 메운 유리 진열장들은 마치 거대한 박물관을 연상시킵니다.
라티나:(작게 입을 벌린다. 굳었던 걸음을 천천히 움직인다.)
전시된 것들은 라티나의 눈에 익은 것도 있는가 하면, 아무리 보아도 현대의 기술은 아닌 물건들도 있습니다.
노아는 주변을 둘러보는 듯 하다가,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라티나:...이런 장소가 아니었는데...이건 꼭. (마법 같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
두 사람에게 익숙한 물건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먹먹한 침묵에 사로잡힌 그가 천천히 유리를 짚고 쓰다듬듯 선을 그려냅니다.
그 날, 광장에서 받았던 라티나의 초상화입니다.
받았을 때와는 달리 누렇게 변색되어 가장자리가 너덜거리는 것을 잘 압축해 보존한 형태입니다.
노아:...세상에. 정말...정말 오랜만이에요.
그 때의 기분을 잊고 있었는데...이제 알겠네요.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마치 전시실의 관람객이 된 것처럼 한참동안 그림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라티나:(그 순간, 그럴 리 없는데도. 그 공간이 마치 푸르른 그 날로 물드는 것 같았다. 억겁의 시간 이전에 자리했던 보물을 보는 녹빛 눈동자. 화가의 미소. 간직해달라던 그의 말. 천천히 물러선 그의 곁에 나란히 선다. 그가 기록해 준 이야기 속, 아릿한 삽화를 헤아리는 느낌이었다.)
(투명한 유리로 된 액자 속, 시간이 남긴 보물이 숨겨져 있었구나.)
...어떤 기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건. (부러 그의 표정을 살피지 않고 그저 그림을 응시한다.)
노아:...마음을 사로잡히는 기분이죠. 이유도 모르게... (오래 전의 기억을 되살린다. 지구가 아주 먼 고대가 되고, 인류가 은하를 몇 번 쯤 옮겨 생존하던 곳. 미지라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
저는 이런저런 삶을 살다가, 범우주 기록관리국에 잠시 몸을 의탁했었어요. 항상 구시대 유물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런 것들을 모으는 게 취미이기도 했고...
혹시 그런 적이 있지 않나요? 훨씬 더 대단한 기술이 있고, 더 정교하고 칭송받는 작품들이 있는데도 유난히 마음을 빼앗는 물건을 마주하는 것.
저한테는 이 초상화가 그랬어요. 그 때 처음으로 생각했죠. 몇 십년으로 끝날 생을 살더라도 딱 한 번만 이곳에 가보고 싶다고요.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은 탄식이나 혼잣말처럼 조용히 흘러나온다.) ...이천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라티나:(오랜 녹색 일지의 첫 걸음이 시작된 곳을 목도한다. 대단한 기술로 점철된 물건도 아니고, 정교한 예술품도 아니며 칭송받는 대단한 유물 또한 아니었다. 고작 초상화 한 장이었다. 어느 이름 모를 화가의 손에 그려진, 값조차 치르지 않은 작은 그림. 고작 그것이었구나. 그것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었구나. 평범함이라는 것은 때때로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 된다. 그래, 지금처럼.)
... (제 하나의 생으론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기다려 그 까닭을 마주한 여행자를 본다. 더 멋진 것이 많았을 텐데도, 더 빛나는 것들이 많았을 텐데도. 너는 고작, 고작 그것 하나를 시작으로...)
(이런 기분을 느끼게 만들다니.)
(먹구름같은 짙은 속눈썹이 길게 덮였다가 뜨인다.) ...
...정말 바보라니까.
노아:한 번 정도는 미련한 프로젝트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만...
역시 오길 잘 했어요.
적어도 프로젝트를 후회하는 일은 없겠습니다.
파트너 씨.
(목걸이를 천천히 쥔다.)
노아:출구는 아니었지만, 간만에 그리운 기분이 들었어요. (미간을 문지르며 라티나를 돌아보더니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다.)
라티나:(손 안에 잡히는 부피와 모양은 익숙하다. 언제나 거기 있을 것처럼.)
