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겨울이 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얗게 부서지는 것은 숨일까요, 혹은 절망일까요?
둔중한 의식 속에 남은 하나의 명제를 되새깁니다.
mool (GM):
환한 빛이 망막을 투과하자 익숙한 대피소 내부가 보입니다.
곧 차가운 기온이 노아의 피부에 내려 앉습니다.
노아 양 :(일어나자마자 끄응, 소리를 내며 쭉 기지개를 켰다가...곧장 피부에 닿는 찬 기온에 으. 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침대 옆에 걸어놓은 겉옷을 걸친다.)
(몇 시지... ...하고 두리번 거리는 중.)
기지개를 펴며 꾹 감았던 눈을 깜빡이고 겉옷을 걸치면, 침대 옆 탁상에 놓인 전자시계가 보입니다.
노아 양 :(항상 비슷한 시간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뒤로 모아서 묶고 방을 나선다.)
어쩐지 예전보다 더 부스스한 것 같은 머리를 대충 모아 묶습니다.
방을 나서려던 노아의 발치에 무언가가 툭 걸립니다.
시선을 따라 노아와 라티나가 만들어낸 조약하지만 가득 찬 공간이 보입니다.
노아 양 :아얏. (아프지는 않지만 습관적으로 감탄사를 냈다가...바닥에 늘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주우며 라티나가 사용하는 쪽의 공간을 훑어본다.)
탁자에서 떨어져 있는 책들과 커피 자국이 남은 컵이 보이고...
읽고 있던 것인지 펼쳐져있는 책 등이 보입니다.
문득, 오래 잠들어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눈꺼풀이 무겁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아 양 :(물건들로 길이 나 있잖아...? 기묘하게 늘어진 물건들을 감탄하며 차곡차곡 모아 협탁 위에 올려두고, 묘한 무거움에 눈을 한 번 비빈다.)
컨디션이 안 좋나... ...
(그러는 김에 무슨 책을 읽고 있었으려나...하고 들여다보는 중.)
제법 멋진 선로를 차곡차곡 모으다가, 책을 들여다봅니다.
라티나가 돌아오기 전에 물건들이 만들어낸 선로를 정리하거나, 방을 나서는 것도 좋겠습니다.
전자라면... 나름대로 칭찬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노아 양 :이 책을 좋아하네. (지난 번에도 몇 번 읽는 걸 본 것 같았는데...)
(앗 칭찬)
(주섬주섬 남은 물건들도 줍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청소했다고 생색내기 딱 좋네요~ 기록실이 너저분한 건 일이라 어쩔 수 없지만~ (흥얼거리면서 열 맞춰서 진열한다)
자, 열을 맞춰 책을 정리하고 나면 다음 타겟은 어디일까...
유리창 밖
,
탁자
,
냉장고
,
바깥의 현관
이 보입니다.
노아 양 :(유리창 바깥을 내다본다. 오늘은 나갈 수 있는 날씨려나? 아무래도 겨울이라 한들 다 같은 겨울이 아니니까...)
곧 하늘인 것처럼 눈은 지평선도 되고 수평선도 되는 것 같습니다.
나갈 수 있는 날씨인지 가늠하고자 창에 손을 대어 본다면,
노아 양 :설마... ... (아마 나가면 나간다고 메모라도 남겼을텐데. 진짜 그랬으려나? 하는 생각에 탁자를 확인해본다.)
노아 양 :바깥은 아닌가. (세탁이 끝난 옷들인가? 한 데에 얼기설기 뭉쳐져 있는 옷들을 집어다가 반듯하게 개기 시작한다)
얼기설기 뭉쳐져 있는 제군들을 잘 집어 개다보면, 문득 라티나의 옷 주머니가 볼록한 것이 보입니다.
노아 양 :아, 또 안 빼놓고. (이런 말을 하면...으레 라티나가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라고 응수했던 것이 떠오른다...)
(어쨌든 안 빼놓고...라고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주머니에 든 것들을 탈탈 털어놓는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습니다.
탈탈, 옷을 털면 작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물건이 하나 둘 떨어집니다.
발굴이라도 한 것처럼 제각각의 물건들이 탁자 위에 모여 있네요.
노아 양 :단추...돌...? 쇠붙이... (이건 대체 어디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떨어진 무선 전파기기를 건드려본다. 망가진건가?)
바깥을 돌아다니며 모은 물건일까요? 적어도 별다를 것은 없어보입니다. 전파 기기를 제외한다면요.
전파기기를 건드리자 정사각형의 화면에 녹색 레이더가 떠오릅니다.
망가지지는 않은 것 같지만, 신호가 잡히지도 않네요.
노아 양 :헉, (작동하네...이건 가져다 줘야겠다. 겉옷 주머니에 전파기기를 넣어둔다)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작게 덧붙인 말 끝에 까끌한 생각이 따라옵니다.
노아 양 :(남은 잡동사니는 동그랗게 잘 모아두고, 냉장고로 시선을 옮긴다)
[지구 주변을 이루고 있는 우주 상공 주파수를 미세하게...]
[감지...보낸 신호를 지구의 언어로 변형해 송출...]
노아 양 :우주 상공 주파수를 미세하게 감지... ...변형해 송출... ...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요즘 이런 걸 하고 있구나. 메모를 손 끝으로 훑어보다가 그만두곤 냉장고를 열어본다.)
메모 위의 반듯한 필체를 뒤로 하고 냉장고를 열어봅니다.
방 안에 마련되어 있는 냉장고는 실상 쓸모 없는 제품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라티나는 방 안에 냉장고를 가져다 두었습니다. 무슨 고집인지는 몰라도.
노아 양 :왠지 냉장고라는 것만으로 차갑게 느껴진단 말이죠. 사실은 냉장고 속 온도가 더 따뜻하겠지만. (텅 빈 냉장고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문득 생각한다. 가전제품 같은 걸 좋아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곧 냉장고 문을 닫는다.)
으으, 아침부터 나가려면 각오가 필요한데. (협탁에 놓인 안경을 찾아 쓰고, 목도리를 둘둘 두르고서야 현관 문을 연다.)
정리도 좋지만, 역시 어디를 간 건지 찾아봐야겠습니다.
차갑게 식은 안경을 쓰고 푸른색 목도리를 둘둘 두릅니다.
라티나와 노아의 신발이 놓인 협소한 현관 문을 엽니다.
문을 열자마자 살을 저미는 것 같은 추위가 온몸을 감쌉니다.
사람이 살아남을 수 없게 만들겠다는 듯 차기만 합니다.
노아 양 :(우와아, 하고 자동으로 감탄사가 나오려는 걸 입을 다물고 참는다. 입 안이 순식간에 얼어버린단 말이지...)
(눈을 가늘게 감았던 것도 잠시, 금방 옷을 여미고 주변을 둘러본다.)
입을 꼭 다물고 야무지게 옷을 여밉니다. 추위에 질 수는 없죠.
노아 양 :
관찰력
기준치: |
80/40/16 |
굴림: |
15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멀리 보이는 흰 풍경 사이로 뭔가 작게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눈에 띄는 색을 가지는 피사체가 아님에도 말이죠.
노아 양 :(저기까지 나갔나...? 조금만 시야를 비틀어도 흰 눈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다. 목표를 정하고 나면,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곧장 그쪽으로 발을 옮긴다.)
마음 속으로 깃발을 꽂은 장소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발을 옮깁니다.
...분명 마음가짐에는 망설임이 없는데, 푹푹 들어가는 눈이 꽤 고집스럽습니다.
노아 양 :(뭐...뭐라고 하는 거지? 목도리에 반쯤 얼굴을 파묻기도 했거니와,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일단 애써 귀를 기울여본다.)
어쩐지 빡빡한 눈에 깊이 들어간 발마저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라티나 그레이:혼자서 외출하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ㄲ...!
까지 들렸는데, 그대로 발이 걸렸는지 눈 위로 넘어지고 맙니다.
.......
(라티나가 넘어지는 것을 보면 푹푹 눈을 밟고 손을 휘적인다) 괜찮아요!?
눈속에 파묻힌 회색 덩어리를 일으키러 나아갈 수 있을지...민첩 판정입니다.
노아 양 :
민첩
기준치: |
60/30/12 |
굴림: |
3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발목을 잡는 눈을 털어내고 라티나의 앞에 도달하는 것에 성공합니다.
라티나 그레이:(뭐라고 계속 웅얼거리고 있는데 눈에 파묻혀서 안 들린다.)
노아 양 :그러게 왜 눈 밭에서 화를 내고 그래요... (웅얼거리는 회색 덩어리를 들어서 탈탈 털어 사람꼴 만들어본다)
일어났는데 없길래...
라티나 그레이:곧 돌아올 거였습니다. (부스스 들려서 탈탈 털린다. 눈사람에서 ㄴ사람정도가 된다.)
전망대에 다녀온 거였어요. (눈을 가늘게 뜨고 노아의 목도리를 아주 든든탄탄하게 고쳐 매 준다.)
노아 양 :만에 하나 조난이라도 당했을지 모르니까요. (목도리가 단단하게 고쳐 매지면...아주 똘똘 감긴 모양이 됐다. 목소리가 약간 웅얼거린다.) 메모라도 남겼으려나 했는데 그렇지도 않아서.
역시 형광색 옷을 가져왔어야 했던 것 같아요.
라티나 그레이:(목도리 끝을 잡고 뽀득뽀득 대피소를 향해 나란히 걷는다.) 이제는 이 장소도 익숙해졌는걸요.
조난을 당한다면 열심히 소리라도 질러 보죠, 뭐.
...형광색 강아지 옷이라면 전에 입기 싫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노아 양 :왜냐면...그건 강아지 옷이었으니까요. 제 장갑보다도 작다구요.
애초에 형광색으로 사람 옷을 잘 만들지도 않겠지만, 소방용 비옷이나... (중얼중얼거리면서 챙겨왔던 무선 전파기기를 내민다) 이것도 라티나 거죠?
라티나 그레이:(대충 같은 강아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슥 시선을 건넨다. 전파기기를 받아든다.)
역시 주머니에 계속 넣어두는 편이 잃어버릴 일이 없네요. 가져다주는 분도 계시고.
(의미없이 기기의 버튼을 몇 번 눌러본다.)
노아 양 :이제 라티나가 저보다 물건을 자주 두고 가는 것 같아요. 전 이제 잃어버릴 물건이 없거든요. (제법 당당하게 말한다)
그건 어디에 쓰려고 가지고 온 거에요?
라티나 그레이:흐음. (눈을 가늘게 뜨고 본다.)
반대로 전부 잃어버렸단 말 아닙니까?
이건...
설명서에 따르면 우주 상공의 주파수를 감지할 수 있다더군요.
노아 양 :냉장고에 붙어 있던 그거군요. (성과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는다. 신호가 있으면 으레 말해주겠거니, 하고.)
다음엔 자석을 좀 더 찾아볼까봐요. 냉장고에 이것저것 붙여놓기 좋잖아요.
라티나 그레이:좋죠. 가능하면 강아지 모양이 좋겠습니다. (전파기기는 그대로 주머니에 넣는다.)
그래서, 오늘은 뭘 촬영할 계획이십니까?
최후의 감독님.
노아 양 :(호칭에 하하, 하며 짧게 웃더니) 평소처럼 식물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고, 날짜를 기록하고...전망대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나요? 괜찮으면 그 쪽에 가 보는 것도 좋겠어요.
최후의 관객이자 배우이자 평론가이자...뭐 그런.
라티나 그레이:전망대는 평소와 같았습니다. 절반 넘게 눈에 파묻혀 버렸지만, 망가진 곳은 없었죠. (돌아가면 식물에 물을 주고, 라벨에 날짜를 기록하게 되려나. 처음에는 낯설었던 그의 렌즈도 이제는 익숙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천천히 망가지고 마니까.) 그럼, 오후에 전망대를 갈까요.
냉장고 구석에 아껴둔 술도 가지고. (잔을 드는 시늉을 해보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노아 양 :아, 다행이네요. 멀리 가기는 힘드니까 그렇게라도 해야죠. (전망대의 안부가 나쁘지 않자 반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진 말에 목도리에 입을 묻은 채 작게 웃는 소리를 낸다.) 전망대의 무사를 기원하며?
라티나 그레이:(목도리를 아래로 걷은 채 길고 흰 숨을 쉰다. 장난스레 눈썹 한 쪽을 올린다.) 더불어 지구 최후의 인류들까지요.
대피소 전망대는 대피소와 조금 떨어져 있는 건물체입니다.
생존 인류를 태운 마지막 우주선이 지구의 중력을 이겨내고, 도착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우주로 날아 간 날이.
전망대는 최후의 방주에 타지 못한 잔류된 인구가 우주로 향하는 우주선을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저 멀리로 사라져 점이 되는 [가능성]을 목도해야 했던 장소였습니다.
노아 양 :(
정말 미안합니다. 더는 자리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던 승조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애초에 보지 않았던 것도 같고...하지만 가능성과 길이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라서, 이때까지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음에도 아직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다.) 조금 더 짧게는
우리들을 위하는 건배군요.
라티나 그레이:(울며 몇 번이고 사과하던 승조원을 기억하고 있다. 방주는 무한하지 않았기에 살릴 수 있는 생명을 가늠해야 했고, 추락 직전의 한계선까지 생명을 태운 요람은 우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표정을 살피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음에도. 하지만 분명 가능성과 길이라는 것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녹색 렌즈 너머의 사내가 그리 말하고 있었으므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차갑고 단단한 심장을 다시 갈무리해야 한다.) ...
누가 감독 아니랄까 봐.
(담담히 중얼거리고 목도리에 입을 묻는다.)
그러나 산 것은 가능성과 길을 찾을 수 있기에.
우주선에 탄 채 새로운 지구,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나선 인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노아 양 :제목을 그걸로 할까요? 우리들을 위하여 건배. (농담처럼 말을 뱉고는 고개를 조금 빼서 안경에 서린 김을 지우며 대피소로 걸음을 재촉한다. 한 때는 매일같이 우주선을 기다린 적도 있었지.)
