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새 시대를 피해 달아나는 희비의 가운데...
위례청 앞은 그야말로 시위의 광장입니다. 이젠 특별할 일도 아니죠.
오늘은 어떤 사이비 자식들이 국가의 녹을 받는 공무원들에게 비난을 쏟고 있을지.
태길은 조악한 피켓과 고함 사이를 지나쳐 갑니다.
박태길:예 여기 돌연변이 지나가요. (띨빡이들아)
아무렴, 98년도 수해에서 흙 퍼다 나른 게 누구신데.
태길이 건물 입구를 지나면 눈에 익은 풍경이 보입니다.
간격을 두고 배치된 화분들, 물씬 풍기는 종이 냄새.
안면 있는 직원들이 태길을 향해 인사하며 저마다 목적지로 걸어갑니다.
박태길:좋은 아침~ 입니다아~ (흥얼거리는 톤으로 대강 인사하면서 사무실로 향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내리면 반듯한 명패가 걸린 방이 있습니다.
박태길:(형식상으로 완전 대충 노크하고 문을 연다)
아니 일단 돌아좀 보지. 왔다니까요.
:최근 시청률 50%를 찍은 주말 드라마... <닿을 수 없는 당신>이군요.
센티넬과 가이드의 운명적인 사랑을 세련되게 표현한 드라마입니다.
박태길:(갑자기 좀 밖에서 시위하는 애들 편들고 싶어짐)
정기현:왜 황수정이한테 노란 머리를 시켰지...하나도 안어울리지 않어?
(TV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몇 박자 늦게 태길을 본다.)
박태길:팀장님이 이러시니까 아랫물이 흐린거야. 근무시간 아니에요? (꺼버리려고 눈으로 리모컨 찾는다)
박태길:근데 쟤도 이미지 변신 해야지 뭐. (맞장구치며 잽싸게 전원버튼을 향해 손뻗기(
(내 민첩이 이긴다면 끈다!)
박태길:
민첩
기준치: |
60/30/12 |
굴림: |
2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정기현:
민첩
기준치: |
50/25/10 |
굴림: |
2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박태길:
민첩
기준치: |
60/30/12 |
굴림: |
4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정기현:
민첩
기준치: |
50/25/10 |
굴림: |
100 |
판정결과: |
대실패 |
정기현이 기척을 눈치채고 잽싸게 리모컨을 치우려 하지만...
웬 걸? 팔을 너무 크게 휘두르는 바람에 책상 위에 있던 종이더미만 우수수 쏟아집니다.
(만족스럽게 사무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정기현:하- (욕이 이빨 근처까지 튀어나왔다가, 자기 탓이라 뭐라고도 못하고 궁시렁거리며 종이 쪼가리를 줍는 신세가 된다.)
하, 허리야...
박태길:그 몸도 오늘내일하시는 분이 뭘 피한다고 움직여서 그래요.
정기현:(드디어 태길 쪽으로 몸이 돌아오더니) 정호걸이는? 같이 안 왔나?
박태길:(그래도 마주 쪼그려앉아 주워준다. 착하니까.)
그러게? 먼저 와있을 줄 알았는데.
그 양반이 웬일로 나보다 늦나 모르겠네.
택시 같이 타고 올랬더니 알아서 한다길래 그러라 했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노크도 없이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립니다.
정호걸:(문을 열자마자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가,) 아. (열린 문을 두 번 노크한다.)
왔습니다.
박태길:(기현을 향해 큭큭큭 웃는다) 이럴때마다 말하면 너무 재밌지 않아요?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
박태길:웬일로 늦었어? 앉아, 앉아. (주운 종잇장 대충 책상에 올려두고 자기 사무실처럼 소파에 앉는다)
두 사람이 소파에 앉으면, 정기현은 고개를 저으며 상석에 풀썩 앉습니다.
정기현:그래, 이제 아주 이불도 펴고 자. 하여튼 둘 다 왔으니까...
박태길:호걸 씨는 황수정이 노란머리 한 거 어떻게 생각해?
정호걸:(황수정이 누군데? 하는 표정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아, 탤런트요.
한다믄 허는거지... ...노란머리해서 뭔 일 생겼대요?
박태길:응. 팀장님이 그거때문에 부르셨대.(아님)
너무 안어울린다고.
정기현:중요한 일 때문에 부른거야. 너네 들으면 못 웃는다.
정호걸:(어깨를 으쓱인다. 미리 웃어둬야되나? 입꼬리 올리기.)
그러면서 정기현은 두껍지 않은 서류철 하나를 꺼내 태길에게 내밉니다.
정기현:읽으면서 들어. 어차피 내용은 똑같으니까...
박태길:(소파 등받이에 등 기대고 팔랑 종잇장을 넘긴다)
정기현:근 일주일 새 가이드가 둘이나 사라졌다.
일단 윗선에서는 연쇄 실종 사건이라고 부르는데...그 명칭이 맞는지 어쩐지는 차치하고.
처음 사라진 애가 서정현이다. 김재욱 파트너. 뒷장에 정보 넣어뒀으니까 보고.
박태길:재욱이 싫어서 튄 거 아니고? 그럴 때 됐다고 생각했는데.
정기현:화재 진압 임무에 나갔다가 귀환 중에 증발했어.
튄 거면 낫지. 재욱이가 고개 돌린 시간이 딱 5초다. 5초.
앞에 보고, 그 잠깐 사이에 기척도 없이 없어진거야.
내가 뭐라고 쓸까,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가...증발 말고는 어울리는 단어가 없더라.
박태길:(진짜 못웃겠네. 허리를 앞으로 수그려 좀 더 신중하게 서류철을 본다)
순간이동... 그런 거 하는 센티넬?(혼잣말)
정기현:이러고 일주일도 안 지나서는 윤지서가 없어졌어.
박현수랑 공명한 사이인데...정호걸이는 몇 번 봤을걸. 현장이 현장이라.
정호걸:예, 뭐... (서류철에 적힌 이름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둘 다 현장이탈할 사람은 아닌데.
정기현:현장 아냐. 박현수가 신고했어.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고.
집도 살림살이는 고대로 남고 사람만 싹 사라졌다 이거야.
이쪽은 목격자가 없으니까 더 곤란하지.
1999년 12월 14일, 가이드 서정현. 화재 진압 임무 종료 후 귀환 중 증발.
1999년 12월 20일, 가이드 윤지서. 박현수의 신고로 실종 사실 확인. 증발로 추측.
정기현:경찰은 무슨. 위례청 사람들도 잘 모를거다.
저기들 소속되어 있던 위례지방청 사람들은 알고...
일단 퍼트리지 말라고 기밀 해 놨어.
위에서도 얘기 퍼지기 전에 해결하라 하신다.
우리가?
(호걸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거듭) 우리가요?
박태길:나 이런 중대사에 숟가락 올릴 짬밥 아닌데.
(태길을 가리키며) A급. 말 잘하고.
(호걸을 가리키며) A급. 지서현수네랑 안면 있고.
(두 사람을 에둘러 가리킨다) 네들 담당이 나고.
박태길:(아니라고 해줘. 라는 눈으로 호걸 본다. 이미 다 전달받은 거 발 뺄 방법은 없겠지만....)
정호걸:(태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성실한 낯짝을 하고 있다.)
정호걸:하라믄 하는데. 읎어진 사람을 으쩐 수로 찾는대요. 팔도강산 뒤질 거 아니면은.
박태길:이 엄동설한에 우리를 사람 찾으라고 대로변에 내쫓겠다 이거예요?
그래, 어떻게 찾아. 증발을 했다면서.