제법 뜻깊은 견학이 되신 모양이죠?
헛걸음은 아니군요.
노아:물론이죠. 멋진 견학이었어요. 사후 평가서는 꼭 꼼꼼히 쓸게요.
(그러다가, 문득 너무 한 곳에 오래 서 있었나 싶어져서 조금 민망한 기색을 띄며 전시관의 다른 부분들을 허술하게 가리킨다) 가볍게 둘러보고 가도 괜찮아요. 제 기억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곳이라 두루뭉술한 부분이 많겠지만...
라티나:(조금 민망한듯 덧붙이는 말에 눈을 가늘게 뜬다.) 선내에서 본 어딘지 두루뭉술한 물건들은 노아의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였나 봅니다.
(가볍게 몸을 돌려 유리관 사이를 걷는다.)
노아:그런 게 그렇게 많았어요? 기억력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
(한 유리관 앞에 멈춘다.)
노아:...아무래도 저도 기계가 아니라 그런지 기억이 바래는 부분들이 있나봐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따라가다가 라티나가 멈춰서면 덩달아 우뚝 멈춘다) 왜요?
이 검은 강아지가 그려진 티셔츠는 노아의 물건입니까?
꽤...
깜찍한 취향이시네요?
(유리관 안에 놓인 티셔츠를 본다.)
노아:(그 말에 천천히 유리관 안을 봤다가...으아악, 소리를 내며 마구 손을 휘젓는다.)
아하... 이런 취향.
노아:이건...이건 선물받은건데...이게 왜 여기에 있지? 이래서 무의식 구현은... (혼잣말로 마구 중얼거리다가) ...저는 한 번도 입은 적 없어요!
라티나:보통 상대가 좋아할 만한 물건으로 선물을 고르지 않습니까? (대답하며 성큼성큼 걷는다.)
취향 하나 알았네요.
그럼 누가 입었는데요?
노아:반 정도는 장난으로 선물받은건데... ...옷장에 넣어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티나가 가져가서 입었어요.
아, 그러니까. 그 당시에 살던...
...
그...
삥 뜯은 겁니까?
(그랬던...건가? 하고 떠올린다)
아니... ...그렇...그렇다기보단...
마땅히 드릴 옷이 없어서...
노아:그 때는 티나가 입을 옷을 준비를 못했었거든요. 그게 많은 사정이 있는데, 어쨌든... ...
정확히는 제 취향이라기보다는 티나 취향이에요.
하긴... 노아는 뭔가...
강아지보다는 고슴도치를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요.
노아:...어...맞아요. (놀란 것처럼 눈을 둥그렇게 뜬다) 고슴도치 좋아해요.
...신기하네요. 이번에는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라티나:(동글동글. 두 손을 모아 모양을 만들어보다가 고개를 기울인다.)
노아:(어쩐지 그 모습이 어느 생의 흐릿한 풍경을 떠올리게 해서,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다.) 네, 동글동글.
라티나:(그 시선 안에는 무엇이 맞물리고 있을까? 이상한 기분이다. 자신도 모르는 작품들의 오랜 감독이자 팬 앞에 선 것처럼.)
(괜히 눈을 굴려 다른 유리관을 본다.)
다른 유리관에는 레스토랑에서 쓸 법한, 주둥이가 길고 가느다란 주전자나...
포크와 나이프 세트, 라디오, 라티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투명 패널 단말기 따위가 있네요.
하긴, 이들이 '구시대'라고 부르는 지구는 라티나의 입장에서는 먼 미래였을수도 있겠습니다.
라티나:(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열심히 추리 중이다.)
(새삼스럽게, 다른 시간선을 살아왔음에도 결국 맞물려 만난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때때로 이게 대체 뭐야? 싶을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생긴 것들도 있었지만요...
아무래도 모든 걸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는 거겠죠.
(한 유리관 앞에 멈춰서 가만히 유리를 덧그려 본다.)
누구의 것입니까? 이것은.