라티나 그레이:자꾸 그렇게 말씀하시니 옮나 봅니다. 저도 이것저것 제목을 붙여본다니까요. (폭폭, 들어가는 눈을 가로질러 열심히 걸음을 옮긴다. 함께 전망대 위에 올라 밝아지고 꺼지는 하늘만을 바라보던 날도 있었다. 어땠더라, 결국 둘 다 심한 감기에 걸려 골골댔던가.)
노아 양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제목을 짓고나면 뭐라도 만들게 되거든요. 전망대 하니까 그것도 생각나요. 왜, 대피소를 제대로 꾸리기 전에...거의 하루종일 전망대에만 있었잖아요.
라티나가 술이 있으면 체온이 좀 오른대서 무슨 알코올 중독자처럼 남은 잔에 브랜디를 따라 마시기만 반복했는데... ...
정신만 혼미해지고 열병이랑 술병이 같이 오면 호되게 앓는다는 것만 알았죠. (아마도 그 때 처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서 웃으며 대피소의 문을 밀어 연다. 고작 그런 이유로.)
라티나 그레이:(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한다.) 나름 증명된 거였습니다. ...어디 책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노아 양 :러시아 소설이었을지도 몰라요. 사냥꾼들이 곰을 잡으러 갔다가 그런 짓을 많이 하잖아요...
... ...가끔 보면 좀 저를...
쉽게 간파하시는 것 같아 수상합니다.
(자기 얼굴 몇 번 짚어본다. 글씨라도 써 있나.)
노아 양 :... ... (나 어쩌면 학교 시험을 푸는 것보다 찍는 게 더 나았을지도,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제 능력에 소름이 돋아요... (대피소로 들어서면 라티나의 옷에 아직도 묻어있는 눈을 탈탈탈 털어준다)
라티나 그레이:저도 노아가 떨어진 물건을 줍다 보면 소름이 좀 돋긴 하죠. (이제는 그마저도 남지 않았을까. 등도 맡기고 팔도 맡기며 눈 털기 서비스를 제대로 받는다.)
숙여 보십시오. (머리를 털어주려는 듯 손을 뻗는다.)
노아 양 :...저 최근에도 잃어버린 게 그렇게 많나요...? (변명을 하다 말고 허리를 제법 수그린다)
라티나 그레이:무슨 물건인지 모른다는 점마저 노아 답습니다. (머리와 어깨에 묻은 눈을 툭툭 털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앞머리를 양 쪽으로 넘겨 정리해본다.)
예전에는 이랬던 것 같은데요.
(다시 앞머리를 탈탈 털어 내린다.)
이제는 이 모습이 더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노아 양 :(양 쪽으로 트인 시야에 잠깐 웃는다) 그러고보니 그랬었죠. 아무래도 머리가 항상 부스스해서... ...내려온 걸 그냥 뒀더니 이대로 자리 잡아 버렸어요. 지내다보니까 편하더라고요.
라티나 그레이:(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웃는 얼굴을 가만 바라본다. 작은 일에도 자주 웃고 마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 때로는 고작 그런 이유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
(별다른 말 없이 앞머리에서 손을 거두고 후드를 벗겨 준다.)
(제 후드를 벗고 목도리를 풀다가, 문득 집 안의 풍경에 눈을 깜빡인다.)
...
청소하셨습니까?
노아 양 :(그제서야 생각난 듯 뒤늦게 짜잔, 하듯이 방을 가리킨다) 라티나가 떨어트린 것도 다 줍고, 옷도 정리하고,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도 잘 모아놨어요.
라티나 그레이:(평소라면 칭찬을 했겠지만 좀 장난이 치고 싶은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러셨군요. (달랑 이것만 말해본다.)
노아 양 :(앗...하는 표정) ... ... ... ...
... ... ... ...
... ... (결국 못참고 말한다) ...더 없나요?
노아 양 :...청소... ... (잠시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공용 공간을 치우는 건 별로 칭찬 받을 일이 아니지 않나? 그야 당연히 본 사람이 치우는 게 당연...그렇구나...지금까지 라티나가 관대하게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힘썼던 걸지도...)
...아닙니다...
라티나 그레이:(한 쪽 눈썹을 들어올리고 힐끗 보다가 팔을 두어 번 토닥이며 냉장고 앞으로 간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청소도 하시고.
용감하게 바깥도 나오시고.
(냉장고 안에서 작은 물병을 꺼내 까득 연다. 가볍게 목을 축이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굿 보이.
(물병을 건넨다.)
노아 양 :...저를 시험하셨던 건가요...? (그렇지만
굿 보이도 나쁘지 않은지 물병을 받아 몇 모금으로 목을 축인다.)
라티나 그레이:좀.. 그런 면을 자극하는 편이십니다.
라티나 그레이:많이. (고개를 끄덕이고 진열된 책장의 책을 더듬는다.)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책의 제목은 제각각입니다.
인류가 멸망을 선언하기 전 쏟아져 나온 수십권의 생존과 우주, 그리고 새로운 행성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책들을...둘은 지구에 남은 이후 참 많이도 읽었습니다.
어쩌면 남겨진 책들이 이것밖에 없어서일지도 모릅니다.
노아 양 :(책장이 닳을 정도로 읽었지. 근처에 도서관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제법 오래 전에 많은 책들이 땔감으로 쓰였고, 그나마 남은 국립 기록보관소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멸망은 인간이 문명을 추억할 틈을 만들어주지 않았죠.
노아 양 :(목도리만 풀어서 벽에 걸어두고, 잠시 생각한다. 하다못해 위성이라도 살아있었으면 데이터베이스를 다운받을 수 있었을텐데. 못내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 언젠가 이 도시를 제대로 나갈 수 있게 되면, 여가를 보낼 물건들을 먼저 찾아봐야지...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조금 길게 멍을 때리는 것처럼 보인다)
라티나 그레이:(손을 들어올리더니 딱,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낸다.)
아직 브랜디는 따라드린 적이 없는데, 오늘 좀 멍하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문득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본다.)
(풍경은 온통 희다. 하얀 풍경은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도화지 같다가도 끝없는 허무를 그려낸 작품 같았다.)
노아 양 :(생각의 정적을 뚫고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아. 잠깐 도서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라티나가 바라보는 시선을 천천히 따라가더니 몇 초 쯤 뒤에 묻는다) 라티나는요?
...그냥요. (짙은 속눈썹 아래로 바다빛 눈동자가 물결없이 자리한다.)
새삼스럽게, 우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남지 않았구나 생각했을 뿐입니다.
노아 양 :어릴 때는 종종 상상했었는데 말이죠.
갑자기 지구에 사람들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되면 뭘 할까, 하는 것들이요.
라티나 그레이:(고요하게 잠겨 있던 눈동자가 흥미로운 듯 힐끗 노아를 향한다.)
무엇이었습니까?
노아 양 :저는 사람 없는 시외도로를 끝없이 걷는 거요.
조금 생뚱맞긴 하지만...사람이 없다는 걸 가장 체감하기 좋을 것 같았거든요.
설마 그 시외도로가 전부 눈에 막힐 줄은 몰랐죠. 제 상상 속의 텅 빈 지구는 항상 봄 아니면 가을이었으니까.
라티나 그레이:멸망이라는 단어에 낭만을 좀 섞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습니다.
하지만... 텅 빈 시외도로를 걷는 건 제법 좋을 것 같네요.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노아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을까요.
노아 양 :물론이죠. 지금은 메모리를 최대한 아끼고 있긴 하지만...만약 갈 수 있는 곳이 많았다면 더 많은 것을 찍었을 거에요.
언젠가 눈이 녹으면 다른 곳도 가 봐야죠.
언젠가의 미래를 기약하는 두 사람의 시선 끝에 여전한 풍경이 잡힙니다.
함께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떠올립니다.
우리는 얼어붙은 행성에 남은 지구 최후의 인류라는 것을.
밀폐된 음식으로 가볍게 끼니를 해결하고 나면,
라티나 그레이:냉동 수면실 안의 동면 기기를 확인하러 갈까 합니다.
달가운 장소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같이 가 보시겠습니까?
우주선에는 타지 못했지만 최후까지 지구에 남았던 사람들이 세운 이 대피소는 약 2천여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택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지만 남은 인구 중 소수는 동면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지구를 떠났던 생존 인구가 다시 이 행성에 돌아 와 남은 사람들을 전부 데려 갈 그 날을 위해 잠든 사람들.
대피소 지하에 누워있지만 마치 관 속에 들어간 것과 다름 없는 모습이라는 사실까지.
그들을 우리 둘과 함께 [생존한] 인류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노아 양 :(죽음 아닌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곳. 어쩌면
진짜 최후의 인류가 될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인류가 마지막을 준비하는 처절한 모습이 그려져서 속이 울렁거린다. 그러나 라티나의 제안에는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같이 갈게요.
그 처절함에 속 깊은 곳이 느리게 뒤틀리는 것이 느껴지지만, 고개를 끄덕입니다.
(담담히 손을 내민다.)
노아 양 :친절하시네요. (작게 웃으며 다가온 손을 잡는다. 피한다 한들 피해지는 게 아닌 것도 있는 법이지.)
라티나 그레이:누구만 할까요. (가볍게 응수하며 잡은 손을 이끈다.)
방을 나서 냉동수면실로 향하는 동안, 복도에 난 창으로 흰 풍경이 빛납니다.
그 때까지 그들을 돌보고, 깨워 희망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기에 제가 관리자가 된 것이었죠.
떠난 우주선도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어느새 냉동수면실 앞에 멈춰서서 가만히 노아를 본다.)
노아 양 :라티나는 지구에 남은 가장 실력이 좋은 엔지니어이기도 했고요. (상냥하게 묻는 듯한 표정이 이쪽을 향하면, 별 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올려보인다.)
라티나 그레이:그럼요? 이런 인재를 두고 간 것을 분명 후회할 겁니다. (장난스레 도도하게 머리를 넘겨보인다.)
매달려도 한 번에 안 받아줄 생각입니다.
...그래도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은 고향을 잊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저는 그걸 보고 싶습니다.
라티나와 노아를 남겨두고 지구를 떠난 사람들이 그 둘을,
혹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
남아 있는 인류를 데리러 올 거라는 사실을요.
그 기다림은 분명 외로웠을테지만 라티나의 옆에는 노아가 있습니다.
라티나가 가지고 있던 관리자 인식증을 문에 갖다 대자 기계음이 들립니다.
라티나를 제외하고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은 오랜만일지도요.
문 위의 사각형 버저 아래로 N-02 [냉동수면실]이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노아는 라티나를 따라 냉동 수면실 안으로 들어섭니다.
고작 한 사람이 누울 정도로 좁은 동면 캡슐 6대가 누워있습니다.
노아 양 :(아주 오랫동안 두어사람의 목소리만을 새기며 살다 보면, 인조적인 기계음조차 놀라울 정도로 생경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캡슐을 바라보는 동안 살짝 숨을 삼킨다)
라티나 그레이:조금 추울 겁니다. 못 견디겠다면 말씀하시고요. (노아 쪽을 바라보다가 첫 번째 동면기기 위로 몸을 숙인다.)
곧 라티나는 동면 기기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기 시작합니다.
기기 안에서 잠든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어떠한지 ….
노아 양 :
지능
기준치: |
80/40/16 |
굴림: |
1 |
판정결과: |
대성공 |
?
(똑똒)
이상한 일입니다. 어쩐지 또렷한 확신이 들어요.
동면실 안은 대피소 내부와 비슷하게 디자인 되어 있습니다.
합판 재질로 만든 벽과 옅은 베이지색 블럭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다 알 것 같은 친숙한 느낌이에요.
라티나는 동면 기기를 조작하며 상태를 체크하고 있습니다.
동면 캡슐
,
자료 보관함
,
프로젝트 화면
,
철제 문
이 보입니다.
노아 양 :(그닥 좋아하는 공간은 아니라서 자주 오지 않았는데...어째 친숙한 기분이 드는 것이 이상하다. 라티나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동면 캡슐을 같이 들여다 본다. 내가 본다 한들 체크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의지가 될 지는, 모를 일이죠.
1명이 누우면 머리 끝 부터 발끝 까지 모두 채워질 것 같은 크기를 가진 캡슐은 매우 협소해보입니다.
조금만 몸을 뒤척이면 캡슐 뚜껑에 이마를 부딪힐 것 같은 높이지만...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캡슐 뚜껑으로 동면하는 인간의 얼굴이 보입니다.
슬쩍 바라 본 동면 인간은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 양 :(아, 그래. 저 얼굴이... ...볼 때마다 기묘하다. 아마도 기록실 어딘가에는 동면 희망자들의 인터뷰 영상도 있을텐데, 한 번도 꺼내 본 적은 없다. 자멸을 준비하는 인간 같은 것을 누가 보고 싶겠냐마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쾌적하고 크지는 않네요.
젤리가 들어있지도 않고...
라티나 그레이:최소한의 자원밖에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저 일을 하는 것처럼 덤덤한 표정이다. 푸른 빛이 감도는 유리 위로 떠오른 패널을 조작하다가, 마지막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본다.)
말해두지만 외계생물 침공에 대비한 수면-공격시스템 같은 것도 없습니다.
노아 양 :일어났을 때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평범한 시설이라니, 하고요. 동면 시설이라고 하면 T사의 화성탐사시스템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텐데... (지나다니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프로젝트 화면을 바라본다.)
라티나 그레이:수가 많지 않으니 실망의 갯수도 많지 않겠죠. 뭐, 깨어날 때까지 어떻게 잘 꾸며내어 말할지 고민할까요. (어깨를 으쓱이곤 화면을 닫는다.)
프로젝트 화면에는 둥근 지구의 현재 모습이 보입니다.
얼어 붙은 지구는 유일한 파란색을 잃고 눈으로 덮여있습니다.