정기현:대로변 아냐. 아주 지방으로 내쫓아 버릴거야.
김재욱이 상주에서 조사 받는 중이다.
찾는 건 고사하고서라도 어떻게 된 건지는 알아야지. 이렇게 하나 둘 사라지다가 가이드 부족해지면 위례청도 끝장이야.
해결까지 하면 좋고...
박태길:(경상도를 가라고... 아이고 두야.)
진짜 우리가 적임이라고 위엣분들이 생각을 하신다 이거예요?
막, 실적 올리려고, 제가 하겠습니다! 이러고 우리한테 짬처리하고, 그런 거 아니지.
정기현:아니, 내가. 위엣 사람들은 누가 뭘 어떻게 처리했는지 하나~도 관심 없다.
청장있고, 부청장있고, 지부장있고, 그렇게 타고타고 떨어지다보면...
직급자 발끝인 팀장한테 오게 되어 있는거야.
팀장이 그런거야... (한숨처럼 내뱉으며 눈두덩을 꾹 문지른다.)
조사하면서는 뭐 좀 나왔대요?
그 전에 협조는 했대? 짝꿍이 증발했다는데 그 성격에.
정기현:몰라들, 아침부터 바쁘다고 저녁에 연락한다데.
재량에 맡긴다.
내가 이래서 팀장님 좋아해요.(반어법)
일 이상해지면 난 무조건 팀장님 이름 댈거야. 그것만 알아둬요.
정기현:그래, 돌아와서 아주 내 머리 된통 깨지는 거 구경하고 초도 꽂아서 축하하고 그래라.
정기현:빌릴 차 남아있음 가져가라. 지원부에다가 물어봐가지고. (그러더니 무언가를 마무리하듯 탁, 책상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친다.)
옥상 가자. 한 대 태우게.
박태길:(일어서면서 믿을 수가 없다는 눈으로 호걸을 본다. 정말 불만이 없니? 이런 상황에?)
정호걸:(태길의 시선에 뭐가요? 하듯이 쳐다보다가) 아, 저는 안 핍니다.
박태길:가자고, 가자. (어깨 감싸 끌어당긴다)
추운데 바깥까지 나와서 담배를 태운담, 생각하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볼 즈음에...
화질이 낮은 인화 사진. CCTV 기록을 인화한 것 같은데...
모자를 푹 눌러 쓴 여성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진입니다.
정호걸:(옆에서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윤지서 씨네요잉, 요거.
(아무튼 빤히 보는 중)
증발 추측이라고 서류에까지 써놓지 않았던가요.
없어지기 전에 찍힌 거예요?
정기현:내가 이래저래 알아보다가 찾은 거 뽑아온거야.
내 생각에는... ...
윤지서는 증발이 아니라 실종같다. 자발적으로.
그럼 둘이 묶일 게 아니잖아. 연쇄라면서요.
*서정현이랑 윤지서랑
윤지서가 발이 넓어. 그런데 박현수가 말하기로는...요즘 서정현이랑 연락을 여러 번 했댄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 담배 길이만 줄이다가 다시 한 번 입을 연다.)
이거는 그냥 내 직감이야. 직감인데.
위례청 안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게.
위에는 윤지서 찾았다고 말 안 했어. 괜히 들쑤셨다가 맘먹고 잠적하면 안되니까. 그 네 명 사이에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아.
박태길:(허. 담배연기 대신 입김이나 길게 분다.)
둘이 모종의 공모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서정현이 증발했다?
정기현:모르지. 공모인지 뭔지. 하여튼 결과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어, 지금은.
괜히 내가 이런 말 했다고 속단해서 취조하지 말고. 가능성.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으라고. 모든 상황에 대한 가능성을.
박태길:가이드가 남몰래 없어져야 할 일이 뭔데? (괜히 가이드인 호걸 한 번 보기)
그러니까 이게 20일 이후에 찍힌 거라는 얘기잖아. 며칠, 어디서 찍힌 건데요.
정호걸:그럴 일은 읎죠. 파트너가 있음 더더욱 그렇고.
사람 하나 골로 보내고 싶은 거 아니믄...
박태길:자기가 말하면 뭔지 몰라도 되게 진심같으니까 그런거 살살 말하랬지.
정기현:20일 밤. 윤지서네 집에서 좀 떨어진 상가 CCTV야.
정기현:하여튼 내가 알아본 건 여기까지다. 괜히 너네 고른 거 아니야.
상황에 따라 유도리 있게 움직일 줄 알아야지, 뭘 해결하려고 하면...
가끔은 선을 벗어나게 될 때도 있는거고...
정기현은 거기까지 말하고 담배를 비벼 끕니다.
정기현:나 이거 공식적으로 말한 거 아니다. 비공식적으로. 오프 더 레코드.
박태길:(듣는동안 좀 딱딱한 표정이었다가 씩 웃는다) 그치. 제가 또 줄타기는 잘하잖아요.
정기현:엑셀, 브레이크. (태길과 호걸을 번갈아 가리키더니) 운전 조심히 해서 가. 이상한 거 박지 말고. 상주 멀다.
보고있다, 하듯이 샥샥 자기 눈을 가리키고 정기현은 먼저 옥상을 빠져나갑니다.
정호걸:(내가 브레이크? 하듯이 마찬가지로 갸우뚱한다.)
해석은 실패했지만 선발은 잘 한 것 같습니다.
박태길:(가만 섰다가 담배 한 대 꺼내 불 붙인다.) 그럼 일단 상주로 가고...
(가기싫어죽겠는표정)
정호걸:운전 제가 할텡게. (이번에는 저도 담배를 한 대 꺼내 문다.)
박태길:아니 뭐 아는 것도 없고 확실한 것도 없고 보장해주는 것도 없고 그냥 일단 가래. 걔네 보나마나 눈이 세모일건데.
박치기 엄청 해야겠네...
정호걸:맨 현장만 나갔지 수사는 안 혀봤는데 이래 경험하나 싶습니다.
태길 씨가 잘 허시겠지만은...
박태길:(당장 있는 정보를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굴려보지만... 모르겠다. 가봐야 뭘 알아도 알지.)
그래도 하나 신나네. 사고쳐도 된다잖아.
갑시다. 운전 자기가 한댔다.
태길과 호걸은 지원팀에서 위례청 소속 차를 한 대 빌립니다.
기름값 뿐인가요? 식사도 아주 호화롭게 먹어주지.
(숙소도 비싼데로 잡아주마)
정호걸:(얌전히 운전을 하다가...뭔가 생각났는지 아아, 하고 감탄사를 낸다.)
윤지서씨가 왜 읎어졌는지 알 것 같기도 허고요.
정호걸:윤지서 씨가 가이드 일을 그래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셔가지고.
박태길:...퇴사를 못하니까 잠적으로 갔다고?
어떻게 아는데? 얘기하고 다녔어요 윤지서가?
정호걸:긴급팀에 있으믄 재해 쪽 나가는 사람들허고 자주 만나는데요. 매 현장마다 현수 씨 가이딩을 한 번 씩은 해드립니다. (횟수를 세어보듯이 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한다.)
윤지서 씨랑 안 친한지 으쩐지. 둘이 있으믄 매 뭐 씹은 표정 하고 있응게 말은 안 혀도 모를 수는 읎죠.
박태길:(허허) 그런다고 짝꿍 버리고 하루아침에 날른다는 게 말이 되나.
일이 일이지, 누구는 뭐 그렇게 좋아서 한다고...
...뭐 아주 과잉으로 열심이었던 사람 하나 알긴 하는데.
정호걸:긍게 싫어는 해도 날라버릴 사람은 아니니까는...누구요?