(그 안에는 손으로 만든 것 같은 활과 화살이 들어있다. 깃털로 날개를 만들고, 날렵하게 돌을 깎아 화살촉을 만든.)
노아:(라티나가 가리키는 유리관을 바라본다. 섬세한 손길이 닿은 물건. 기계 공정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물건은 간소하지만 견고하다. 기억을 되살렸으니 손수 깎은 화살대도 곧고 길게 뻗어있다. 척박하지만 아늑했던 땅을 떠올리며,) ...이것도 당신 거에요.
물질적인 풍요 같은 건 바라지도 않게 될 정도로 멋진 곳이었죠.
한 땀마다 의미를 담은 자수가 놓인 옷을 짓고, 바람이 불면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장신구를 달아요.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평소에도 외출복 같은 화려한 옷을 입는데, 아주 잘 어울렸어요.
저한테도 활 쏘는 법을 알려주셨었는데, 결국 제대로 성공하진 못했어요.
해가 다 질 때까지 화살을 찾아서 돌아다녔지만 즐거웠었죠.
라티나:(저 화살을 쏘는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녹색 눈을 오래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찰나 짧은 환상 또는 상상이 머릿속을 채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더라도 아늑하고 웅장했던 대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화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을까. 손수 엮은 것 같았던 일지 속에 적힌 그림을 떠올린다. 자수가 놓인 옷,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빵.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금빛 장신구.)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며 또한 기록했을 노아를 떠올린다.)
(활이라곤 모르지만. 문득 유리관 앞에서 장난처럼 활시위를 잡는 시늉을 해 보인다.)
(이윽고 화살을 흘려보내듯 손을 놓고, 편안히 눈을 깜빡인다.)
노아:(그 모습을 보는 동안 잠시 입가에 웃음기가 가셨다가, 다시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온다.) 저보다 폼이 좋은데요.
역시 흐르는 피는 속일 수 없나봐요.
라티나:...(하나의 생과 사도 잊지 못해 가슴이 데인 얼굴을 할 거면서. 그런 무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기다릴 수 있었는지.)
실력이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죠?
해가 질 때까지 화살을 찾던 노아를 본 저는 뭐라고 하던가요.
노아:다시 만들면 된다고 했어요. 저는 화살촉 하나하나가 정말 귀한 물건인 줄 알고... ...
...어쨌든 체력은 좀 붙었었죠. 그 때는.
라티나:저라면 순진하게 온 사막을 뒤지다가 돌아온 노아를 보는 것으로 화살촉의 역할은 다 했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꼬질시무룩하게 돌아온 노아를 상상한다.)
그 땅을 사랑했던 모양이죠. 노아도, 저도.
노아:대지와 그 땅의 오랜 주인들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어요. 행성과 인간이 공존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어서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죠.
(먼 친구를 배웅하듯 몸을 돌리지 못하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겨우 전시실을 나선다.)
기억은 다 하고 있었는데, 티나랑 같이 보니까 감회가 새로워요.
당신이 온 지구로 따지자면...무의식 전시 시스템이 개발되려면 아직 천 년은 더 기다려야겠어요. (농담처럼 웃는다)
라티나:(눈을 가늘게 뜬다.) 멀어도 너무 멉니다. 시간이란 건 꽤 괘씸한 녀석이네요.
저도 흥미로웠습니다. ...선내에서 종종 보았던 것들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지루할 일 없는 정류장이네요.
(전시실을 나서 천천히 걷는다.)
이 쪽이 출구가 아니었다면...
다음 후보는 노아의 말대로 조종실 정도일까요.
노아:그렇죠? 가끔 가상우주를 구경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체류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
라티나가 조종실 근처까지 다다르면, 문 앞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병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문 앞의 병을 집어든다.)
아까까진 없던 물건인데...
와인병처럼 보이는 물건은 투명하고, 그 안에는 찬란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액체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주 감로주에요. 친절하네요.
노아:인간이 견딜 수 없는 여행을 할 때 마시는 거에요.
시간이나 공간을 뛰어넘거나, 맨 몸으로 우주를 유영해야 할 때.