지구 내 생명활동 감지를 나타내는 불빛은 모두 꺼져 있습니다.
(리모컨을 집어든다.)
이렇게 하면 반대편이 보입니다.
둥근 리모컨을 반대로 돌리자 지구 반대편이 나타납니다.
노아 양 :빙하기 같아서 신기해요. (라티나가 조작하는 것을 보며 우와, 하는 감탄사를 낸다)
라티나 그레이:아이스에이지에 떨어진 동물이라도 된 기분이죠. (리모컨을 쥐어준다.)
화면은 지구 반대편까지 돌아갔지만,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어떤 생명도 없습니다.
참담할 만큼 차가운 온도와 얼어붙은 땅과 바다만 존재 할 뿐입니다.
노아 양 :매머드였다면 추위에 떨 일은 없었을까요? (대륙을 거의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뒤덮힌 지구를 본다. 리모컨을 조작하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지구 반대편이라는 것도 몰랐을지도.) 이건...생명 활동이 일어나면 곧장 신호를 감지하나요?
라티나 그레이:털가죽이 조금 부럽긴 합니다. (여전히 미동이 없는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인다.) 아마도요. 지금까지는 그런 경험이 없었지만.
일터 견학은 좀 흥미로우십니까?
노아 양 :네. 같이 오니까 이것저것 들을 수 있어서 좋네요. (기왕 온 김에?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료 보관함을 가리킨다) 저기엔 뭐가 들어있어요?
라티나 그레이:(있지도 않은 안경을 고쳐 쓰는 시늉을 하며 큐레이터처럼 자료 보관함 쪽으로 안내하듯 손짓을 한다.) 네, 우측으로 보이는 것이 자료 보관함인데요.
지구에 남아있는 마지막 역사라고 제목을 붙이고 싶습니다. ...아, 또 노아처럼 제목을 붙이고.
과학과 우주에 관련 된 연구자료 부터 출간 된 책까지.
라티나 그레이:관심 가는 것이 있으시다면 살펴봐도 좋겠습니다.
노아 양 :재미 들리면 못 멈춘다니까요, 그거. (쌓여있는 자료들에 감탄한다) 와, 정말 많네요. 이거...책 대신 읽어도 되겠어요.
(우주의 확장에 대해 쓰인 책과 우주선 구조에 대한 과학 취미 잡지들을 몇 가지 챙긴다)
이거 빌려가도 되나요?
라티나 그레이:그 책들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고개를 까딱인다.)
노아 양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는 걸로 가져가야겠지...? 생각하며 책을 팔락팔락 뒤적인다)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펼치자 '생명의 자손' 이라는 투박한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인간이 별의 죽음으로부터 탄생된 존재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억년동안 반복된 별들의 죽음이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시행된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소수의 학자들은 인간이 태초의 우주 그 자체에서부터 존재한 미약한 생명체로부터 진화한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
자료 대부분은 전문적인 단어와 발췌, 타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로 되어 있습니다.
추가로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과학 판정이 가능합니다.
과학(통합) Roll
기준치: |
1/0/0 |
굴림: |
62 |
판정결과: |
실패 |
(택도없어)
이건 흥미롭네요. 뭐랄까... ...
광범위한 인식에서의 진화론... ... ...
...이런 시대에 살 줄 알았으면 진즉에 과학 공부도 좀 해 놓는 거였는데 말이죠.
노아 양 :(제 분수에 맞지 않는 책 몇 권을 내려두고...재밌어 보이는 것만 다시 챙겼다)
라티나 그레이:(반납된 도서들 차곡 정리한다.) 공부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니 이 참에 시도해보시는 것도.
노아가 챙긴 책 몇 권 사이로 종이 한 장이 팔랑 떨어집니다.
안내서 앞에 표시되어 있는 동면 기기는 노아가 방금 본 것과 같아 보입니다.
노아 양 :아, 팜플렛...아니, 안내서 같은 게. (떨어진 종이를 주워본다)
[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 인간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로 시작되는 설명서입니다.
기기 장치를 다루는 방법과 긴급 상황시 대처 방법등이 적혀 있습니다.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온도에 얼어붙은 채 잠들어 있는 인간은 이런 모양이죠.
동면 기기는 지구에 남은 인류를 위해 개발되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추위와 병, 배고픔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동면 기기의 사용을 원했을 것이고
그들은 이 멸망한 행성을 떠나거나, 다시 살아 갈 그 날을 위해 죽음 대신 잠을 선택했죠.
동면 기기의 최적 작동 유효 기간은 약 400년.
라티나가 더 이상 동면 기기를 관리하지 못한다면 잠든 인류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런 생각과 함께 흐르는 시선 끝에 동면 기기 한 대가 잡힙니다.
문득 노아가 들여다 본 동면 캡슐 속 인간의 이름은 '제니(Jennie)' 입니다.
노아 양 :(잠시 기분이 아득해진다. 그 때가 되면... ... ...결국 마지막에는 둘 중 하나만 남는 건가? 그야 그렇겠지, 동시에...) (그 쯤에서 생각을 뚝 끊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름도 붙어있군요.
사람들이 동면에서 깨어났을 때 제대로 불러줄 수 있겠네요.
라티나 그레이:(가장 안쪽의 동면 기기를 조작하며 눈을 깜빡인다. 제니. 이 사람은 무엇을 꿈꾸며 이 안에서 잠들었던 것일까?)
...
어쩌면 그것을 위해서 적혀 있는 이름인가 봅니다.
노아.
저는 우리가 동면을 택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잖아요.
노아 양 :(라티나의 말에 고개를 들고 잠시 생각한다.
살아있는 사람.)
(입을 벌렸다 다물기를 몇 번 반복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이 사람들이겠죠?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사라지면 이 사람들도 전부 죽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의 존재 의의는 우리가 아니라 여기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일까요
(여기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일까요?) ... ...네.
(그래도 가끔은 눈이 녹은 지구에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눈을 뜨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그런 생각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라티나에게 고마워 할 거에요.
그리고 이런 작업을 라티나가 혼자 하는 건 아주 심심한 일이니까, 같이 남기로 한 제 선택도 잘한 거겠죠. (느지막히 명패에서 시선을 뗀다)
라티나 그레이:(오랜 시간 함께 지내 온 이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 소중하고도 슬픈 일이다.)
(입 밖으로 꺼내어 털어놓는 것보다 마음 속으로 갈무리해 개어놓는 것이 더 많은 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좋았을까. 멍울이 져 쌓여가는 질문을 건네지 못하고 웃어버리고 마는 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면 보다 나았을까. 동면을 택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을 여유가 제게는 없었다. 그저 확신을 주고 싶었다. 잠들지 않고 언 세계를 살아가는 당신과 나에게 가지 못한 길을 향한 불안을 더해주기는 싫었으니까.)
(후회하기에는 이미 너무 깊은 눈이 쌓여 있어.)
(그러니 믿을 뿐이다.)
덕분에 일일 큐레이터도 해 보고요. 딱히 행복한 풍경은 아니지만 카메라를 챙겨 오라고 말씀드릴 걸 그랬나요? (아니면 챙기셨나. 고개를 기울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잘 한 선택입니다.
라티나 그레이:라티나 그레이의 보증은 아무 때나 주지 않는다고요. (머리를 가볍게 넘긴다.)
노아 양 :어라, 그래요? 꽤 자주 본 것 같은데. (가볍게 웃음 소리를 내며, 챙긴 자료들을 옆구리에 끼고 철제 문으로 향한다) 출구가 이쪽...
라티나 그레이:................아니거든요. (뚱하게 대답하곤 철제 문 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본다.)
아뇨, 거긴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출구는 저 쪽이에요.
노아 양 :출입 금지 구역이 있어요?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끔벅인다)
라티나 그레이:대피소에서 사용되었던 내부 통제실인데, 출입 할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죽었거든요. (생경하다는 반응에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산소도 온도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AI 들이 인간의 출입을 모두 통제해 둔 상태입니다.
(자신의 인식증을 가까이 댄다.)
붉은 불빛이 몇 번 깜박이더니 동면실에 출입했을 때 들었던 목소리와 같은 음성이 들립니다.
라티나의 말대로 이곳은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이 아닌 듯 합니다.
노아 양 :...아. 그렇군요. (관리자라고 해도 모든 권한을 받은 게 아니구나.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본다.) 비밀의 방 같아서 좋네요. 언제나 미지의 공간이 하나 정도는 남아있는 거잖아요.
라티나 그레이:비밀의 방이라. 뱀이라도 나오면 노아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으려나요?
노아 양 :아, 하지만 뱀이라고 들으니까 뱀 이상의 것이 나와야 놀랄 것 같아요...
라티나 그레이:외계인이라도 잡아둬야겠습니다. 싱싱한 걸로.
그럼 슬슬 견학을 마칠까요?
추운 장소니 오래 있으면 몸에 무리가 갈 테고요.
노아 양 :(추운 장소라는 말을 듣자마자...온 몸에 한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 잠깐 어깨를 떤다) 아아...잊고 있었어요...이래서 집중하면 안좋은데...라티나는 겉옷까지 벗었는데 안 춥나요? (이번에는 제대로 바른 출구로 향한다)
라티나 그레이:저는 튼튼하니까요. (한 쪽 팔을 들어 근육을 과시하는 포즈 한다.)
(출구로 향하며 동면실의 전원을 하나씩 끈다.)
노아 양 :저도 제법 튼튼한 줄 알았는데... ...이상하다... (훌쩍이며 문 밖에서 기다린다)
라티나 그레이:훌쩍이. (즉석 별명 만들며 나온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동면 기기.
동면을 선택하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노아 양 :딱 두 번 했거든요... (소심하게 억울함을 표시하며 긴 복도를 걷기 시작한다.)
긴 복도로 걸음을 옮기면, 등 뒤에서 AI의 음성이 들려와 복도를 울립니다.
문득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냉동 수면실에서 나온 라티나와 노아는, 그 말을 뒤로 하고 함께 대피소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후는 바람이 강하지 않아서 대피소 밖을 잠시 걸어도 좋은 날이라네요.
노아 양 :아, 바람이 꽤 그쳤어요. (복도를 지나가며 바깥에 세워진 풍향계를 확인한다)
라티나 그레이:(눈 위로 손그늘을 만들어 바깥을 본다.) 이 정도면 아까보다는 걸을 만 하겠군요.
세 번째로 훌쩍이지는 않으시려나,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요?
노아 양 :...바람만 안 불면 괜찮아요. 진짜로요. 아까는 바람 때문에 코가 얼어서 그런 거였고... ... (횡설수설 변명한다)
라티나 그레이:뜨개질로 장갑을 떠줄 게 아니라 코가리개라도...아. (입을 꾹 다문다.)
...
...
머리를 세게 가격하면 기억이 지워질까요?
(조용히 주먹 들어올린다.)
노아 양 :... ... ... (재빨리 멀찍하게 떨어진다)
살인이에요.
라티나 그레이:... ...제 완벽한 계획이.
(복도 벽이나 한 번 친다.)
노아 양 :모...모르는 척 할게요. (벽 대신 얻어맞은 것 마냥 움찔 한다)
(그러다가 이내 기분좋게 웃으면서 쫄랑쫄랑 다가가더니) 매일 연습하고 있는 게 그거였어요?
라티나 그레이:(노아가 웃을수록 더욱 더 불퉁해진다.) 아닌데요.
딱히 그런 적 없습니다만.
그건...그.
수세미입니다.
노아 양 :... ...설거지 할 것도 없는데 수세미를?
뭐 이렇게 질문이 많습니까?
노아 양 :...수세미군요. 유용한 아이템이죠. 넵.
라티나 그레이:그래야죠. (턱을 치켜들고 눈을 가늘게 뜬다.)
(이내 복도의 끝에 다다라 문을 활짝 연다.)
든든히 챙겨 입으셨습니까?
노아 양 :(그새 방에서 목도리를 가지고 와 둘둘 두르며) 네, 완벽해요.
라티나 그레이:(자신도 목도리를 고쳐맨다.) 코 조심하시고요.
여전히 대피소 밖은 강한 추위가 느껴지지만...
시야를 가리는 눈 때문에 앞으로 걸어가지 못하지도, 세찬 바람 때문에 피부가 얼어 붙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노아 양 :(바람이 멎은 설원은 고요하다. 지구 상에 남은 인간이 둘 뿐이라 그렇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조용하다. 공기가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마저 묻어버린 듯한 두터운 카펫. 천천히 전망대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라티나 그레이:(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구를 이렇게 함께 걷다 보면 스러져가는 행성의 마지막 신들이라도 된 것 같았다. 움직이고 숨쉬는 이는 둘 뿐이기에. 세상을 정적으로 뒤덮는 것도, 그 정적을 깨는 것도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었다. 제법 대단한 능력이 아닌가. 무릎 바로 아래까지 깊게 잠기는 눈을 밟으며 폭폭 밟히는 눈 소리를 낸다. 두터운 카펫 위를 어지르는 아이들처럼.)
눈은 무릎 아래까지 폭 들어가기도 하고, 지대에 따라 발목까지 들어가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발은 푹푹 빠지고 중심도 제대로 잡을 수 없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갈 때마다 다리와 허리에 잔뜩 힘을 준 채 걸어야 합니다.
라티나 그레이:...(불만스레 툭 뱉는다.) 제 첫 걸음마도 이보단 빨랐을 겁니다.
노아 양 :신생아 달리기 대회에서 1등 했겠는데요. (장난스레 대답하더니 다리를 크게 움직여서 푹푹 걷는다) 이렇게, 레고처럼 걸으면 조금 빨라져요.
(세 걸음 뒤...) 그리고 엄청나게 힘들고... ... ...
느리게 가야겠어요... (제설차처럼 눈 밖으로 발을 빼지도 않고 질질 끌며 걷는다)
라티나 그레이:이렇게 눈을 달래듯 살살 걸으면 조금 덜 힘든 것 같습니다.