글쎄요?
박태길:많이 변하셨어요? 딴청도 피울 줄을 아시고.
박태길:(냅다 물꼬 돌리기) 파트너끼리 사이가 영 안 좋았다? 접수. 박현수도 만나보긴 해야겠네.
근데 윤지서가 성격 좋다고 그러지 않았나. 박현수는... 그거 돌부처 과인데. 마찰이 있었다는 게 묘하네.
정호걸:(룸미러로 태길을 한 번 더 쳐다봤다가 다시 정면을 응시한다.) 둘 다 좋은 분이시죠잉. 상성도 잘 맞으시고.
(말 그대로 둥근 돌 두 알 같은 사람들이라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 없다.)
돌부처도 깨지나보지요.
박태길:정작 물어보지를 않았다. 호걸씨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윤지서가 박현수 불편하고 가이드 일이 싫어서 도피했다?
그럼 서정현이랑은 연결고리가 어떻게 되는 걸까. 고민상담?
정호걸:서정현 씨는 제가 잘 모릅니다. 이유는 몰러도 두 사람이 사라진 시기가 워낙 비슷해버리니까... ...
관련이 읎을 수는 읎겠죠잉.
(암만 힘들어도 파트너를 두고 도망칠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한 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간다.)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두 사람은 큰 지체 없이 상주에 도착합니다.
위례청 상주 지부. 소도시인지라 규모가 작습니다.
소속 센티넬과 가이드도 중장년층이 많고요. 대체로 현장 인력들은 상주보다는 옆 도시 순철 지부에 가 있습니다.
주로 지방 치안 관리나 취조가 이루어지는 곳인데...오늘은 나와있는 인원이 적기라도 한 건지 조용하군요.
박태길:(....중요한 걸 확인을 안 했다.) 우리 온다고 얘기는 되어있는 거 맞나?
정호걸:... ...설마 그런 것도 안 허셨을라고...
이렇게 출장을 오면 관리자나 사건 담당자가 마중을 나오는데.
심지어는 두 사람이 건물에 들어가서 본 데스크에도 안내 직원이 없습니다.
(어차피 사람도 없는 거, 데스크 안으로 들어가본다.)
(그런 거 있지 않나 연결 접수 전화...)
데스크 안내직원의 자리...에는 먹다 만 믹스커피가 올려져 있습니다.
박태길:느낌이 더 안 좋아. (호걸을 향해, 먹다 만 믹스커피 들어올려보인다)
정호걸:(종이컵 겉을 손가락 끝으로 눌러본다.) 얼마 안 됐네요잉.
박태길:(오, 지부 인원 통째로 증발, 이런 건 아닌가보다. 다행.)
직원:(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허겁지겁 뛰어와 두 사람을 보더니) 허억, 헉...헉, 그. 본부에서...오신다는?
(그리고선 대답도 듣지 않고 두 사람을 향해 휘적휘적 손을 내젓기 시작한다) 두 분 중에 어느 분이 가이드세요?
박태길:아이고, 이렇게 서두르시지 않아도... (하다가 말이 끊긴다)
가이드는... (엄지로 호걸을 가리킴. 근데 왜?)
정호걸:(다급한 직원의 손짓에 손을 들어보인다.) 전데요. 뭔가 문제라도.
직원:아, 예. 예. 정호걸 씨군요. 그럼 이쪽이 박태길 씨...하여튼 제가 내려가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다짜고짜 호걸을 붙잡고 자신이 달려온 복도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깁니다.
(따라는 가겠는데)
뭔데요? 이봐요.
직원:두 분이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지하에서 김재욱 씨를 조사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1시간 전부터 계속 난동을 부리고 계셔서 취조실이 얼어붙기 직전입니다. 예.
지금 직원들은 다 대피했는데 상주청에는 김재욱 씨만한 센티넬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지하 2층입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도 거의 쉬지 않고 상황을 와다다 내뱉는다.)
보통 위례청은 본청, 지방청을 가릴 것 없이 건물에 제어 장치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박태길:아니 미리 지원 인력을 부르고 신문을 하든가말든가 짝꿍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면 멀쩡한 양반도 뇌가 돈다고(따라서 와다다)
내부에서 이능력 제어 불능으로 인한 사고나 테러를 예방하기 위한 장치죠.
직원:아니저희도이게...이게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직원:그게...그게 작년까지는 작동이 잘 되다가요.
여름 지나고서부터 되다말다...
직원:이게 또 그걸 갈려면 매설 공사를 새로 해야되는데...아니, 제어 장치가 문제가 아니고요. (문제다!)
결론은 망가진 제어장치를 대신해서 김재욱의 폭주를 막아달라는 말이군요.
정호걸:(직원의 변명은 흘려 듣고, 어느새 직원보다 앞장서서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왼쪽 방이요, 오른쪽 방이요.
혼자 가서 뭐 어떡하게 폭주 직전이라잖아!
취조실이 있는 층까지 내려오면, 바깥보다 심한 한기가 갑자기 온 몸을 덮칩니다.
박태길:북어포 될래?! (하다 냉기에 숨을 삼킨다.)
정호걸:(정도를 가늠하듯 잠시 멈춰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북어포 되기 전에 끝내믄 문제 없습니다.
80년대부터 위례청은 센티넬과 가이드의 범죄 사무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취조실은 두 사람에게 아주 낯선 공간이 아니지만...이런 광경은 처음이군요.
반투명거울 너머에 있는 취조실 안쪽은 완전히 얼어붙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흥분한 김재욱이 한기를 발산하는 것이 보이네요.
취조실과 바깥 방을 연결한 틈새를 따라 쩌적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박태길:(골아프다... 앞머리를 쓸어넘겨 쥐었다가 놓는다.) 들어갈 수 있겠어?
정호걸:얼어서 문이 잘 떨어지기는 할 건데... (가만히 문 틈과 천장, 김재욱에게 한 번씩 시선을 준다.)
해보겠습니다.
박태길:(생각해본다. 이 상황에 최악의 전개가 뭔가 하고... 정호걸이 들어가자마자 김재욱이 더 날뛰어서 이대로 셋 다 고드름이 되는 거?)
태길은 찬찬히 김재욱의 이능력 방향을 살펴봅니다.
보아하니 김재욱은 온 몸을 냉동고처럼 활용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박태길:(그러면서 본인은 추위를 느끼지 않고?)
박태길:
이능력 Roll
기준치: |
70/35/14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아니 근데,
그냥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는거야?
(아 추워. 팔짱 끼고 어깨 움츠리고 있다.)
정호걸:(들어가서...실수 없이 진행만 하면 큰 부상 없이 끝내겠다. 속도전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다가 태길의 발언에 고개를 돌린다.) 예?
여 지원도 잘 안 옵니다. 멀어가지고. 빨리 끝내야죠잉.
아니 그니까(코훌쩍) 너무 당연하게 바람피울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요... 내입장에서는 별로 보고싶지가 않다는거지.
살려만 놓으면 되는 거잖아. 말 할 수 있게.
그정도는 나 혼자서도 될 것 같은데.
정호걸:(
바람? 살려만 놓는다? 혼자서? 태길의 말이 이어질수록 미간이 비틀어지다가...마지막에는 좁아진다.) 뭘 으쩌시게요.
박태길:지는 안 얼어죽는다고 저러고 있는건데... 얼마나 추운지 좀 알려주면 되지 않을까?
이능력 Roll
기준치: |
70/35/14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에잉)
정호걸:거 하지 마쇼잉. 잘 풀어놔도 얘기 할까말까...
박태길:(라고 말하는 사이 뭔가 이미 저질렀고...)