만드는 방법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넥타르라고 부르곤 했는데... ...
구시대간 시간여행자들끼리는 따로 부르는 은어가 있어요.
샴페인 슈퍼노바라고.
라티나:(와인병을 작게 흔들자 그 안의 금빛 액체가 찰랑인다. 꼭 별처럼.)
...이상하네요.
은어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샴페인 슈퍼노바...
라티나가 병을 집어들면 조종실의 문이 열립니다.
조종실도...라티나가 알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타일 바닥이 아니라, 옻빛 나무 재질인데...
(이제는 오히려 구석구석 변화한 모습이 자연스러울 정도다.)
사이사이가 뚫려 있고, 그 아래에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노아:그렇죠? 낭만적이고...시간여행자들은 이상하게 다들 팝송을 좋아하더라고요.
가운데 즈음에 작은 톱니 두 개가 맞물려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탁탁 튀는 소리를 내는 것이 들립니다.
작은 나사나 받침 톱니 따위가 빠진 것 같습니다.
라티나:(고개를 숙여 그 아래의 문제를 확인한다.)
큰 결함은 아닌 것 같군요.
작은 톱니 옆에 놓인 큰 톱니가 돌아가지 않는데,
그것을 고정시키는 부분에 동그란 홈이 파여 있습니다.
노아:(라티나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웃다가) 여기가 정답이었군요. 정말...
적절하게 만들어져 있네요.
...
이 홈을 이것으로 채우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렴풋한 답은 알고 있다. 그러나 온전한 정답일까?)
노아:비유하자면, 시간의 톱니가 제대로 돌아갈거에요.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의 문을 여는 매개라고 할까요.
이걸 작동시키고 나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
도착할 지점을 정확하게 정해야 한다는 거에요.
그리고 단점이 있다면,
우리 둘 모두가 같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거죠.
노아:티나는 티나가 살던 곳으로, 저는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면 금상첨화겠지만... ...
(길지 않은 고민을 하는 듯 하다가) ...덕분에 멋진 견학을 했으니 티나가 원하는 곳으로 갈게요.
노아는 노아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우리 둘 모두가 같은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 단점인 이유는 그것 때문인가요.
노아:아무래도 이방인이 하나 더 따라가는 셈이 되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눈을 천천히 끔벅인다)
노아:... (슬쩍 눈치를 본다) 저는 아무 곳이나...좋아요. 정말로요.
티나한테는 가족도 있잖아요.
묻고 싶습니다.
수많은 생과 사가 노아에게 더 많은 추억일지...혹은 상처일지 모르지만.
제 곁에 있고 싶으십니까?
노아:(잠시 입을 벌렸다 다물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저는...만약 티나가 사는 곳으로 가게 된다면.
당신을 마지막으로 하려고 해요.
어쨌든 목적으로 했던 것도 전부 봤고, 더 이상 티나를 기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이번 생까지는 종종 보러 올게요.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이 있을테니까요.
라티나:(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목걸이를 천천히 어루만진다.)
145번째는 없다는 거군요.
노아:네. 이번을 마지막으로. (제법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라티나:(손에 들린 샴페인 병을 느리게 덧그린다.)
그거면 됐습니다.
지금의 제게는 이 생이 한 번 뿐이니까요.
(샴페인 잔이 놓여있을 법한, 조종실 안의 작은 테이블을 응시한다.)
마치 라티나에게 응답하듯, 작은 원형 테이블에는 딱 2개의 샴페인 잔이 놓여 있습니다.
라티나:(응답하듯 그 잔을 들어올려, 하나를 노아에게 쥐어 준다.)
노아:(샴페인 잔을 받아들고 가만히 빈 잔을 들여다보다가) 마지막 항해를 축하하는 건배를 해야겠네요.
(느리게 샴페인을 따고, 부드럽게 기울여 그의 잔을 채운다.)
금을 잘게 쪼개 넣은 것 같은, 기묘한 재질의 감로주가 잔에 채워집니다.
라티나:(이어 자신의 잔까지도 채우고 나면, 나란한 손에 두 금빛이 가득하다.)