(한 걸음 뒤...) ...그리고 한 50년 후에 도착하겠군요.
노아 양 :꼭
<모모>에 나오는 시간의 길 같아요.
읽어 본 적 있어요?
라티나 그레이:(유독 빠지지 않는 발을 끙끙거리다가 고개를 든다.) 흥미로운 비유네요.
(이어 발을 폭, 빼고 다음 걸음을 디딘다.)
제가 회색 신사라면, 노아를 쫓는 격이 되려나요? (보폭이 달라 조금 벌어진 거리를 내려다본다.)
노아 양 :(그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제가 모모인가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모모와 카시오페아 같기도 해요.
카시오페아는 항상 등딱지에 멋진 격언을 써 주잖아요. 라티나랑 비슷하죠.
천천히 걷다보면 금방 도착하겠죠? (이번에는 이쪽에서 손을 내민다)
라티나 그레이:이 속도는 제법 거북이같으니, 오늘 제가 맡은 배역에 적당하겠군요. (장난스레 제 등을 돌아본다.)
물론이죠, 모모. (응수하며 내민 손을 잡는다.)
회색 신사들의 추격을 피하려면 높은 곳이 제격일 테고요?
노아 양 :아무렴요. 사람들의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험난하네요. (발걸음은 느리지만 규칙적으로 내딛어진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를 떠올려보면 가끔 궁금해져요.
제가 쓰고 찍은 기록들을 누군가가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걸 읽는 사람들이 있다면...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요.
라티나 그레이:저 또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잡은 손을 작게 흔든다.) 이 기록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첨언을 남겨두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노아 양 :(입을 다문 채 짧은 고민을 하더니) 다행히 책에는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좋은 이야기를 적기 위한 페이지가 할당되어 있잖아요.
작가의 말이나
엮는이의 말 같은 것들...
읽고 싶은 사람은 읽을 거고, 개인적인 감상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읽지 않을 테니까 책에 수록되는 위치는 그 정도가 딱 좋겠어요.
뭐든 쓰지 않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죠.
(단언한 것이 민망해졌는지 금방 덧붙인다) 제 개인적인 사견이에요. 책은 많이 써 본 적 없어서...
라티나 그레이:(민망한 듯 덧붙이는 기색을 알았는지, 독려하듯 조금 힘주어 손을 잡는다.)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쓰고 싶으십니까?
노아 양 :... ...위로나 동정은 괜찮다고 쓰고 싶네요.
제 선택을 후회한 적도 있었고, 절망하는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 필요한 위로는 멋진 동료가 해준 몫으로 충분했거든요.
라티나 그레이:그 첨언을 읽은 사람이 당신을, 우리를 동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에서요.
노아 양 :... ...독자가 남기고 싶은 개인적인 감상이 있는 만큼...저자도 남기고 싶은 아름다운 기억이 있는 법이니까요?
으으. 이거 너무 GV같아요. 부끄럽네.
라티나 그레이:꼭 잘 해내면서 그러신다니까요.
수상 소감 같은 것만 해도요.
라티나 그레이:정말 하나도 안 부끄러워 보이셨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청중도 라티나 한 명 뿐이라 좀 덜해요. 카메라도 없고.
라티나 그레이:그럼, 이따 전망대를 무대로 소감 한 번 들어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걷기 힘든 눈 위를 헤쳐서 걸어 갑니다.
하얀 시간의 길을 걷다 보면 조금씩 숨이 차오릅니다.
노아 양 :(하얗게 부서지는 숨이 공중에 흩어진다. 고작 이 정도 걸었다고 힘들었던 적이 별로 없는데.) 아, 아뇨. 괜찮아요. 멀리 나오는 게 오랜만이라 그래요.
제가 업히면 라티나가 두 배로 힘들잖아요.
라티나 그레이:제법 기특한 말씀을 하십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면서도 숨이 찬 기색이 신경쓰이는지 힐끗거린다.)
이 길도 진작 얼음에 덮였어야 할 곳이지만, 두 사람이 꾸준히 길목을 관리한 덕분에 그나마 아직도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곳으로 남았습니다.
잎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른 나무는 얼어 붙은 채로 빼곡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노아 양 :(아이젠을 끼고 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서 다행이지...) 러시아 여행을 제대로 가 본 적은 없는데, 시베리아의 버려진 숲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아요.
라티나 그레이:그렇네요. 이런 풍경 속을 모험할 계획은, (발치에 걸리는 언 나뭇가지를 옆으로 던져둔다.) 없었는데.
그러고보면 지구가 멸망하기 전, 사계절 모두 눈에 파묻혀 있는 곳도 있었겠지요.
그저 멀리 여행을 온 것 뿐일지도 모르잖아요.
라티나와 노아가 포화 상태인 우주선을 타지 못한 건, 누군가를 살렸다고는 해도 결국 운 때문이었겠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대피소에 도착했고, 최후까지 지구에서 살아 남아 있습니다.
노아 양 :(선택에 비하면 운이 좋았다. 매 순간 생의 끈을 놓칠 뻔 하다가도 자의로, 때로는 타의로 쥐어지기를 몇 번. 거의 다가온 전망대를 바라볼 때마다 드는 잡생각이 머릿속을 채운다.)
라티나 그레이:(놓지 말라는 듯 망설임 없이 힘주어 잡는 손이 있다.)
대피소 창문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한 크기입니다.
이정도 크기도 높게만 느껴지는데 전망대의 절반은 눈 속에 파묻힌 상태니...
과거에는 얼마나 어마어마한 높이였는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낡고 허물어진 전망대 안에는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노아 양 :매번 생각하는 건데...전망대 중앙 창문으로 들어가는 거, 꽤 악동들 같고 재밌는 것 같아요. (키보다 조금 낮은 아치형 창으로 들어가 계단을 딛는다)
라티나 그레이:흠. (부정은 않고 창으로 쏙 몸을 넣는다. 곧 계단을 딛고 꼭대기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발소리 사이로 담담히 묻는다.)
우주선이 날아가던 날, 여전히 기억하고 계십니까?
노아 양 :(그 한마디에 매번 닫아두던 상자가 열리는 기분이 든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망대 주변은 소음과 비명, 고성과 울부짖음. 타버릴 듯 뜨거운 엔진의 열기와 데일 듯 차가운 심장의 온도로 가득 찬다. 전망대에서 흔적을 쓸어내 버린 지는 오래 되었으나 노아 양은 지금도 짚어보라면 모든 것을 되새겨 낼 수 있다.) 물론이죠. 많이 희미해졌지만.
라티나 그레이:(그가 갈무리해둔 상자를 억지로 여는 것은 제게 허락된 일이 맞을까. 이런 우려는 의미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저 뿐이었으니까. 닫아두고 담아두는 이야기는 언제고 당신을 해칠 것이라는 확신에 잠에서 깨어난 새벽이면 고요한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곤 했으니까. 삶이 가르는 처절했던 상황. 방주 안에 탄 이들은 천국을 꿈꿀 수 있었고 밀려 떨어진 이들은 다가올 지옥을 느껴야 했다. 붉은 머리칼의 아이를 살렸던 당신은 어째서 그럴 수 있었던 걸까.) ...
상공으로 출발하기 전 우주선에 탄 이들이 그렇게 말했었죠.
예전만큼 환하지 않은 빛이지만 여전히 전망대 위를 비추고 있는 태양 때문입니다.
시야가 익숙해지자 두 번째로 눈에 들어 온 건 누구도 밟지 않은 깨끗하고 깊은 눈.
우주선 발사지와 도착지를 가린 채 언덕처럼 쌓인 눈길.
라티나 그레이:반드시 우리들을 데리러 돌아오겠다고요...
노아 양 :(이 땅에 남은 날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찾아온 고요함 속에서 맨 처음 라티나에게 건넸던 말이 떠오른다.
미안해요, 둘 다 태우고 싶었는데... 비인간적인 고독이 찾아온 것이 이틀인가 사흘 뒤였던 것 같다. 살아 숨쉰다는 것이 지독한 고문 같았는데, 그 고문을 끝낼 용기도 차마 없었던 기억이 난다. 매일같이 이 문을 열며 기다렸다. 오늘은, 오늘만은, 제발 오늘까지는.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하염없이 하늘을 눈에 담았던 순간마저 눈 앞에 선연하게 그려진다.) 인사치레라도 그 말이 참 좋았는데 말이죠. (이제는 가볍게 말하며 웃는다.)
라티나 그레이:(고성을 지르는 사람들 사이로 어떤 풍경이 보였지. 비명 가운데에서 그 아이를 태우던 그. 포화 상태인 우주선 안의 어른들이 제 대신 울며 끌어안던 붉은 머리의 아이. 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지. 유일한 방주를 탈 수 있었음에도 흰 지옥 위로 스스로 내려온 그는 어땠더라. 손이 떨리고 있었나. 혹은 울고 있었나. 기억에 성에가 낀 듯 뿌옇기만 하다. 어쩌면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는 것처럼...그 속에서 그가 건넨 사과만이 선명했다. 당신이란 사람을 정말 모르겠어. 모르겠어.
정작 그 말을 해야 했던 건...)
(추위 속에서 브랜디를 마셔대고, 호되게 쓰러져 앓던 열 속에서 몸이 뜨거워지는 게 이런 방식이었냐며 웃던 빨간 얼굴을 떠올린다. 그가 살기를 바랐다. 그 뿐이었다. 고작 그것 뿐이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올 것입니다. 반드시.
전망대 끝에 올라도 우주선이 발사 되었던 발사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전망대 꼭대기에 훤히 내다 보였던 그곳은 지구에 최후로 남은 우주선 발사지이자, 도착지였습니다.
정말 인류가 남은 우리를 위해 지구로 되돌아온다면 바로 이 곳일겁니다.
대피소가 이곳에 있고 얼어붙은 채 잠든 인류가 바로 여기 있으며...
라티나와 노아가 …. 최후로 여기에 남아 있으니까요.
노아 양 :(생각보다 먼저 팔이 나가서 자리에 아이를 앉히고, 정원 초과 경고를 하는 승조원에게 손을 들자 곧장 우주선에서 내리는 계단이 놓였다. 너무 순식간이라서 그게 대체 무슨 짓이었는지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보통 영화 주인공들은 이쯤에서
괜찮아요, 이젠. 여기가 좋아요. 같은 말을 하던데. 아무리 빈 말이라도 그런 소리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그랬으면 좋겠다. 이 흰 풍경에서 쏘아올려져서, 검고 찬란한 우주를 영원히 유영하고만 싶다. 가족들.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새로운 거점을 찾은 인류가 우리를 기억하고는 있을까? 저 발사대처럼 아무 흔적 없이 덮힌 것은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는 밤이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전부 종이에 쏟아냈다. 아니면 브랜디로 속을 달래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다가 맥락없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왜 브랜디였을까요?
위스키나 보드카가 훨씬 도수가 높은데... ...대피소 사람들이 그 전에 다 마셔버렸나? (딱 그 때 그 자리에 쭈그려앉아 전망대 밖을 내다본다)
라티나 그레이:(그 날의 그 장소에 자리한 그를 바라본다.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이었을까? 그 기준은 저마다 달랐겠지. 노아의 가족들은 아이를 원망했을까. 혹은 나를 원망했을까. 그에게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 당신이 타지 않은 것이냐고, 여기에 남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냐고.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담아두고 닫아두는 것이 왜 사람을 해친다고 생각하는지는 당연했다. 내가 그렇게 나 자신을 할퀴고 있었으니까. 제 딸을 살리고 싶다는 이기심에 결국 동료를 다시 우주선으로 밀어넣지 못했으니까. 흰 풍경에서 쏘아올려져 검고 찬란한 우주를 향해 가는 방주를 함께 바라보던 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단 말조차 돌려줄 수가 없었다.)
옆에 쭈그려 앉아 밖을 향해 눈을 깜빡입니다.
라티나 그레이:(담담히 대답한다.) 뭐, 오렌지 주스가 아니었던 게 어디입니까?
(곧 몸을 일으켜 의자 두 개를 가지고 온다.)
(생김새가 어딘지 익숙한 의자를 펼치면, 감독석처럼 보인다.)
앉으시죠, 감독님.
노아 양 :아, (갑자기 등장한 물건에 웃음을 터트린다) 어디서 이렇게 제대로 된 물건이 나왔어요? 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사양하지 않고 가볍게 의자에 기대앉는다. 자세가 제법 편안하다)
라티나 그레이: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신비함이 없는 법입니다. (뻔뻔히 대답하며 옆에 앉는다.)
(이윽고 옷 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브랜디인가요? 아니면 오렌지주스?
라티나 그레이:확 오렌지주스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담담하게 중얼거린다.)
(냉장고에 아껴뒀던 브랜디를 꺼낸다. 잔 두 개도 함께.)
(잔 하나를 내밀기 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또 앓진 않겠죠?
노아 양 :오늘은 그렇게 많이 안 마실 거에요. 정말로. (다짐하듯 단호하게 대답한다)
라티나 그레이:으음.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쥐어준다.)
노아 양 :(잔을 받아 들고, 두 잔에 적당히 브랜디가 따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우리를 위하여?
라티나 그레이:(잔 안의 투명한 호박색 액을 찰랑인다.)
(제 잔을 가까이 대며 속삭인다.)
네.
우리를 위하여.
노아 양 :(짠. 두 잔을 가볍게 맞부딪히고, 차게 식은 브랜디를 두 모금에 나눠 들이킨다.)
으. 오랜만에 마시니까 엄청 쓰네요.
라티나 그레이:그 때는 잘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싶습니다. (잔을 머금고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노아.
노아 양 :(이럴 때 쓰는 이미지 밈이 있었던 것 같은데...생각하며 라티나를 바라본다.) 네?
라티나 그레이:워낙 추위에 떨어서 그런지 좀 단 것 같기도...(중얼거린다.)
...
인류는 새로운 행성을 찾았을까요.