태길이 이능력을 사용하면, 호걸이 그 기류를 감지하고 우뚝 말을 멈춥니다.
상실감, 모멸감, 무력감...온갖 감정이 한 데 뒤섞인 돌풍이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튀어나갑니다.
어느 한 가닥을 잡아 제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군요.
김재욱이 간섭을 느꼈는지 건물이 떠나가라 고성을 지릅니다.
정호걸:(하지말라해도,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시간도 없다. 팔을 걷어붙이고 몇 발자국 물러났다가 김재욱의 고성이 끊기는 순간 얼어붙은 문을 까고 들어간다.)
완전히 얼어버린 경첩이 빠그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갑니다.
김재욱의 시선이 문가로 돌아오는 순간, 호걸이 곧장 달려들어 그의 목을 팔로 감아올립니다.
박태길:(아 보기싫어. 자기가 사고친 건 생각도 안 한다.)
대충해! (안들리겠지만 소리치기)
재욱의 등을 무릎으로 눌러 제압하고, 어느 정도 가이딩이 이어졌을까요.
열린 문 틈새로 나오던 한기가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곧 호걸이 손짓하자 문 밖으로 피신해있던 보안요원들이 김재욱의 양 손에 제어구를 채웁니다.
박태길:(추위가 가시는 게 느껴져 어깨에서 힘을 좀 뺀다. 보안요원들을 따라 취조실 안으로 들어간다. 김재욱의 면상을 좀 보자. 무슨 꼴인가.)
김재욱은 두 눈에 실핏줄이 터져 불거져 있습니다.
며칠 잠을 못 잔건지 머리도, 행색도 엉망입니다.
박태길:(혀를 찬다. 거 심경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왜 괜히 사달을 내요. 해결될 것도 없구만.
박태길입니다. 서울지부에서 왔어요. 도움 드리려고.
김재욱:(씩씩대는 숨에서는 더 이상 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도움? 무슨 도움.
무슨 도움! 이미 정현이는 사라지고 없는데 무슨 도움!
박태길:거 뭐야, (호걸과 재욱을 두고 손을 휘휘 젓는다.) 빨랑 떨어져. 둘이 떨어져.
김재욱:씨발, 싹 다 똑같이 당해야 돼. 평생 함께 있는다면서, 썅. 뭐가 평생이고 뭐가 함께야...
정호걸:(김재욱의 손에 제어구가 채워진 것을 확인하고 물러난다.) 일단 자리 옮기시죠. 여 앉을 의자도 읎는데.
박태길:(정신머리가 엉망진창이네. 이런 걸 거둬맥이려다가 도망가고 싶어졌대도 이해가 될듯한...)
그럴까요? 그래 좀 따뜻한 데로 가자.
입이 녹아야 말이 나오지 이건 뭐.
보안요원들이 김재욱을 끌고 맞은편 취조실로 이동합니다.
여긴 좀 낫군요. 한기가 다 안 빠지긴 했어도 얼어있진 않으니까요.
정호걸:(그새 직원에게 따뜻한 수건 몇 장을 부탁해서 팔에 둘둘 감아놓았다.)
박태길:(드르륵 의자를 끌어 먼저 앉는다.) 누가 커피나 코코아나 그런 거 좀 뽑아다 줄래요? 저기 일층에 자판기 있더만.
태길의 부탁에 직원이 잠시만요, 하고 방을 빠져나갑니다.
박태길:(호걸에게) 괜찮아? 손가락 얼고 그런 거 아니지.
정호걸:오래 안 닿아서 괜찮아요. 찬 기만 좀 빼믄 또 금방 가라앉고 혀서. (수건을 풀어서 빨갛게 일어난 팔을 보여준다.)
박태길:(에에잉. 영 안 좋아보여 인상을 좀 구겼다가 편다.)
정호걸:(그러다가 이내...잊고 있었다는 듯이 태길을 쳐다본다) 사고 치랬다고 이래 바로 칩니까?
박태길:(눈을 들어 마주본다. 나야말로 할말 많다는 표정.) 그러게 누가 그렇게 외간 센티넬한테 정신이 팔리래요?
정호걸:(
외간 센티넬이라는 단어에 눈썹을 비튼다. 이걸 뭐라고 대응해야 하나, 하는 듯한 표정.)
위급상황이잖습니까.
박태길:그니까 내말은, 내가 그걸 모르냐고. 내가 두 눈 뜨고 있는거를 알았으면 한 번 돌아나 보고, 괜찮겠냐 정도는 물어보고, 그랬으면 내가 다른 생각 해?
정호걸:(그 소릴
정실같은 단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어딨나?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한다.
그렇다고 평소에 가이딩을 성실히 받는 것도 아니면서... 같은 생각이 가장 위로 올라오는 것을 참고...) 물어봤음 허락은 혀 주시고요?
박태길:(어어 올라오네, 꼬라지 올라오네. 참나.) 허락을 안 해줄까봐 안 물어봤다? 한 번 물어본 적이나 있고 말하지?
자기가 지금 긴급반이야? "내" 가이드잖아.
정호걸:(사고의 방향이 여전히 긴급반이다, 하면 솔직히 변명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건
내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제대로 했을 때 나올 말 아닌가.)
태길 씨만 봐드리다 감 다 잃을까 싶어서요.
박태길:(이게 뭔 소린가. 어떻게 해석을 해야되나. 잠깐 눈을 감았다 뜬다.)
감?
감이라고 그랬어? 맞게 말한거야?
정호걸:(멀뚱하니 태길을 보다가) 예. 감요.
박태길:(허허) 방금까지 위급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신 거 아니었어요? 굉장히 언제고 바랐던 일이라고 들리는데.
정호걸:(태길의 말에 잠깐 눈이 둥그래진다.
내가?) ... ... ...
(그랬다가 곧 고개를 돌리더니 제 턱을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한다. 그랬나? 그런건가? 그래서 그런건가? 미간이 좁아지다가 조금 난처한 표정이 된다.)
뭐 깨달았다는 표정 짓지 말아보지?
정호걸:...아닙니다. (금방 표정을 풀려고는 하는데 조금 천천히 지워진다.)
박태길:뭐가 아닙니다야 다 긍정해놓고... (황당해서 볼사탕을 굴린다.)
자기가 말하는 감이, 그게 어디에 필요한데요? 나 못해줄까봐 연습했다 이런 게 아니잖아 지금?(그게 맞다고 해도 말도안되게 이상하지만.)
정호걸:(안색이 사악 바뀐다. 짧게 한숨 비슷한 것을 쉬었다가) 필요할 때가 오겄죠. 태길 씨가 잘못되어버리믄 말마따나 저 밖에는 읎으니까.
그 때라도 도움이 되어야 허지 않겄습니까.
박태길:(그때라도가 무슨 소리야. 왜 지금은 도움이 안 되고 있다고 말하는데?... 뭔가 깊게 놓쳤다는 느낌이 있지만 감 잡히지 않고 빈정상한 게 우선이다.) 이 얘기 결론이 뭐지. 앞으로도 이럴 거다?
(김재욱을 돌아본다.) 들은 사람이 판정 좀 해주자. 이 상황에 내가 이런 소리 듣는 게 합당하겠어요?
김재욱:(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려 태길을 바라본다.) 둘 중 하나 뒈져보면 알게 돼.
박태길:(눈 마주친다. 대충 앞에서 투닥거리고 있으면 맥빠지지 않으려나 하는 계산도 있었는데 역시 그렇게 가볍진 않은가보다.) 당신 파트너 없어진 거지 죽은 거 아닌데. 왜 먼저 고사를 지내고 있어.