아틀라스 호에서도 이런 식으로 건배를 한 적이 있었죠.
라티나:(별걸음이 닿을 곳을 향해서 말이야.)
노아:항해의 끝을 위하여. (입꼬리를 올리며 잔을 내민다)
라티나:(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잔을 내민다.)
노아.
그거 아십니까?
라티나:만나야 할 사람들은 언제고 반드시 만난다는 것을요. (고요한 우주만큼 담담한 목소리다.)
지금의 제게는 직접 경험한 당신과의 만남이 이 생 한 번 뿐입니다.
노아:... ... (시선을 떨궈 잔 안의 감로주를 바라본다.) 그럼, 우리가 도착할 곳에 한 가지 조건을 더 달아볼까 싶어요.
지구인의 수명으로 살아볼게요.
만나야 할 때가 오면, 또 만나게 되겠죠. 또 다른 라티나 그레이와, 또 다른 노아양이.
(후아, 하고 어깨를 떨어트리며 웃는다.) 갑자기 몇 십년 밖에 못 산다고 생각하니까 엄청 긴장되네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까?
(반듯하게 그를 바라본다.)
노아:...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고 해요.
실을 한 번 매듭지어야만 다음 시작이 있는 거니까요.
어디로 돌아갈 지 결정했어요?
(반 걸음, 가까이 거리를 좁힌다.)
유한한 생과 더불어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죽음은 인간을 무력감과 공허에 빠트리기 십상입니다. 지켜봐온 노아라면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겠죠.
하지만.
그렇기에 계절을 달리하여 피는 꽃은 아름답고, 이름모를 도전은 찬란하며, 뛰어드는 무모함은 사랑스럽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노아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에 앞서, 절망하지 않도록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라티나:...끝이 있다는 것은 꽤 근사한 일이거든요.
해피엔딩을 적어넣을 페이지가 존재하니까요.
(부드럽게 잔을 맞댄다.)
제가 태어난 곳으로 함께 돌아갈까요.
(이윽고 맞부딪힌 잔을 입가로 가져가면, 둥근 잔의 모양이 꼭 호선을 그린 입술처럼 얼굴 위로 흐른다.)
노아:...멋진 여행이었어요. 정말로. (망설임 없이 잔을 입가로 가져간다. 반물질같기도 하고, 액체같기도 한 감각.)
감로주를 머금고 삼키면, 입 안을 둥글게 도는 시원함이 온 몸으로 퍼져 나갑니다.
라티나:(그 시원함을 느끼며 느릿하게 목걸이를 빼낸다.)
(티켓을 낼 시간이야.)
어떻습니까.
잘은 몰라도, 제법 근사한 순간인 모양인데요.
오랫동안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시계를 빼냅니다.
티켓.
노아:영원히 기억에 남을 역사적인 순간이죠. (그 말에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태엽 반대편에 자리해 선다.)
라티나:(그 맞은편에 서서 천천히 홈을 향해 로켓을 가까이 한다.)
노아:(손을 겹쳐 누르면, 로켓이 홈에 딱 맞게 들어간다.)
회중시계가 들어가면, 톱니바퀴가 드르르륵, 하고...
돔 바깥에 촘촘히 박혀있던 별이 점점 뒤로 흐르기 시작하는 것은.
은하수를 통과하듯 바깥이 희뿌옇게 밝아집니다.
3차원도, 4차원도 아닌 듯한 어떤 날들을 건너.
그리고 두 사람의 우주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합니다.
불어올 리 없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날립니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유백색 허공에 서 있습니다.
딱딱하지도 흐르지도 않는 기이한 감촉의 바닥이 밟힙니다.
하지만 어쩐지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 쭉 나아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걸.
노아:천천히 걸어요. 길은 어디에나 놓여 있으니까요.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앞서서 한 발을 내딛고, 반 정도 뒤를 돌아 한 손을 내민다.)
라티나:(경계하듯 톡톡 앞을 밟아보다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힘주어 잡는다.)
...신기합니다.