노아 양 :...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저는 과학자가 아니니까 인간이 생존할 가능성이 있는 행성의 수 같은 건 모르지만... ...설령 행성이 아니더라도 살 방법을 찾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라티나 그레이:역시 그렇겠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모금 더 브랜디를 들이킨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어쩌면 조금 더 먼 미래에.
그렇게 두 번째 골디락스를 찾은 다음에는 이 곳으로 돌아와 주겠지요.
노아 양 :(적절한 비유에 짧게 웃는다) 버려진 스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기다리는 것도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지금처럼요.
라티나 그레이:흠, 제가 제법 노아를 즐겁게 해 드렸나 보죠. (잔을 작게 흔들며 턱을 치켜들고 눈을 가늘게 뜬다.)
노아 양 :정말이에요. 라티나. 농담이 아니라. (라티나의 으쓱임에 제법 진지하게 대답한다) 당신 덕분이에요.
혼자 남았으면 아무것도 못했을 것 같거든요. 대피소를 꾸리는 것조차도요.
라티나 그레이:...그렇게 먼저 선수를 치시니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괜히 잔을 한 번 더 홀짝인다.)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것인가, 늘 의문이 남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홀로가 아닌 둘이라는 것이...
느릿한 대화 속에서 희뿌연 해가 눈 덮인 지평선으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둘이기에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둘이기에 털어놓을 수 없는 것 또한 분명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이 보내는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둘은 대피소로 돌아 갈 준비를 합니다.
밤이 찾아 온 지구를 비추는 거라곤 달 뿐입니다.
돌아가는 길이 더 어려워지지 않도록 지금 전망대를 내려가는게 낫겠습니다.
전망대 계단을 내려가는 건 올라가는것 보다 훨씬 쉬운 일입니다.
라티나를 따라 전망대 계단을 내려가는 시간이 어쩐지 쌀쌀합니다.
밤이 찾아오면서 온도도 더 낮아졌기 때문이겠죠.
그 사실을 라티나 역시 알고 있는지 내려가는 걸음이 분주합니다.
노아 양 :
정신
기준치: |
60/30/12 |
굴림: |
5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노아 양 :(따끈따끈해진 볼에 한 쪽 손 끝을 녹이며 발을 옮긴다.)
추위에 너무 오래 머물렀던 탓인지 미열이 느껴집니다.
다른 날에 비해 좋은 날씨였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버티기 힘든 온도입니다.
몽롱하고 까마득한 기분이 느껴지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노아 양 :(아, 또다... ...브랜디가 몸에 안 맞는건가? 볼만 뜨끈한 게 아니라 눈까지 열감이 번지는 것이 느껴진다. 걸음이 한 번 꼬였다가 간신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눈가와 손끝으로 뜨겁게 열이 몰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노아의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라티나가 걸음을 멈춰 노아의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노아 양 :저 지금 얼굴 좀 빨간가요? (내쉬는 숨에서도 뜨끈한 기운이 느껴진다. 안경 아래에 서리는 김 사이로 시야가 끔벅인다.) 지금 자율동력난로가 된 기분이에요.
라티나 그레이:조금이 아니라...(손바닥으로 노아의 눈을 덮는다.)
라티나는 생생할 정도로 따뜻한 손바닥으로 노아의 눈을 덮습니다.
--------...
...------...
노아 양 :아, 라티나 손도 따뜻하네요... (중얼거림인지 웅얼거림인지, 목도리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로 있다가) ... ...어...잘 안들려요.
라티나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한 그 때,
천천히 돌아오는 시야 속에 대피소가 보입니다.
라티나는 노아의 앞에 앉아 그의 다리를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있습니다.
미약한 동상에 걸렸는지 발 끝이 저릿저릿합니다.
노아 양 :(시야가 가물가물하게 돌아오자 눈을 끔벅인다. 아까까지 바깥에 있었던 것 같은데...) ...저 쓰러졌었나요?
시야는 다 돌아오지 않은 건지, 혹은 잠에 취한 건지. 감각은 아직까지 몽롱합니다.
당분간은 바깥에 나오지 않으셔야겠습니다.
전망대에서 대피소로 걸어 왔을 때, 노아의 걸음이 이상했다는 걸 알았나봅니다.
하지만 달리거나 계단을 오르는 일 등은 조금 어려울 것 같네요.
노아의 발을 씻겨 준 라티나는 노아를 침대 위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줍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지금 보는 풍경보다 좀 더 쌓인 눈을 보게 될 겁니다.
두 사람이 남긴 발자국 위로 또 눈이 쌓이겠죠.
노아 양 :... ...그냥 전망대 한 번 나갔다 온 건데 또 이러네요... (이불까지 덮히면 입이 파묻힌 채로 웅얼거린다) 미안해요.
라티나 그레이:(침대에 걸터앉아 창 밖을 보다가, 그 말에 고개를 내려 노아를 본다.)
다 괜찮습니다. 조금 쉬면 돼요.
내일 깨워드리겠습니다.
노아 양 :...잘 자요, 라티나. (눈이 가려지면, 그제서야 천천히 눈을 감는다.)
라티나의 주문같은 말을 마지막으로 노아의 의식이 다시 멀어집니다.
노아 양 :
듣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노아 양 :(번쩍. 눈을 뜬다. 상태 이상? 심상치 않은 경고음에 몸을 벌떡 일으킨다.)
노아 양 :(어디지? 주변을 둘러본다. N-02라면...)
눈을 뜨자 불길한 붉은 빛이 문 밖에서 깜박이고 있습니다.
문을 닫아 놓았지만 복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전부 막을 수는 없습니다.
노아 양 :...냉동수면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치고 지나간다. 아직...)
단 한 번도 대피소 내부에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노아 양 :(곧장 침대 아래에 둔 신발을 신고 복도로 향한다. 아직 얼얼한 발 끝 덕붙에 조금 절뚝이며 뛰는 꼴이 되었다.)
스치듯 본 시계는 이른 아침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라티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라티나는 어디로 간 걸까요? 대피소 내부에 이렇게 경고음이 울리고 있는데 나타나지 않는다면, 전망대에 간 걸까요?
노아 양 :(다시 전망대에 갔나? 그럼 라티나는 모를텐데. 하지만 장치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건... ...순간 아차, 싶어서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선다. 라티나의 관리자 카드.)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복도 한가운데에서 멈춰섭니다.
라티나의 습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빼지 않는 것...
노아 양 :(그게 없으면 들어가지도 못하잖아. 다시 발을 돌려 방 위의 책상하며 옷가지를 뒤적인다.)
옷 주머니에서 라티나의 관리자 카드가 나옵니다.
이 순간에도 복도에서 붉은 빛이 경고하듯 깜빡이고 있습니다.
N-02, 즉 냉동수면실에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마냥 라티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노아 양 :(동면 장치가 고장났나? 사람들이 깨어나는건가? 그럼 큰일인데. 냉동수면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카드를 태그한다.)
라티나의 관리자인식증을 라티나가 했던 것 처럼 문에 갖다 대자 익숙한 음성이 들립니다.
동면실 내부는 미친 듯이 경고등이 깜빡이는 것 외에 달라진게 없습니다.
노아 양 :(
그 사람이다. 의식 변동? 아찔해지는 경고에 곧장 캡슐로 다가간다. 라티나가 하던 것을 떠올리며...)
문득, 책을 옮기던 중 종이 한 장을 근처에 떨어트리고 갔던 것을 기억해냅니다.
노아 양 :사용 설명서... (분명 다시 넣어놨었는데. 자료보관함을 뒤적인다.)
자료보관함 속에서 동면기기 사용 설명서를 발견합니다.
노아 양 :차, 찾았다... (라티나라면 이런 것 없이도 제대로 조작하겠지만. 미처 안경도 쓰고 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흐릿한 시야를 찡그리고 바라본다.) 동면 기기 우측 하단... (중얼거림과 동시에 기기의 우측 하단을 더듬어 버튼을 찾아낸다.)
기기의 우측 하단을 누르자, 짧은 작동음과 함께 패널이 떠오릅니다.
제니는 스스로의 의지로 의식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노아 양 :아, 됐다...6단계... ... (그게 어느 정도야? 하고 다시 사용설명서를 읽었다가 얼굴이 사색이 된다. 위험하다.)
유효 기간이 가까워지거나 종료되었을 시... ... (하지만 400년이라며? 250년은 커녕 고작 몇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아래의 동면체 비활성 의식 유지 파트까지 읽고나면 눈을 의심하는 것처럼 사용 설명서를 뒤집고 팔락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의식 단계를 낮추는 방법이 없다.)
... ...이걸 어떻게... ...?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어느 순간에 우뚝 멈춰서 붉은 빛이 점등한 캡슐을 바라보기만 한다.)
야속한 종이 속에는 이 상황을 타개할 그 어떤 것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이 상태라면 머지 않아 곧 동면에서 풀려날 것 같습니다.
지구는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고 오히려 상황은 더 안 좋아지고 있는데도요.
제니의 동면 캡슐은 ON 버튼에 붉은 빛이 들어와 있고 경고등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노아 양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이다. 하지만 그건... ... ... ...)
(라티나한테 이걸 알려야 돼. 갑자기 벌떡 일어나 냉동수면실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뒤지기 시작한다.) 통신 장비...통신 장비...아무거나...없나...?
하나뿐인 선택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노아 양 :(방법이 없을리가. 뾰족한 수가 있을 거야. 아니면 그렇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한 걸 수도 있고...)
포기하지 않는 이에겐 어떻게든 길이 놓이는 법입니다.
냉동수면실 안을 분주하게 살피는 노아, 관찰 판정입니다.
노아 양 :
관찰력
기준치: |
80/40/16 |
굴림: |
1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가 놓여 있던 자료 보관함에 상자 하나가 깊숙히 놓여져 있는게 보입니다.
상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어딘가 오래 되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노아 양 :...? (마치 숨겨둔 것처럼 들어가있는 상자를 꺼낸다. 통신장비...라기엔 조금 작지? 뚜껑을 열어보자.)
그리고 그 카드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에는 제니도 있습니다.
노아 양 :...제니. (인식증 카드? 이런 걸 왜...생경한 표정으로 카드를 든다.)
그렇다는건 이 인식증 카드는 동면 캡슐에서 동면 하고 있는 저 사람들의 것이군요.
인식증에는 이름과 국적만 다를 뿐 동일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라티나의 직급은 대피소 관리인이지만 그들의 직급은 대피소 생존 인류.
동면 캡슐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라티나처럼 관리자가 아닙니다.
노아 양 :
지능
기준치: |
80/40/16 |
굴림: |
5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 (잃어버린 걸 수도 있지. 하지만 가진 적이 있어야 잃을 수도 있는 것아니겠어?)
그들의 인식증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기억을 더듬습니다.
대피소에 들어온 직후 누군가가 노아에게 주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잊고 있었을만큼 오래 전에 잃어버렸나?
노아 양 :(손에 익은, 그러나 생경하기만 한 카드를 매만진다. 오자마자...잃어버렸나? 그럼 이 대피소에서 본 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
그렇게 생경한 카드를 매만지던 중, 문득 시선 안에 철문이 들어옵니다.
노아 양 :... ... (통제실에는 뭐가 있지? 최소한 냉동수면실 안에 있는 거니까 관련한 장비들이 있겠지. 무엇하다면 여분의 캡슐이라도...인식증을 들고 가서 철문 옆에 태그한다. ...되려나? 관리자도 승인이 불가능했는데.)
적어도 최소한, 이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의 물건이 자리할지도 모르죠.
[대피소에서 사용되었던 내부 통제실인데, 출입 할 수 있는 인간들은 모두 죽었거든요.]
그렇다면 이 사람들의 인식증으로도 동면실의 철문이 열릴 일은 없을 텐데요.
노아가 제니의 인식증을 태그하자 예상과는 다른 AI 음성음이 들립니다.
[내부 통제실 진입시 AI의 출입이 제한됩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이 멎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동면실에 위치한 대피소 내부 통제실은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라티나가 개방 준비를 하고 있던 AI를 작동 정지 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들리는 라티나의 가쁜 숨소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존재하는 눈을 털어내지도 않고 달려왔는지 라티나의 모습은 엉망진창입니다.
불안함과 조급함이 느껴지는 경고등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립니다.
다시 물들었다가 꺼졌다가 반복되는 빛이 라티나의 얼굴을 연속적으로 비춥니다.
노아 양 :... ...라티나. (커다랗게 뜬 눈으로 숨 가쁘게 달려온 사람을 바라본다.)
라티나의 표정은 큰 미동 없이 잠잠하기만 합니다.
노아 양 :아, 그. 미안해요. 일어났는데 경고등이 켜져있고 당신은 안 보여서. 찾으러 가는 것보다 먼저 해결을 해 두려고... ... (급하게 횡설수설하며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라티나 그레이:(누가 보아도 엉망으로 뛰어온 모습을 한 채 숨을 고른다. 고요히 눈을 깜빡이다가 한참 후에 그 앞에 몸을 굽혀 앉는다.)
...
다리는 괜찮으십니까?
노아 양 :... ...네...뛰는 건 느리지만 덕분에.
그,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제니라는 사람의 캡슐이 비상이에요. 매뉴얼을 보니까 의식 단계가 높아질수록 위험한 것 같은데...
라티나 그레이:...(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레 노아의 손에 들린 인식증 카드를 가져온다.)
노아에게서 인식증을 가져오고 나서 라티나는 동면 캡슐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버튼을 누르자 제니의 고유 정보와 의식 단계가 캡슐 위로 생성됩니다.
[제니 | 미국 | 인간 | 현재 의식 단계 : 6단계]
라티나가 캡슐과 프로젝트 화면을 오가기를 몇 번.
시간이 지난 후에 냉동 수면실의 경고등이 꺼졌습니다.
복도에서 깜빡거리고 있던 센서도 사그라든걸 보니 대피소 내부 전체를 밝히던 경고 센서가 제어 된 것 같습니다.