나도 같은 상황이면 눈깔 돌아가긴 했을 겁니다. 그래도 힘써보려고 온 사람들한테 좀 도움될 말을 해야되지 않을까? 영영 그렇게 눈 뻘개져서 있고 싶어요?
김재욱:수사반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고... ...나 대신 대한민국 다 뒤져서 정현이 찾아주려고? (아니꼽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가)
그렇게 말 없이 사라질 애 아니야. 못 찾아. 진짜 없어진거야, 그냥...
박태길:(쯥 입을 다신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구석 없었어요? 하다못해 본인한테 원한 품은 사람이라도.
그쪽을 어떻게 해보려고 파트너를 건드렸다, 이런 전개 있을만 하잖아.
김재욱:(몸을 기울여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본다. 서정현의 마지막 순간들을 떠올리듯이.) 정현이가... ...
걔가 자주 아파. 특히 해 넘어갈 때 되면 꼭 열감기에 걸려서...
이번에도 영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니까 크리스마스까지만 딱 바쁘다, 그거 끝나면 쉬다오자, 이러고.
(그랬다가 묘한 사실을 깨달았는지 고개가 돌아온다.) 근데 자꾸 우물거리기만 하고 말을 안해줬어.
원래 내가 그런 말 하면 농담도 하고, 어디 가보자고도 하고.
얘가 풀이 죽었나, 싶을 정도로...
박태길:(잠자코 듣다가 수첩을 꺼내 뭔가 적는다. 호걸에게만 보여준다. ['그럼 말없이 사라질 애 맞는거네. 예감하고 있었다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화낼까?])
정호걸:(재욱의 말을 듣고 있다가 예감이라는 단어에 가만히 시선을 둔다. 고개를 저으며 수첩을 밀어놓더니) 그라믄 이번 일 나가기 전에 진짜로 몸이 안 좋아보였습니까?
김재욱:약간. (짧게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아니다. 아픈 게 아니라 그냥 뭐가 자꾸 찜찜한 사람처럼 굴었어. 자꾸 딴 생각하고, 표정도 멍하고.
(거기서 내가 뭔갈 했으면 상황이 변했을까, 그런 지점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작게 욕지거리를 읊조린다.)
왜 그랬는지 내가 제일 궁금하다, 씨발. 내가...
박태길:(손가락을 딱 튕긴다.) 그만, 그만.
지나간 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 추스릅시다. 그러다 또 터지면 이번엔...(나랑 끝장 본다, 까지는 말하지 않고.)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정현 씨가 혹시 최근에 다른 누구랑 자주 연락했다거나 하는 거 있어요? 언급이 좀 늘었다거나.
김재욱:(진정하는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씨근거리며 올라왔던 숨이 제어구로 인해 채 능력이 되지 못하고 가라앉는다.) 자주 만나는 사람 없어. 주변에 친구가 막 많지 않아서...그냥 가끔가끔.
아, 그거.
출동 전 날 윤지서 만났다. 썅, 그게 이제 생각나네.
그것도 여기였는데. 윤지서가 와서 정현이한테 얘기 좀 하자고 하고... ...
그 새끼들 뭐 있는 거 아냐?
박태길:(나왔다, 하는 눈빛으로 호걸을 본다.)
김재욱:(다시 눈이 희번득해져서, 와 있지도 않을 두 사람을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정호걸:(곁눈질로 태길을 보고 고개를 얕게 끄덕인다.) 박현수 씨는요. 읎었습니까.
김재욱:몰라. 일단 내가 봤을 땐 없었는데. 둘이 얘기 좀 한다고 해서 나까지 쫓겨나오고...
그러고 둘이 한참 얘기하다가 임무 갔는데...그게 끝이었지...
박태길:(맥없는 몰골. 참 이게 다 무슨 난리인지.) 잠은 좀 잤어요? 벌써 열흘 짼데.
김재욱:(못 잔 게 뻔한 꼴로 중얼거린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
곧 새해네, 씨발...
좆같다, 진짜...
박태길:(이 비슷하게 파트너를 놓쳐 숨 넘어가는 센티넬들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 있다. 역시 가이드랑은 너무 깊어지지 않는 게 맞다고. 혼자 슬프면 말이나 안 하지. 주변 사람 싹 다 길동무로 삼아 자폭할 뻔 하고, 저런 구속구나 차고...)
(보기 흉하게. 눈가에 경멸이 스친다.)
(대충 정리하겠다는 제스처로 일어난다.) 나도 갑자기 맡은 일이라 경황이 없어요. 위로부터 해줘야 됐는데. 미안합니다.
어떻게든 진정하고 있어봐요. 몸 챙기고. 그래야 돌아온 사람 반겨줄 수가 있을 거 아니야.
김재욱은 안 온다니까, 이런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며 취조실 테이블에 머리를 박습니다. 아무래도 피곤하겟죠.
정호걸:(태길을 따라 일어나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재욱이 엎드린 테이블을 두어번 두드린다.)
왜 증발이라 말혔어요?
그냥 읎어졌다 해도 되는데.
김재욱: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몇 초만에 옷만 남았다고.
박태길:(그게 그,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호걸:(재욱의 답에 생경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손을 거둔다.) ...증발 맞네요.
김재욱:너네... ...박현수나 윤지서 보러가는거면...
그냥 한 번 물어나 봐주라...
정현이 돌아오는거냐고...뭐 아는 거 있냐고...
돌아올 수 있는지 없는지만 알면 되니까...
박태길:(이거 생각 많아지네. 재욱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놓고 툭툭 친다. 호걸에게) 갈까?
정호걸:좀 주무시고요. (진짜로 일어나서 취조실을 나선다.) 예, 갑시다.
일을 열심히 할 땐 하더라도 오늘은 이 근방에서 묵어야겠군요.
박태길:(착잡하게 뒷통수를 긁는다.) 진짜 물리적인 산화란 말이야? 눈알 뒤집힐만 하네. 아니 팀장님은 이런 걸 말을 안 해줘.
정호걸:뭐, 다들 말만 그래 하겠거니 혔겄죠.
박태길:(담배갑 밑을 때려 튀어나온 한개피를 호걸에게 내민다.) 센티넬 능력중에 딱 몸만 빼돌리는, 있나? 그런 케이스...
정호걸:... (눈을 굴리며 생각해본다. 있었나, 그런 사람... ...)
제가 아는 한은 읎네요.
이동 능력이라 하믄 등급에 따라 무생물, 생물이나 나뉘지.
우째 옷만 쏙 빼고 가져간대요.
박태길:그치. 이치에 안 맞아. 근데 그럼 진짜 공기라도 됐다는 소리냐고. 그정도로 강한 센티넬이 있는데 모르는 게 더...
(아오 모르겠다.) 시간 늦었네. 모텔이나 찾읍시다. 근처에 있으려나.
정호걸:범죄인지 실종인지도 모르니까 뭐라 추측도 못하겄네요. (그럽시다, 하며 다시 차에 올라탄다.)
(차에 타자마자 서울에서 받아온 서류철을 뒤적이더니) 박현수 씨헌테 내일 좀 보자고 말 혀놓을까요.
박태길:(으으음, 고민한다) 위치 파악 되면 그냥 찾아가는 게 낫지 않나? 그거 좀 수상하잖아. 말했다가 냄새 맡고 튀면 어떡해.
정호걸:어떻게 찾게요? 어데 사는지도 모르는데.
(튀려나? 그럼 일이 많아지는데, 싶어서 서류만 까닥인다.)
박태길:짝꿍 없어졌는데 파견을 나가지는 않았을거고 근무지 아니면 집 아니겠어요? 본부에다 알아보면 주소지는 당연히 있을거고, 지금 근태 어떻게 되는지도...