빛과 색의 삼원색을 백만 번 겹쳐 쌓고, 온갖 조명과 필름을 다 가져와도 이 광경은 묘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뜨거운 항성의 명멸이 감미롭게 뺨에 내려앉고,
조용한 진동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발과 발 사이 부드럽게 엉기는 무중력이 마치 비단 같습니다.
공기조차 없을 우주 저편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람과 열기.
어느덧 시선이 닿는 곳에는 유리나 거울, 수면 같은 것들이 끝없이 한 줄로 늘어서 있습니다.
노아:시간의 조각들이에요. 들여다보면 우리가 지나가는 시간을 관찰할 수 있죠.
아까 전 그가 설명해주었던 곳을 표현한 듯, 화면 속에는 여러 풍경이 있습니다.
편집실에서 보았던 것보다 정교하고, 소란스럽지만 생동감 넘치는... ...
개중에는 라티나의 유년 시절도 들어 있습니다.
라티나:... ...(초등학생 같은 두 아이가 붉은 빛이 도는 갈색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한 켠으로는 화살촉을 찾겠다고 온 사막을 뒤지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는 여인도.)
강아지를 쓰다듬는 모습, 교복 차림의 라티나, 아주 어린 아기인 시절도 있는가 하면 라티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생이...
이렇게... 빛을 내면서.
노아:전부 실존했어요. 다른 형태를 했지만 같은 빛을 내는 당신이 있었죠.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는 소소한 점을 제외하면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날입니다.
오늘도 라티나는 평소처럼 등교했습니다. 도로시의 배웅을 받으면서요.
노아:(잠시 그 풍경 앞에 멈춰서더니, 라티나를 돌아본다.) 혹시 공범이 되어줄 수 있어요?
라티나:(그 풍경에 가만히 시선을 뺏겼다가, 그 말에 가만히 노아를 본다.)
...
물론이죠?
노아:(라티나의 대답이 떨어지자, 맞잡았던 손을 화면 안으로 집어넣는다.)
라티나:... ...(아, 작게 감탄이 인다.)
셋.
(강하게 밀어낸다.)
교실로 들어서던 라티나의 머리 위로 형광등이 낙하합니다.
라티나:(설마 설마 했지만. 어안이 벙벙해져 답지 않게 멍하게 서 있다.)
...
노아:... ...약간의 연출이 필요했어요. (살짝 어깨를 으쓱인다.)
라티나:... ...하...(아직도 신기한 듯 가만히 눈을 깜빡인다.)
노아:(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시간은 종이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거라... ...
우리가 같이 과거를 바꾼 셈이 되네요.
...
기적 같습니다.
노아:(그 말은 부정하지 않고 웃음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걸로 마지막이에요. 이제는 새로운 길을 만들게 될 테니까요.
그 순간, 라티나가 들은 바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노아:(걸음을 잠시 멈추고 허공을 바라본다. 의아했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진다.)
네. 이게 제 답입니다.
그가 대답하자, 한 순간에 스크린들이 물결치며 넓은 길을 만들어냅니다.
...
네.
물론입니다.
우리는 절망으로 태어나 얼음에 파묻혀 죽더라도 세상에 이토록 색채가 많은 까닭을 알아서,
증거도 해설도 필요치 아니한 애정, 시간은 속일 수 없고.
그 밖의 아무 소용 없는 나약한 것들은 전부 멎은 우주를
미련한 여행, 횡포 같은 관여, 불시착한 우주먼지같은 시간여행자의 끝 없는 여행을 함께한 당신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데 얽혀, 본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처럼 하나의 모양을 구성한 시간의 흐름이 여기 있습니다.
그 가운데 돌출될 만한 사건은 찾을 수 없으며
남은 시간을 채우는 방법이라고는 좁은 길을 따라 걷는 게 전부인데
절벽 끝에서 삭풍으로 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일 때라도
어둠 다음의 어두움으로, 혹성 저편의 성운으로, 마찰 없는 진공으로 뛰어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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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0 : 라디오 전파는 끝없이 우주를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