기계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 쉰 라티나는 노아를 바라봅니다.
노아 양 :(비상을 알리던 경고등이 꺼지면 경직되었던 어깨가 한층 내려앉는다.)
노아.
노아 양 :... ... (이름을 부르는 어조에서 불길함을 감지한다.) ...네.
라티나 그레이:(캡슐 위의 매끄러운 유리를 천천히 더듬는다.)
동면 캡슐...
멈출까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라티나는 잘 알고 있을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라티나 입에서 나온 저 소리는 동면 기기 사용 설명서에 적혀있던 4번째 사항.
...아닙니다.
노아 양 :... (천천히 캡슐 옆으로 다가가 한 쪽 무릎을 꿇는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따라붙고, 눈이 서서히 녹아가는 어깨로 손을 올린다.) ...라티나, 괜찮아요?
라티나 그레이:(손이 닿은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다가, 이내 멎는다.) ...
괜찮습니다.
...우선 나갈까요. 혼자 둬서 미안합니다.
잠시 전망대에 다녀왔어요.
노아 양 :(안 괜찮아보이는데. 그 모습에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다. 라티나 또한 지쳤을 것이다. 관리자 권한을 받았다지만 인간이다. 이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어. 닫힌 방 너머에 난자한 자상을 목격한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는다.) ...돌아가서 쉬어요, 라티나. 잠도 거의 안 잤죠?
라티나 그레이:...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네요. (담담히 응수하며 습관처럼 노아의 손을 잡는다.)
나가죠.
우주선 발사지와 도착지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
노아 양 :(그 전파 기기.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라티나는 아마도.) ... ... (누구보다 절실하게 우주를 그리는 이를 본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다. 당신도 나만큼이나, 먼저 멀리 보낸 것들을 그리워했겠지. 어쩌면 나보다도 더.)
... ...기다리고 있었군요, 거기서. ...계속...
라티나는 대답 없이 그의 손을 고쳐잡을 뿐입니다.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상념 속에 빠진 것처럼,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습니다.
노아 양 :... (나는 분명 냉동수면실에...)
그래요, 분명 경고음을 듣고 냉동수면실로 향했고...
동면체의 의식 변동을 감지했다는 음성을 들었죠.
방법을 찾으려던 당신은 제니의 옆에서 무엇을 찾아냈었나요?
노아 양 :(제니의 인식증. 열리지 않던 문이 반응하는...)
라티나가 말했던 '비밀의 방'에 제니의 인식증을 대자,
더불어 노아 자신에게도 분명 인식증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냈고요.
노아 양 :(아니, 보지 못했다. 왜냐면 그러기 전에...라티나가 왔어.)
라티나는 제니의 캡슐을 안정시키고, 당신에게 뭐라고 말했나요?
노아 양 :(
캡슐을 멈출까요, 왜 그런 말을 했지? 라티나는 이곳의 관리자일텐데.)
그리고 라티나는 인류가 지구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했는데 말이죠.
라티나의 표정에선 무엇을 읽을 수 있었을까요?
노아 양 :(무척이나 피로한 얼굴. 아니면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리고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길을 응시하는 듯한 라티나가 때때로 이질적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카시오페이아,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거죠?)
무엇인지 모를 것을 올려다보고, 어디인지 모를 길을 응시하는 당신의 친우.
모모, 어떤 이야기라도 감내할 자신이 있나요?
노아 양 :(물론 라티나가 가는 길이 틀린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을 유영하는 감각이 낯설어서, 자신이 제대로 따라 걷고 있는지 의문이 들 뿐. 한 발짝, 한 발짝 느리게 다가선다.)
느리게 걸을 줄 아는 당신은 분명 누구보다도 빠르게 나아갈 수 있겠죠.
잊지 마세요,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 발짝씩 걸음을 내딛자 암흑 속의 시야가 천천히 밝아집니다.
짧은 유영을 마치고 머물고 있는 현재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노아 양 :(천천히 눈을 뜬다. 아주 찰나, 혹은 억겁의 시간을 보낸 것처럼. 정확히 1초를 반으로 나눈 것만큼의 박자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분홍빛 꽃잎 한 장이 떨어지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냉동수면실에서 나와 이 곳으로 돌아온 모양입니다.
방으로 돌아 온 라티나는 노아에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아 양 :(가만히 라티나를 바라본다. 눈을 뜨기 전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먼 거리.) 뭔가 발견했나요? ...거기서.
라티나 그레이:(내리깐 눈을 버석하게 깜빡인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대답은 한 박자 더 멀었다.) ...아, 못 들었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노아 양 :전망대요. 항상 자는 시간 빼곤 거의 거기에 가 있어서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 ...우주선에서 보내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건가요?
라티나 그레이:(냉동수면실에 신경을 뺏기고 있던 것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멍하게 뜨고 있던 눈이
전망대라는 단어에 확 뜨여진다.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는 듯.) ...!
(주머니 속에 손을 넣더니, 가지고 있던 무선 전파기를 꺼내 내민다. 오랜만에 들뜬 눈빛으로. 아주 기쁜 소식이라는 듯이...)
분명 우주 전파를 감지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 했었죠.
노아 양 :(무선 전파기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다가... ...눈이 점점 크게 뜨인다.) 이거...전파음인가요? 해석할 수 있어요?
...정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라티나 그레이:(눈을 빛내며 전파기를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노아를 본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까 전망대에 올라갔을 때 지구 근처 상공에서 신호가 잡혔어요. 지금은 잔류 노이즈만 남아있지만...그렇지만. (드물게 빠르게 말을 이어가다가 멈칫한다.)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노아 양 :(라티나의 어조와 빠르기에서 들뜸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늘 너머를 상상하지 않으려 했지만 무엇보다 기다리던 소식. 이쪽에도 천천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다시 만날 수 있다, 어쩌면.) ... ...그들이 어디로 나갔던, 지구 상공을 돌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라티나! (이번에는 이쪽이 양 손으로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댄다) 잘됐어요! 정말, 정말 잘됐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라티나 그레이:(그 행동을 따라 시야가 쾌활하게 흔들린다. 포크 댄스라도 추는 것처럼. 더불어 눈이 녹듯 번진 미소를 가만히 본다. 개화는 먼 곳에 있지 않구나.) ...네, 어쩌면 곧 이 지구를 떠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 ...(벅찬 숨을 고르듯 잠시 말을 멈춘다.)
...기쁩니다.
정말 지구를 떠났던 인류가 우리를 데리러 오기 위해 지구에 돌아온거라면.
혹은 그들이 아니어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봐 준 누군가가 있다면.
이 추위와 고립, 멸망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라티나의 부드러운 눈빛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멸망 된 지구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노아 양 :(단단한 추위만큼 얼어붙었던 심장이 이걸로 조금 녹았을까?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 날 밤만은 편히 잡에 들 수 있을지도.)
라티나와 노아의 사이도 이전과 달라진 게 없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루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라티나가 들었다던 우주 전파는 그 이후 더이상 소식이 없었고,
지구의 추위는 이전보다 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할 것 없이 눈이 몰아쳤습니다.
이미 멸망된 지구지만 그 사실을 더 확고히 하는 것처럼.
다시는 생명을 품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우주전파음을 잡겠다고 전망대로 간 덕분에...
라티나가 감기 몸살로 열이 올라 앓아 눕게 된 날이.
몇 번 기침을 하던 라티나는 오늘 아침까지도 전망대에 가려고 했지만 ….
노아 양 :(라티나가 푹 누운 침대의 이불을 다시 판판하게 편다) 그 몸으로는 절대 안돼요, 라티나.
노아 양 :전망대에서 잡히는 전파라면 분명 여기서도 들을 수 있을 거에요. 차이는 아주 미약하다구요. (사실은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장담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일어나서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히 더 힘을 준다.)
라티나 그레이:(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누운 채로 무선 전파기를 만지작거린다. 빨간 코끝을 훌쩍이다가 느릿느릿 눈을 깜빡인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노아 양 :그것도 일단 내려놓고요. (주세요, 하듯이 손을 내민다) 대신 제가 옆에서 보고 있을게요. 조작은 할 줄 모르지만 들을 수는 있잖아요.
(그러더니 금방 의자에 무릎을 올린 채 턱을 괴고 웃어보인다)
라티나 그레이:... ... (콜록, 기침이 몇 번 더 이어지는 동안에도 고집을 부리듯 전파 기기를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숨긴다. 웃는 얼굴을 빤히 본다.)
...어디 흘리시는 것 아닙니까?
노아 양 :(이불 속으로 사라지는 전파기기를 보며 에에, 하는 소리를 낸다.) 손에 쥐고 있으면 안 흘려요!
정말?
일단 감기 걸린 라티나보다는...
라티나 그레이:...(불만스런 눈빛이지만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불 속에서 무선 전파기를 쥔 손을 슥 내보낸다.)
노아 양 :(다시 씩 웃으면서 전파기를 받아가고, 라티나가 그랬듯 양 손으로 소중하게 쥔다.) 라티나는 감기 같은 건 절대 안 걸릴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라티나 그레이: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왜 하필 이럴 때...(콜록, 기침이 한 번 더 이어진다.)
(멍하게 눈을 깜빡인다.) 믿고 있겠습니다...
흘리시면...(깜빡, 깜빡. 느슨하게 눈이 감긴다.)
가만...안 둡니다...
노아 양 :절대 눈도 귀도 안 떼고 있을테니까 주무세요. (조용조용 대답하고는 느리게 끔벅이는 눈이 완전히 내려감기도록 슬쩍 손을 대서 감겨준다)
라티나 그레이:(잃어버리면 안돼. 왜냐하면 그건... 생각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무거운 의식 속으로 까무룩 가라앉는다. 힘을 주던 눈가에 따뜻한 손가락이 닿자 숨 한 번과 함께 잠에 빠져든다.)
손에 닿은 눈가에서도 열이 느껴졌던 걸 보면, 푹 자두는 것이 좋겠어요.
노아 양 :진짜 양철 나무꾼이나 거북이인 건 아니니까요. (전파탐지기를 쥔 채 만지작거리며 신호를 기다린다. 라티나도 전망대에서 이랬을까, 생각하면서.)
그가 아는 라티나는 이야기 속 존재가 아니니까요.
어느새 방 안에는 라티나가 고른 숨을 쉬는 소리만이 들립니다.
노아 양 :(그러고보니 아침부터 내내 앉아있느라...꾸무적거리며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연다.)
노아 양 :(낯선 소음이 들리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무선 전파기를 붙잡는다) 어, 시, 신호가.
무선 전파기에서 전파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높게 오른 열에 시달리던 라티나는 전파음을 듣지 못하고 아이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노아 양 :... ... (안 깨우는 게 낫겠다. 신호를 확인하고 전해줘도 늦지 않겠지. 무선 전파기에서 바로 신호를 해석할 수 있을까?)
이 전파를 누가 보낸 건지, 어떻게든 해석할 방법을 찾으려던 찰나,
[생명 활동, 생명 활동. 감지. 대상이. 감지. 대상이.]
무선 전파기 너머에서 모스 부호로 해독된 문자가 지직거리며 들렸습니다.
받은 신호를 이렇게나마 해석할 수 있는 듯 보입니다.
노아 양 :(하, 들린다. 눈을 크게 뜨고 청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생명 활동 감지 대상이...)
그들이 이 지구에 남아있는 생명체를 확인하기 위해 전파를 흘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우주를 향해 전파를 쏘아 올려야 하는게 아닐까요?
우리들이 이곳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요.
노아 양 :(그 말에 심장이 크게 박동한다. 살아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 틀림 없어. 그들이 지구에 두고 간 인류를 기억했다. 전파탐지기를 쥐고 미끄러지듯이 달려 통신실로 향한다.)
내달리는 걸음은 조금 비틀거리기도, 또 찰나 균형을 잃기도 하지만 망설임 없이 나아갑니다.
전파를 쏘아올릴 수 있는 곳은 이 대피소 안 ….
노아는 라티나의 인식증을 챙겨 통신실로 달립니다.
라티나가 그토록 기다렸던 인류가 돌아왔습니다.
노아 양 :(반드시. 그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라티나의 관리자 인식증을 대자 음성이 들립니다.
노아 양 :전파...전파 신호를...어떻게 보내는 거였더라...어떻게... (머리를 굴리며 통신실 안으로 들어서 장비들을 살펴본다.)
통신실은 2인이 앉을 자리만 있을 정도로 좁고 기계들이 벽을 가득 잠식하고 있습니다.
노아 양 :
교육
기준치: |
60/30/12 |
굴림: |
1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전에 라티나가 작동법을 알려줬던 기억이 납니다. 어쩐지 선명하게요.
기기 작동 조작법이었지만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몇 번 전파 탐지기기를 만지더니 곧 기계의 전원 버튼을 누릅니다.
전파 기기 전원을 누르자 곧 불이 들어오더니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노아 양 :(주파수 탐지 버튼, FM 설정, 변환 언어 지정, 내리고, 내리고, 올리고, 중간에 맞춘 다음에...ON.)
(침착한 손길이 서툴지만 정확하게 신호를 입력한다. 제발. 제발 받아라. 전파 메시지를 작성하고 신호를 송출하기 시작한다.) [ 이곳은 발사대 제 1 대피소. ]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명령어가 활성화됩니다.
침착한 손길이 소중하고 정확하게 신호를 입력합니다.
전파 메시지를 작성하고 신호를 송출하자, 화면 위의 전파 변환 게이지가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명령어를 따라 게이지 뒤의 화면에 지구 주위 우주 상공 상태창이 나타납니다.
얼어붙은 지구 주변으로 작은 물체가 잡힙니다.
노아 양 :... ... ...왔어. (우주선이. 떠나보냈던 그게. 목구멍으로 무언가 차는 듯한 감각이 따라붙는다. 만날 수 있어.)
게이지가 사라지고 화면 위에는 [신호 송출] 최종 버튼이 뜹니다.