정호걸:(그럼 또 본청에 하나하나 전화를 걸어다가 확인을 해야 되나,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아.
여 적혀 있네요. 주소.
박태길:(고개를 내밀어 같이 서류를 들여다본다.) 있네, 있네.
출근했는지만 물어보고 찾아가면 되겠다. 없으면 그때 전화해보든가 하죠?
*근무지에 출근했는지만 물어보고
정호걸:상주시 성동동 63 401호... (주소를 중얼거려본다.) 출근...허실 것 같은데.
정호걸:뭐라 혀도 일은 하러 나오시는 분잉게. (차가 상주지부를 빠져나가 도로를 달린다.)
하믄 순철 지부 쪽에 숙소 잡고, 내일 출근 허셨는지 보고...
(문득 하루가 길다 느꼈는지 작게 하품을 한다)
박태길:(차창에 옆머리를 대고 야경을 대강 내다보고 있다. 하품하는 소리를 듣고서 입을 연다.) 하는 짓이 둘이 딱 딴판이네.
어느 쪽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자기가 갑자기 없어졌어. 내가 혼자 남아서 김재욱처럼 굴기 대 박현수처럼 굴기.
박태길:(킥킥 웃는다) 본인 의사랑 상관이 없을 수도 있잖아.
정호걸:(뭐, 갑자기 죽을 수는 있겠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출근 잘 허시고 새 가이드 받으시는 편이 낫지요.
A급 인력은 귀한데.
박태길:(어찌나 매정한지 밖보다 차 안이 더 춥겠다. 어깨를 들썩인다.) 알았어요. 김재욱처럼 해야겠다.
정호걸:(그러고보니 아까 취조실에서도 그런 말을 몇 번 했었다. 이해한다거나 나라도 그럴 거라는 말이...) 태길 씨가 누구 하나 읎어졌다고 그래 변하실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서 이상허네요.
박태길:(동의한다.) 나같은 사람이
누구 하나 없어졌다고 그러는 거 말 안 되지.
근데 이래서 가이드는 센티넬 속을 모른다는 거야.
정호걸:(짧게 웃는다.) 것도 태길 씨한테는 해당 안된다고 생각혔는데.
박태길:해당 안 되는게 다 내 눈물겨운 노력이라니까. 봐봐, 가이딩이 다 뭐길래 십년지기 이십년지기도 아닌 사이에 저렇게 난리가 나고...
사람이 사상누각이 된다니까. 불쌍해 죽겠다, 아주.
정호걸:사상누각 안 되실라고 가이딩 안 받는 겁니까, 그러면?
박태길:내가 뭘 안 받아. 다 받잖아요? 적정선을 지키는 거지.
(잠깐 곱씹고 엥, 한다.) 말이 이상하다? 내가 안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럼 그동안 우리가 한 건 나비족 흉내인가? 다소 어리둥절한 상태)
정호걸:(눈썹이 비틀어진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는 새에 차가 순철 지부 근방을 돌기 시작한다.)
그 적정선이라는 게요. 아, 여서 묵을까요.
주차장 자리도 비었고.
박태길:(모텔을 스윽 내다본다. 재고 따질것도 사실 없다.) 갑시다.
비싼 데서 묵겠다느니 엄포를 놓았지만 결국 출장을 와서 자는 곳이란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래도 나름 좋은 방을 달라 요청해놓으니 남은 것 중에 가장 큰 방을 받기는 했군요.
박태길:뭐 어차피 붙어서 잘 거. (무거운 외투를 벗고 어깨를 돌린다.) 먼저 씻을래요?
박태길:몇 번 보지 않았어요? 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인데.
정호걸:(공주는 아니지, 라고 생각했으나 그쪽을 반박하진 않았다.)
하믄 괜찮겄네요. 쉬고 계세요잉.
박태길:(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내젓는다. 머리가 욱신욱신 아프다.)
아침부터 덜컥 출장 업무를 받아버리고, 기밀 사항까지 듣고, 몇 시간 내내 차에 앉아있었다가 사건 당사자를 조사까지 하고 나니...
정호걸:(쉬라고 말은 했으나 실제로는 태길이 거의 쉴 시간도 없게 순식간에 씻었음.)
(태그해서 씻고 나온 다음 침대에 엎어진다. 고개만 돌려 호걸을 향한다.) 나 손 좀.
정호걸:(고도로 훈련한 가이드는 센티넬과 구분할 수 없다...)
오늘 갑자기 무리하셨죠. (태길의 요청에 곧장 손을 뻗어 턱가와 뒷목 언저리를 감싼다.)
전용 가이드가 있다는 건 확실히 편한 일입니다.
박태길:응. (말해 뭐하겠어. 다른 무엇에 빗대거나 형언하기 힘든 편안한 기류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레 눈이 감긴다.) 더 혼나기 싫어서 얘기 안 했는데, 아까 김재욱 잘못 건드리고 완전...
얘기 마저 할까요? 적정선이라는 게, 뭐.
정호걸:(태길의
상태가 안 좋다를 뜯어보자면 다른 센티넬들이 가이딩 받을 것을 다섯 배 정도 쌓아둔 느낌. 능력이 능력이라 그렇겠지만...)
굳이 적정선을 따질 필요가 있나 싶어서.
박태길:얘기가 좀 도돌이표인 것 같다... (느슨한 목소리다.) 김재욱이 봤잖아요. 안 따지는 결과가 저런 거야, 글쎄.
내일 박현수도 만나면 한 번 봐봐. 그거도 꼴이 말이 아닐걸? 출근이야 했든 안 했든.
정호걸:가이딩 좀 커트라인 읎이 받는다 혀서 그래 된답니까. (센티넬이 아니니까 어떤 감각인지는 모른다.) 그랬을까요. 영 상상이 안 가긴 허는데...
둘이 맨 같이 다니긴 혀도 말도 잘 안혀서.
박태길:만약에 멀쩡하다 그러면 그건 그거대로 많은 얘기를 해주는 셈이지요.
아무튼... 호걸 씨가 일은 잘 하는 게 낫다 했잖아. 그럼 왜 가이딩을 지금보다 더 받아야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김재욱이가 돼도 좋다 그러면 그땐 생각해볼게. (거짓말이다.)
정호걸:그래 되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닌데... (그렇게 하나하나 효율로 따지자면 태길의 말이 백 번 맞기만 하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건 파트너라는 관계인가? 까지 생각하다가...문득 떠올린다. 다시 긴급팀으로 가겠다는 말은 언제 하지. 하필 맡은 사건이 사건이라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상념에 잠긴 새에 손 끝 감각에 뭔가 턱 걸리는 감각이 든다.) 끝입니까?
박태길:끝. 고마워요. (호걸의 손밑에서 머리를 빼낸다. 늘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게 만족스럽다. 귀한 파트너를 만나긴 했지. 그러니 오래 가겠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더 신경쓰게 되는 면이 있다. 제대로 누우려고 자세를 고친다.) 불편한 데 없지? 아까 때문에 힘들거나.
정호걸:(별 말 없이 손을 거둔다. 항상 이렇게 된단 말이지.) 이 정돈 괜찮습니다. 으쩌다 내일 박정현 씨까지 문제 생겨도...그짝은 오히려 진압하기 편하니까는.
(일단 오늘 할 일은...더 없나? 한 번 돌이켜보고 침대 한 쪽에 자리를 잡아 눕는다.)
박현수가 출근했다면 순철 지부에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박태길:(오늘도 호걸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올라탄다.) 데스크에는 물어볼까? 박현수씨 출근 했는지.