우주선이 떠나기 전 이 지구에 아직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노아 양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누른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놓친다. 다음이 언제일지 알 수 없어.)
...곧 노아는 아주 무거운 전류를 느낍니다.
노아 양 :
정신
기준치: |
60/30/12 |
굴림: |
94 |
판정결과: |
실패 |
전류를 느끼자 마자 몸 전신이 아찔하고 따가운 감각에 휩싸입니다.
손과 발 끝이 저릿 저릿하고 눈 앞 시야가 막연하게 어두워집니다.
노아 양 :(흐르는 전류가 손 끝에서부터 전신을 타격하듯 올라온다. 윽,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숨과 함께 턱 막힌다.)
추위 때문에 너무 대피소 안에만 있던 걸까요?
노아 양 :(갑자기 왜? 어두워진 시야를 되돌리려 머리를 흔들고 안경을 벗었다 쓰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신호가...제대로 갔나?)
기기 화면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지만 적어도 지구 근처에 존재하는 우주선이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노아 양 :... ... (착륙할지도 몰라. 시선을 떼지 않고 답신을 기다린다. 제발, 제발, 제발...)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제발. 제발. 제발.
화면에 그들의 규칙적인 전파 음성이 나타납니다.
생명체가 있으면 대답해.
노아가 쏘아 올린 전파가 그들에게 닿았나 봅니다!
노아 양 :(인간의 음성. 진짜 음성이다.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고 대답한다.) 으...응답. 응답했어요. 여기...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어떻게든 대답을 하려 합니다.
노아 양 :(재차 신호를 보낸다. 신호를 치는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발사대 제 1 대피소, 생존자 2명 외 동면 캡슐 다수.]
노아가 화면에 대답을 생성하자, 기기는 그 대답을 일정한 주파수로 바꾸어 우주로 쏘아올립니다.
화면에는 그들이 보낸 답이 송출되고 있습니다.
지난 한달 간 우리들은 지구 주변을 수백번도 더 돌았지만,
노아 양 :... ...여기 이렇게...살아있는데. (다시 신호를 보낸다. [확실하다. 인간 생존자 2명.] 어째서? 생명체가 감지되지 않았다니?)
지금 이곳에 라티나와 노아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방황하고 있는 노아의 생각을 모르는 것처럼 통신실 밖에서 끊겼던 신호가 뒤섞입니다.
[생명 활동, 생명 활동. 감지. 대상이. 감지. 대상이.]
노아 양 :
SAN Roll
기준치: |
60/30/12 |
굴림: |
11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질 나쁜,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노아 양 :(그 외에 다른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다. 떨림이 멎은 손이 천천히 신호를 보낸다.) [인간이 아니라뇨?]
?:네게선 인간의 생체 활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아.
네가 있는 곳은 아주 오래된 대피소 같네.
너는 그곳의 관리자인가?
[생명 활동, 생명 활동. 감지. 대상이. 감지. 대상이.]
노아 양 :... ... (말문이 막힌다. 생체 활동? 하지만 이렇게 숨을 쉬고 있는데. 신호를 보내는 손길이 느려진다.) [관리자는 따로 있어요. 라티나 그레이. 제 이름은 노아 양이에요.]
?:관리자라. 그 자가 며칠 전에 처음 신호를 수신한 존재인 모양이지.
라티나 그레이, 노아 양.
두 존재 모두 인간의 생체 활동이 감지되지 않아.
스캔 결과 지하에는 동면캡슐 6개가 보이는군.
너와 그 존재는 모두 인간이 아니야.
너무 긴 시간 작동되어서 정보에 오류가 생긴 것 아냐?
노아 양 :(400년? 그 말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간다. 400년? 아니, 고작 해야 3년이 안됐을텐데. 조금 넘었던가? 하지만 아무리 세어도...400년은 아니다. 머릿속에서 펼쳐가던 실이 뒤엉켜 숨구멍을 턱 막는다.) [400년이라뇨? 고작 해야 몇 년일텐데요.]
자세한 일은 관리자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정말 아무 신호도 없지 않았을 텐데. 네게 숨긴 건가?
노아 양 :(무언가를 판단할만한 실마리가 남지 않았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힘이 빠진 손 끝이 누르는 패널이 축축하다.) [며칠 전에 신호를 받았다고 했어요.]
자신과 너를 데려가줄 수 있냐고 묻더군.
그래서 이야기해 줬어.
너희가 로봇이든, 정말 400년동안 살아남은 인류든 우리가 온 행성인 알파 566으로 데려 가려고 온 건 아니라고 말이지.
이 지구를 떠났던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죽은 지 오래인데, 무슨 좋은 일이라고?
게다가 자리는 하나 뿐이란 말이야.
노아 양 :(도로시, 로이, 레이. 지구를 떠나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렇게나 생생한데.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이 라티나의 얼굴. 허공을 바라보는 듯 멍했다가 피어올랐던 그 기쁨. 차마 신호를 보내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떨린다.) 왜...?
그래서 기다렸건만, 이 행성의 기후가 너무 혹독한 탓에 244시간 동안 통신이 먹통이었어.
도로시, 로이, 레이. 지구를 떠나던 사람들.
휘청이는 몸을 따라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집니다.
노아 양 :... ...400년. (오작동이 아니었어. 오작동이 아니라... ...정말로. 수명이 다 된 것 뿐. 정말로...)
... ... ... (천천히 움직이는 손가락이 신호를 보낸다. 그것은 체념, 혹은 갈무리 지은 마음이 담긴 듯이.) [그렇군요.]
지구를 버리고 우주선을 탄 인류는 새로운 지구를 찾았고,
그곳을 '알파 566' 이라고 명명했으며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곳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모두 죽어 사라져버렸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노아 양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어째서...)
내부 통제실에 한 번 가봐.
그곳에서 또 다른 기기 작동 신호가 잡혀.
거길 막는 ai는 손을 써뒀어.
아주 낡고 단단한 프로그램이더군.
관리자의 솜씨인지.
노아 양 :(그 말에 홀린듯이 일어나 냉동수면실로 향한다. 이것은 내 자의인지, 저들의 명령인지. 단단히 닫힌 문을 여는 관리자 카드가 잘게 떨린다.)
도착해야 하지만 도착하고 싶지 않았던 곳의 문이 열립니다.
라티나의 관리자 카드를 인식한 문이 열립니다.
프로젝트 화면을 지나칩니다. 화면 속, 지구 내 생명활동 감지를 나타내는 불빛은 처음부터 모두 꺼져 있었습니다.
제니의 캡슐을 지나칩니다. 오작동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AI가 노아를 인지하더니 곧 익숙한 음성이 들립니다.
[내부 통제실 진입시 AI의 출입이 제한 됩... …]
당신의 눈을 가리고 기억을 숨기던 덩쿨들이 잘려나갑니다.
노아 양 :... ... (AI의 출입, 그 말이 유난히 생생하게 귀에 박히는 듯 했다. 내부 통제실에 인식 카드를 태그한다.)
인식 카드를 태그하기도 전에, 내부 통제실의 문이 열립니다.
라티나의 카드를 태그했을 때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겠죠.
얼어붙은 먼지들이 오랜만에 불어오는 외부 불빛을 환영합니다.
노아 양 :(라티나도. 내리깐 눈을 천천히 들어올린다. 내가 보고 싶던, 혹은 보고싶지 않았던 진실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온도가 노아를 감쌉니다.
마치 대피소 밖을 나온 것 처럼 온 몸에 한기가 듭니다.
금방이라도 또, 동상에 걸릴 것 같은 기분입니다.
노아 양 :(그냥 프로그램 오작동이었을까? 이 고통도, 떨림도, 전부... ...)
(천천히 통제실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이 모든 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거짓된 감각이라고 단정짓고 나면 추위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은 누군가에게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내부 통제실은 여태까지 봤던 대피소의 그 어떤 곳 보다 크기가 거대합니다.
대부분의 기계들이 추위에 얼어 붙었고 뚝뚝 끊어진 전선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습니다.
노아가 내부 통제실에 들어서자 깜박 깜박 불길한 경고등이 통제실 내에 가득 켜집니다.
음성 AI는 음이 엇나간 피아노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합니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아이처럼.
노아 양 :(하지만 라티나, 내가 보고 말았어요. 듣고 말았어요.)
통제실 화면
,
음성 녹음기
,
통제실 연구 보관함
이 보입니다.
노아 양 :... ... (통제실의 화면이 한 눈에 들어온다. 스크린을 눈에 담기 시작한다. 대체 뭘 묻어둔 거에요?)
통제실에 있는 수많은 화면 중 단 하나의 프로그램 화면만이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고유 정보가 화면에 인식되고 있습니다.
제니 | 미국 | 인간 | 동면 중 | 현재 의식 단계 4단계 | 대피소 생존 인류
그 아래 함께 나열 되어 있는 [우리들] 역시.
노아 양 :(스크린에 나열된 이름을 읽다보면,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노아 양. 라티나 그레이. ...우리들은.)
노아 | AI 인공 로봇 |대피소 생존 인류 후 개조
우리들에게는 인간이 살아있을 때 발생되는 생체 신호도 감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이 지구에서 살아남은 생명체가 없다고 생각한거겠죠.
400년동안 지구에서 동면되지 않은 채 살아가기 위해서 ….
더 이상 인류이기를, 인간의 모습을 선택하지 않은 겁니다.
노아 양 :(
AI 인공 로봇. 그 단어를 하염없이 읽는다. 인공 로봇.)
노아 양 :(
어쩌면 우리의 존재 의의는 우리가 아니라 여기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일까요? 스스로 던졌던 물음을 되새긴다. 나의 존재 의의는... ...)
SAN Roll
기준치: |
60/30/12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꼭 정말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노아 양 :(음성 녹음기. 아마도 마지막 인류의 기록일 그것. 허공에서 손이 돌다가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그렇다면, 노아가 기억하고 있는 그간의 기록은...분명 라티나의 손에 의해 꾸며진 것이었겠죠.
화면은 빠르게 변해서 지난 400년간 대피소 내부에서 녹음된 음성 화면을 띄웁니다.
동면에서 깨어날 인류를 위해 저장된 음성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
녹음 된 시기는 노아가 기억하고 있는 지구 멸망의 날.
라티나:안 합니다. 어차피 동면실을 관리할 관리자가 필요하던 참이었잖아요.
제니 :...그건, 그건 로봇들에게 맡기면 돼. 그들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르게
수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작동할 수 있어.
물론 대피소 전체의 관리를 로봇에게 맡기는 건 굉장한 도박이긴 하지.
그래도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죽는 것 보다는 나아. 인류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머지 않아 돌아올 겁니다.
노아와 제가 함께 있으니 괜찮습니다.
노아도 너도 사람이야.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상한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네 선택에 노아의 의견은 있는거야?
라티나:...만약 동면에서 깨어나도 소용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요.
라티나:당신과 그들이 동면 유효기간까지 동면을 유지했지만 지구는 여전히 가망성이 없고, 인류가 우리를 데려오지 않는다면요?
라티나:혹은 그들이 지구에 다시 돌아와도 우리를 데려 갈 생각이 없다면요.
(그럴 리가 없는데도, 화면 밖의 듣고 있는 이를 의식하듯 말을 멈춘다.)
그것 참...슬픈 말이네.
라티나:저는 최선을 다해 당신들을 관리하겠지만... 그들이 우리 모두를 데려갈 거라는 확신이 없으니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
그렇게 된다면, 그냥 우리를 비활성화 시켜줘.
우린 또 다시 절망하고 싶지 않아.
새겨진 과거라는 것은 현실의 누군가가 절망하는 것에 관계 없이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아니, 우리를 잘 부탁한다고 해야 하나.
너와 노아가 없었으면 좋겠어.
무슨 선택을 한 건지 바로 알게 될 테니까.
라티나.
제발 무모한 짓 하지마...
네게는 소중한 아이가 있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아도 저도.
죽지 않을 테니까요.
라티나가 무슨 선택을 한 건지 이제는 압니다.
지금은 노아의 기억으로부터 400년 후 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라티나를 붙들고 차라리 자신을 원망해달라며 울었던 날도.
노아의 기억이 400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도, 노아가 아직 자신을 인간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노아 양 :... ... ...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바스라진 줄도 몰랐던 기억들. 당장이라도 손 대면 먼지처럼 떨어져 사라질 시간의 꽃잎들. 가장 아름답게 피어올랐을 때 얼고 봄바람에 녹아 사라질 기록.)
(체내 수분인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 떨어져 흘러내린다. 녹슬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군요. 허공에 휘둘린 손이 <연구 보관함>이라 적힌 마지막 상자를 연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분명 눈물일 거예요.
기온이 낮은 내부 통제실의 장점은 연구 자료들의 훼손이 덜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작성한건지 모를 자료들은 대부분 인간과 로봇의 개조 특성에 대해 기재 되어 있습니다.
빽빽하게 저장되어 있는 보관함에서 <인간과 기계의 신체 결합 개조>에 대한 자료를 발견합니다.
어떻게 정복 인식을 처리하고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이 적혀있습니다.
적합한 개조를 위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키와 몸무게, 성별 정보가 필요했는지 수식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그 정보에 정확히 부합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는 ….
노아 양 :(라티나 그레이, 그리고 노아 양. 복잡하게 적힌 수식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필체를 보기 싫어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죠?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있나요? 당신과 나는 여전히 그 때와 같은 사람인가요?)
... (박스를 닫는 손이 무겁게 떨어져내린다. 그럼 나는, 우리는 이제... ...)
노아뿐만 아니라 라티나 역시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 되었죠.
로봇이 된 인간인 우리들은 인간처럼 고통과 미각, 후각. 청각을 똑같이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인식' 하도록 우리들의 내부에서 프로그래밍 된 결과일 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부품이 낡고, 고장이 났고 오류가 생기는 것을 꾸준히 관리 교체 해주면 로봇은 더 오랜 기간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라티나와 노아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대피소에서 구할 수 있는 부품이 모두 떨어지면... 라티나와 노아도 작동이 멈추겠죠.