정호걸:예에. 순철 소속이시니까는. 안 나오셨으믄 자택까지 찾아가보고요.
텅 빈 느낌을 주던 상주 지부와는 다르게 순철 지부는 굉장히 활발한 모습입니다.
오가는 사람들도 많고, 건물 안에도 활기가 도는군요. 아무래도 현장 인원이 많다보니 본청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박태길:(좀 일터 같네. 산뜻한 미소 장착하고 로비를 가로지른다. 안내원에게 신분증을 내밀며 간단히 인사하고) 박현수 씨 자리에 계신가요?
데스크 직원은 태길의 공무원증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가, 박현수의 이름을 듣자 아...하고 말 끝을 늘입니다.
원래는 이틀 이상 자리를 비우신 일이 없는데, 이번에는 좀 길게 쉬시네요.
박태길:(에헤이.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편다.)
정호걸:(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하믄 자택에 계십니까?
직원:거취까지는 저희도 파악하지 않고 있어서, 죄송해요. 혹시 공무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휴대전화 번호나 주소지라도 알려드릴까요?
박태길:그럼 번호만. 주소지는 알아요. (수첩을 내민다)
(적어달라는 의미로)
직원은 태길의 수첩에 박현수의 번호를 적어줍니다.
출근을 안했다는 걸 보면 박현수도 영 상태가 좋지 않은 걸까요?
박태길:고마워요. 일 보세요. (그리고서 저벅저벅 지부를 나온다.)
20일. 윤지서가 연락이 안 된다고 자기가 신고하고서 당일부터 출근을 안 했다.
너무 짜고치는 판 냄새가 나는데. 그치?
박태길:최소한 공모자거나... 아니겠어요? 아다리가 이렇게 맞아버리면.
아니면 진짜 최악은, 음...
(어떨까. 말했다가 부정타면 안되는데.) 가이드 연쇄실종이라고는 했지만 가이드만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 박현수도 표적이 됐다면?
정호걸:... (그랬을 가능성도 있나. 그럼 완전히 다른 제 3의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건가? 턱가를 긁적이다가) 만약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믄...
또 동기를 찾아야 허겄네요.
읎어진 사람 불러다 물어볼 방도도 나자빠지고... (중얼거리며 도로 차에 탄다.)
박태길:(따라타며 휴대폰 안테나를 뽑고) 전화 걸어볼게. (금방 받은 번호를 누른다)
한참 신호가 가지만, 받을 기색 없이 통화 연결 불가를 알리는 안내음이 들립니다.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면서 갸웃한다) 느낌이 영 안 좋아.
함 가서 봅시다. (느낌이 안 좋다, 그 말에 동의하듯 차가 조금 더 빨리 굴러나간다.)
박태길:(연루가 됐다 해도 일신이 멀쩡하다면 폰을 끄거나 받거나 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안 받는다는 건 너무... 입을 닫고 도착을 기다린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박현수의 아파트에 도착합니다.
박태길:401호. (중얼거리면서 계단을 오르고 곧장 초인종을 누른다.)
예상은 했다지만, 언제나 나쁜 예상만 들어맞는군요.
박태길:외출했을 수도 있지? (호걸을 돌아본다.) 좀 정신 없어서 전화 못 받을 수도 있고.
정호걸:(아무래도 박현수가 나올 것 같지 않자, 우유가방 하며 말라붙은 화분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긍정적인 말 잘 혀주시네요잉.
박태길:(열쇠의 안식처지. 살펴보는 걸 지켜본다.)
올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그냥 열고 보는 게 낫나?
정호걸:열쇠가 읎으믄 부수기라도 해야 허나... ... (다짐 같은 소리를 하며 화분을 슥 들었을 때, 화분 밑바닥 구멍에서 약간 녹이 슨 키가 떨어진다.)
있다.
박태길:허당이네. 이런데에 두냐. (집는다.)
녹이 슨 것을 보아하니 스페어키인 모양입니다.
박태길:(열쇠공 부를 생각까지 했지만 간단하게 있어주니 고맙다.) 호걸 씨는 집 앞에 열쇠 두지 마. 도둑 든다. 이렇게.
박태길:(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린다. 지체할 것 없이 문을 연다.)
그 표정 뭐야. 집 앞에 뒀구나. (말하면서 현관 안을 들여다본다.)
정호걸:
문을 열자마자, 오래 된 음식물같은 쿰쿰한 냄새가 납니다.
바닥엔 빈 술병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합니다.
현관 대각선 방향에는 화장실이, 화장실을 따라 직진하면 안방이 있습니다.
박태길:(술병을 보고 조금 당황한다. 꼴이 말이 아닐 거라고 한 게 자신이지만 이렇게까지는.)
정호걸:... (이쪽은 상상도 못한 모습인지 아연한 표정으로 집 안을 바라보다가) 박현수 씨?
박태길:구급차 불러야될지도 모르겠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쭉 들어간다. 안방을 향해서.)
지나치면서 본 주방에는 그릇이나 일회용기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습니다.
박태길:(이상하다. 너무 이상하지. 실종이 문제라면 그래봤자 이틀이잖아. 몇주도 아니고...)
그리고 안방 침대. 그곳에 이불을 반쯤 덮은 박현수가 있습니다.
안방 바닥에는 약봉지와 핸드폰이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다시 침대로 시선을 옮겨보면...태길의 직감이 외칩니다.
정호걸:(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흐르는 기분이다.) ... ...이 뭐...
박태길: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92 |
판정결과: |
실패 |
정호걸:
SAN Roll
기준치: |
80/40/16 |
굴림: |
85 |
판정결과: |
실패 |
태길은 이성 3, 호걸은 이성 2를 잃습니다.
박태길:(머리가 하얘진다. 입을 막으며 뒷걸음치다, 무작정 밖으로 나간다. 여기 있으면 안 돼.)
집 안에서 풍기던 냄새가 뇌까지 찌르는 기분입니다.
박태길:(바깥 벽에 몸을 기대고 심호흡 한다. 사람 죽은 현장... 손대면 안되는 건가. 머리가 돌아가긴 하는데 맞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정호걸:(태길이 나가는 길을 비켜주고, 가만히 방 안을 둘러본다. 죽은건가? 아니면 죽임 당한 건가? 저렇게 얌전한 자세면...)
(현관 쪽을 바라보며) 이거는... ...
박태길:(호걸이 따라나오지 않은 걸 알고서 다시 현관 안으로 반만 몸을 넣는다.) 호걸 씨, 나와서 생각하자.
정호걸:(침대에 누운 박현수의 시신을 잠시 봤다가 마찬가지로 현관 밖을 나선다.) ...안 좋을 줄은 알었어도 이래 될 줄은 몰랐는데.
(출근을 안 했다고 했을 때부터 그럴리가, 라고 생각했지만...태길의 말이 맞는 건가? 의지의 끝은 곧 파멸인가?)
박태길:(하... 한숨 쉬고 이마를 벅벅 문지른다) 자살일까? 아니면 술이랑 약이랑 같이 먹은 게 잘못됐을 수도 있고.
이러면 우리끼리 조용히 어떻게... 같은 소리 못 하지. 신고는 해야되는데. 보고도 해야 되고. 내가 생각하는거는...
경찰 오기 전에 뒤져보냐 마냐야. 부르고 나면 손 못 대니까.
정호걸:...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머지않아 대답한다.) 먼저 둘러봅시다.
기밀이라 허셨으니까는.
박태길:(잠깐 고민을 하지만...) 그래. 그래요. (표정을 다잡고서 들어간다. 엉망인 집안을 다시 돌아본다.)