노아 양 :(죽지 않는 것은 없다. 그것이 설령 로봇일지라도... ...그러다가 귀를 울리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다. 어디지?)
멈춰 있었던 음성 녹음 화면이 다시 작동됩니다.
음성 녹음 화면에 입력되는 날짜와 연도는 가장 최근입니다.
동면 캡슐에 이상이 생겨 노아가 다녀갔던 그 날부터 바로 며칠 전입니다.
제가 무모한 짓을 했다는 것, 압니다.
터무니 없이 편향적이죠, 제니.
이 자리에 깨어 있었다면 나에게 관리자를 맡긴 걸 후회할까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라티나 그레이:저한테는 더 이상 이 지구에서 노아만큼 ….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전망대 위에 네가 말했던 라티나 그레이가 있는 것 같아.
노아 양 :(움찔, 익숙한 목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메시지에 머리가 금방 반응한다. 라티나. 전망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저절로 발이 움직인다. 전망대로.)
생각이 닿은 다음엔 저절로 발이 움직였습니다.
눈이 내리는 건 이 지구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 눈보라를 보고 있으면 이제 모든게 끝인 것 같아요.
지구에 기대되는 미래 따위는 없고 최후에 남은 인류도 없습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지구가 버려졌다는 것과 우리 역시 버려진 존재라는 겁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세차게 내리는 눈 때문에 새겨진 발자국은 금방 새로운 눈 아래로 덮여 사라지지만,
라티나가 신발도 신지 않고 전망대로 걸어갔다는 것 쯤은 ….
제대로 옷을 입고 나오지 않아 두 팔과 다리.
뺨이 얼어 붙을 것 같이 차갑지만 이 통증 역시 인간이 느끼는 실제 감각이 아니겠죠.
모든게 얼어 붙을 것 같은 이 감정도, 지금 노아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요.
노아 양 :(사지를 얼어 부술 듯한 추위. 하지만 부서지지도 느려지지도 않는다. 내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한. 이 두 다리가 동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있는 한... ...)
(하얗게 부서지는 숨이 규칙적으로 허공에 흩어진다. 설령 이 호흡이 진짜가 아니더라도 숨쉬는 것을 잊지 않는다.) ...라티나.
부서지지도 느려지지도 않는 다리는 천천히 움직입니다.
이 계단이 왜 이다지도 높고 많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라티나가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요.
노아 양 :(어째서 당신은. 아무런 목적이 없음에도 우리를 살게 두었을까? 목적지 없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 얼어붙은 시간을 걷는 일이 사무치게 외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마침내 전망대 꼭대기에 다다른다. 인간의 숨결이, 감정이 녹아든 마지막 장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담는다.)
어째서 당신은 아무런 목적이 없음에도 우리를 살게 두었을까.
목적지 없는 길을 개척하고, 언 길을 걷는 일이 사무치게 외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면 그것은 가능성과 길이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가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은 봄과 가을의 시외도로를 끝없이 걷고 싶다고 말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를 살린 녹색의 다정함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 다정함으로 인해 아름다운 풍경이 존재하기에.
슬플 만큼 아름다운 노을이 버려진 행성 위로 가득한 눈을 눈부시게 비춥니다.
라티나 뒤로 겹겹하게 파묻혀 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옵니다.
...
잘못했습니다. 제가...
라티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는 사과였습니다.
노아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무엇을 봤는지 전부 알고 있는 것 처럼.
라티나의 부르튼 발과 멍이 든 것 처럼 푸르고 우울한 색으로 변해버린 다리가 보입니다.
노아 양 :(라티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상과는 다른 말에 잠시 어...하고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곧 이어 부르트고 얼어붙은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눈밭을 가르는 아픔조차 심장에 남은 상흔만 못하다. 언젠가 눈 속에 파묻힌 그를 털어내던 때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라티나를 들어올린다. 마치 상처가 진짜인 것 마냥 감쌌다가, 조금 비틀린 미소를 지어보인다.) 사과 받으려고 온 게 아닌데...
라티나 그레이:(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손끝을 꼭 쥔다. 거짓말에 재능이 있었다면 좀 더 오래 너를 속일 수 있었을까. 보다 오랫동안 평화를 가장할 수 있었을까? 낡고 오래된 프로그램을 몇 번이고 덧씌워 두터운 모형정원을 만들 수 있었을까. 뺨을 맞아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무슨 존재로 만든 것이냐며, 어떻게 이렇게 기만할 수 있냐고 소리를 질러도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왜...)
(어째서 이 사람은 내 상처만 보고 있는 걸까.)
(안아올린 품 안에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두서없는 말이 떨리는 음성을 타고 흘러나온다.)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라티나 그레이:제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도요, 노아...
노아 양 :... ... (지독한 조형을 가진 모형정원. 당신다우면서 당신답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직 생존을 원했다면 녹슬지 않는 부품을 쓸 것을. 귀찮은 기능은 빼버리고 오직 지구를 떠도는 안드로이드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게 아니라면 신체가 가진 결함이나 눈물 같은 부속 따위는 넣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새어나오는 눈물이 느껴질 때마다, 숨이 벅차오를 때마다, 비틀어진 안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흐릿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마다... ...엔지니어 라티나 그레이의 제작 의도를 절실하게 체감하고 만다. 당신은 인간이고 싶었구나. 인간으로 살아남고 싶었던거야. 네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중얼거리듯이 대답한다.) 신호를 찾았잖아요. 라티나.
...신호를 찾았어요. 당신의 손이 닿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주를 맴돌았을 신호를 받은 거에요.
적어도...우리가 있다는 걸 알았잖아요.
라티나 그레이:(그럼에도 감히 인간이길 꿈꿨다. 피부 아래에는 전선을 심고, 심장 깊은 곳에는 차갑고 단단한 엔진이 존재하더라도. 혈색이 도는 살갗을 움직여 피부를 만들고 브랜디 한 잔을 나눠 마시며 우리를 위해야 했다. 그렇지조차 못한다면 산산히 부숴질 것만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눅진한 물기가 느껴진다. 고개를 들면 비를 맞은 것처럼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자리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꾸고 싶지 않았던 것은 곧 녹슬 부품 뿐이었다. 짠 눈물, 벅차오른 숨을 가질 폐부. 빛나는 녹색 눈동자같은 것들. 당신 안에서 결코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이 다정함.) ...
...그 신호는.
멸망한 지구에서 우리는 수 세기를 살아 냈습니다.
라티나 앞에 있는 노아도 그렇게 되기 위해 만들어지고 개조 된 인공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라티나는 인간이었던 노아를 로봇으로 만들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변했습니다.
우리들을 …지구 최후의 인류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요.
라티나가 그토록 오래 스스로에게, 또 노아에게 물었던 질문을 들어 본 적이 있던가요?
아, 이 질문을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더라 ….
노아 양 :(아득하다. 그래. 카시오페이아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아득하다. 아니, 우리가 거기에서 출발한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시계 초침 소리로 가득 찬 방과 아름다운 분수 같은 것이 정말로 저 눈 밑에 잠들어 있을 것만 같다. 고개를 들자 창 밖으로 몰아치는 눈이 보인다. 단 한 번도 희거나 파란 것이 차가운 색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우리도 언젠간 죽게 되겠죠. 하지만 그 때까진 인간일 수 있지 않겠어요. 그야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우리 뿐인데. 지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가 있다면 응당 그것을 인류라 불러야 하지 않나요.
... (또 한참을 다물고 있던 입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미안해요. 라티나가 이렇게까지 아파한 줄 몰랐어요.
제가 도로시를 우주선에 태운 일이 라티나에게 깊은 흔적으로 남았다는 건 알았어요. 그런 표정은 처음 봤었거든요. 제가 그 일을 후회한 건 가족이 사무치게 보고싶을 때도 아니었고, 언젠가 저 주검들과 몸을 나란히 뉘이게 될 날을 상상할 때도 아니었어요. (잠시 그 때를 떠올린다. 눈물로 눈을 녹이던 날들.) ...라티나가 나의 슬픔과 절망으로 말미암아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죠.
언젠간 이 일을 제대로 사과해야지, 생각만 했는데 말할 기회가 와서 속이 후련해요. (내리트린 눈썹과는 반대로 입꼬리만 올려보인다) 엔지니어링 할 때 이런 정보도 나오던가요?
라티나 그레이:(내가 정말 카시오페이아였다면 이런 길을 만들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동화 속의 아름다운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런 생각에 잠겨 잠을 설치는 밤이 있었다. 그러다가도 고요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면, 웃음이 번지는 얼굴을 보면. 시간의 꽃을 훔쳐 온 아이처럼 품 속의 비밀을 갈무리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째서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왜 당신은 늘, 늘.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이렇게 쉽게 꺼내어 감각을 무너트리고 마는 걸까. 당신은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 (입술을 세게 깨문다.)
(안아든 품에 화라도 내듯 몇 번 두드리듯 밀어내다가, 곧 힘이 빠진 제 손을 애써 세게 쥔다.)
정말, 누가 사과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누가...
...어째서.
(손은 힘없이 흘러내린다.)
제가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것들을 헤아려 주시는 겁니까...
라티나 그레이:당신을 원망했을 리가 없잖아요.
(품 안에 힘없이 고개를 기댄 채로 중얼거린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 정보는요.
두려웠는지도 모르죠.
... ...노아.
제게 노아의 인식증이 있습니다.
라티나 그레이:그들에게 인간이었다고, 지구 최후의 존재라고 말한다면...
당신을 데려가줄 텐데.
나는 드디어...
(품 안에 기댄 고개를 들면, 과열된 뺨과 눈가 위로 눈송이가 투명하게 녹아든다. 그렇게밖에 흘릴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듯이.)
당신을 우주로 보낼 기회를 얻었는데...
여기 머물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노아 양 :하나만 남은 우주선 자리에 말이죠?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400년 전에 잃어버린 티켓을 이제서야 돌려받다니, 그것도 불완전하게. 매일같이 슬픔에 잠겨 살게 될 거에요.
제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아의 슬픔과 절망으로 말미암아 제가 단단해졌다면, 또 다른 슬픔과 절망에도 부숴지지 않게끔 성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노아 양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감정이에요. 더군다나 여긴 해도 잘 안 들잖아요.
이제 지구를 받치는 아틀라스라곤 우리 둘 뿐인데, 한 명이 빠지면 손실이 크니까... ...그리고 저는 여전히 기록관이고요.
(기록관, 그 단어를 내뱉으면 기계 심장이 묵직해진다. 이 땅에서 뜰 수 없게 내린 닻이 단단하게 걸리는 것이 느껴지면, 눈가 위로 녹아든 눈송이를 어설프게 닦아내며 묻는다) 돌아갈까요? 집으로.
(어설프고 다정한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속눈썹이 느리게 저물었다가 떠오른다.)
함께 돌아가는 겁니까?
노아 양 :물론이죠, 같이. 설마 그 다리로 더 걸을 생각은 아니었죠?
걸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걷는 건 안되니까 업히는 건 어때요?
노아 양 :...팔 아픈 것도 프로그래밍이에요? 아니면 진짜 엔진 과부하가 오고 있는 건가?
라티나 그레이:그런 건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
뭐.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긴다.)
등 좀 빌리죠.
노아 양 :제작 의도라 이거군요...? (결국 웃어버리며 몸을 굽혀 라티나를 내려주고, 도로 등을 내준다.)
라티나 그레이:(눈을 깜빡이다가 등에 업혀 목에 팔을 감는다.)
(묵묵히 말이 없다가 중얼거린다.)
...노아.
노아 양 :(라티나를 업은 채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고, 중간 창문을 통과할 때 즈음에 고개를 슬쩍 돌려서 쳐다본다) 네?
라티나 그레이:...오랫동안 고민하던 것이 사르르 풀려버려서 어리둥절합니다. (걸음을 따라 목소리가 흔들린다.)
...어쩌면 그저 간단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
고맙습니다.
노아 양 :하룻밤 꿈처럼 말이죠. (푹푹 발이 패이는 눈을 헤치고 걷다가 웃는 소리를 내면 등이 같이 조금씩 울리다가)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목을 감은 팔을 따라 흔들리는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꼭 쥔다.)
...
노아가 지켜봐주세요.
제가 푹 잠드는지.
노아가 인간이었을 시절 살았던 지구는 이곳에 있고 라티나 역시 이곳에 있습니다.
더 이상 전망대 위에서도 보이지 않는 발사지를 매일 바라보며 라티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400년동안 라티나에게 중요한 존재는 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함께 있을 존재도, 서서히 멸종되어 갈 존재도.
아이처럼 떠는 라티나의 얼굴은 인간이 아닌 노아가 보기에도 조금은 인간 같아 보입니다.
설령 우리가 내일 이 행성 위에서 얼어 죽더라도.
400년을 기다렸던 인류의 전파가 멀어져 갑니다.
무선 전파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을겁니다.
그 말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라티나와 노아마저 없다면 정말 외로울 것 같으니까.
노아 양 :(이 행성을 잠재우는 것까지가 우리의 일이라면. 그리고 행성의 파수꾼을 지키는 것이 나의 존재 의의라면 그것을 다 할 수 있도록.)
그럼요, 쭉 지켜보고 있을게요. (눈 속에 파묻혀 눈 감을 날을 떠올려도 무섭지 않은 건 이제 우리가 기계심장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라티나 그레이:약속한 겁니다. (웃음과 걸음을 따라 편안하게 흔들리는 등 위에서 느리게 눈을 감는다.)
(아, 어쩐지 이 새벽은 날카롭지 않을 것만 같아.)
지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자가 있다면 응당 그것을 인류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진작 멸종되었어야 할 지구 위 최후의 인류입니다.
살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지구를 떠난 과거의 인류보다 지구를 사랑하는 ….
모모와 카시오페이아가 걸어온 빛나는 길에 축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