(쌓인 술병. 그득한 그릇.) 이삼일 안에 가능하다고 생각해, 이거?
정호걸:10명이 같이 살아도 이삼일 안에는 이래 안 되겄는데... ...
여름도 아닌데 음식이 이래 빨리 썩을리도 읎고...
박태길:윤지서가 없어지기 전부터, 서정현이 없어지기도 전부터... 뭔 일이 있었던 거지.
(안방으로 들어가 약봉지를 살펴본다. 무슨 약인지 알 수 있을까?)
이건 아무래도 정신과에서 처방해 준 약인 것 같습니다.
항우울제와 기타 신경성 약이 함께 쓰여 있네요.
일주일에 세 번, 하루 세 번 복용인데...먹는 것을 자주 잊은 것인지 봉지에 남은 것은 아침약과 점심약 뿐입니다.
박태길:20일까지는 어떻게 출근을 한 거야... (맥없는 소리를 자기도 모르게 뱉는다.)
(약국 이름을 적어둔다. 보통 진료받은 병원 바로 근처에서 약을 타니까. 그 병원을 가봐야겠다.)
정호걸:(박현수를 현장에서 만날 때는 상상도 못했을 면면들...) ...어제 올 걸 그랬나, 싶네요잉.
쬠 늦었어도...
(죽은 자의 얼굴을 살펴본다. 토사물 같은 것의 흔적이 있는지.)
박현수는 두 눈을 감고 바른 자세로 누워 있습니다.
몸은 뻣뻣하게 굳어있지만, 시신 자체는 굉장히 깨끗합니다.
토사물이나 타액, 혈흔, 타박상 따위의 부상 흔적도 없군요.
박태길:(이렇게까지 그냥 자다가 죽은 것처럼...?)
(손끝으로 이불을 걷어본다)
이불을 걷자 가려져있던 박현수의 몸과 침대 한 켠이 드러납니다.
그곳에는 빈 소주병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고, 그 옆으로 빈 약봉지 여러 개가 보입니다.
정호걸:(바닥에서 약봉지와 함께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집어든다.) 윤지서... ...
박태길:(주머니에서 평소 쓰는 장갑을 꺼내 손에 낀다. 더 뒤지고 다니려면 이거라도.)
정호걸:어젯밤에 윤지서한테 전화 걸었네요잉. 받지는 않었는데.
지금 걸어보면 어때?
(윤지서는 살아있을까. 그것도 참 문제...)
정호걸:(통화 버튼을 눌러 다시 한 번 윤지서에게 전화를 건다.)
박태길:(안방을 둘러본다. 더 볼만한 게 있나.)
그 외에는 생활쓰레기와 뜯어진 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우편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정호걸:(그 사이에 휴대전화를 몇 번 조작한다.)
문자는 몇 개 남아있습니다.
위례청이랑...뭔 병원이랑. 윤지서 씨.
'저희도 최선을 다해 윤지서 씨를 찾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박현수 씨는 본부 방문하셔서 건강검진 받으세요.'
'안녕하세요, XX병원 원무과입니다. 박XX씨 진료 미납건으로 문자 드립니다. 총 4개월분이 미납되어 있으니 방문 바랍니다. 미납액 - 10,980260원'
'현수야 나도 힘들어. 나는 안 불쌍해? 15년 동안 묶여서 산 나는 안불쌍하고 네가 처한 건 다 불쌍한거야? 내가 너한테 내 문제 해결해달라고 빈 적이라도 있니? 연락 그만해줘. 힘들다. 능력 관해서는 기우인 거 같으니까 본부 가서 건강검진이라도 받아.'
발신함의 내용은 대체로 짧고 간단하고, 위례청에 윤지서의 행방에 관해 물은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윤지서에게 보낸 문자입니다.
마지막 발신 문자는 어젯밤. 오타가 많지만, 제발 돌아와달라는 애원과 호소입니다.
정호걸:...여기까집니다. (핸드폰을 닫는다.)
박태길:(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자기 핸드폰을 꺼낸다. 전화 건다. 정기현 팀장한테.)
정기현 팀장에게 전화를 걸면, 머지않아 전화를 받습니다.
박태길:이 일에 대해서. 박현수랑 윤지서... (숨을 고쳐 쉰다)
팀장님이 아는 거 다 말해준 게 맞아요?
정호걸:(태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 같으면 잠시 팔을 두드려 주위를 환기시켰다가 천천히 손을 뗀다.)
박태길:(괜찮아. 고마워. 그런 뜻으로 손을 들었다 내린다.)
정기현:왜, 왜 그러는데. 걔네한테 무슨 일 있어? 너네 지금 어디냐? (태길의 추궁에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진다.)
어떻게 할까요. 여전히 우리 재량대로 움직이라고 할 거면 지금 뭐라도 말해줘요.
정기현:(사무실에서 돌아다니는 것인지, 어쩌는 건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태길의 한 마디에 우뚝 멈춘다. 한참 조용하다가.)
... ... 박현수가 왜? 현장에...현장이 어딘데?
하늘이 대쪽나도 일을 하는 놈이 죽기는 왜 죽어?
진짜냐?
박태길:나도 농담이면 좋겠네. 그렇게 팔자 좋으면.
순철 자택이에요. 좀 보니까 몇달동안 사람이 말라가다가 죽었어. 이걸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어느쪽이건 정기현은 이런 상황까지는 알지 못했음이 명백하군요.
정기현:... ...윤지서를 만나봐야겠다, 너희. 박현수가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이라곤 윤지서 밖에 더 있나...
늬들 가고 나서 윤지서가 탄 차량번호 알아냈어. 서울 28육 5109. 고속도로 타고 대암 들어간 것까지 확인했다.
거기 들어가고 나서 차를 길가에 버렸어. 대암 시내 CCTV 확인 되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상황 들으니까 뭐 기다릴 때가 아닌 것 같다. 일단 대암으로 가서 윤지서 좀 찾아봐라.
(끊을 것처럼 목소리가 잠깐 멀어졌다가) 박현수는... ...현수는... ...
박태길:(의구심과 화가 여전하지만, 팀장은 정직한 목소리고 더 들볶아서 나올 것도 없을 것 같다. 대암.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네.
(탁 핸드폰을 접으면서 손을 내린다.)
정호걸:(태길이 통화하는 것을 잠자코 쳐다보다가) ...뭐라십니까?
박태길:이거, (전체를 가리키듯 검지를 편다.) 인계하고...
윤지서 동선 확인됐대요. 대암에서 차를 버렸다는데. 우리더러 찾으래.
*상주쪽에 인계하고
정호걸:(대암...하고 중얼거리며 뒷목을 문질거린다.) 하믄 택시를 탔거나...혔겠네요.
조합 같은 데 뒤져보믄 뭐라도 나오겄죠.
(집 안 곳곳을 한참 쳐다보다가 현관 쪽으로 나선다.)
박태길:(뒤따라 걷는다.) 15년이 뭘까?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정호걸:15년... (뭐더라? 문을 열고 나서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
윤지서 씨가 가이드로 일한 게 그쯤 됩니다.
두 사람이 현관 밖으로 나서면, 얼굴에 불그스름한 빛이 비칩니다.
박태길:(그거였구만.) 묶여서 살았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처음부터 불만이 있었는데 계속 했다고? (그런 경우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해봤다.)
....하늘은 또 왜 이래...
1989년, 붉은 오로라가 전국을 뒤덮고 전무후무한 S급 센티넬 이희예가 가이드를 살해해 매스컴 앞에 선 날.
그 해는 붉은 오로라와 더불어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정기현의 말에 따르면 윤지서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대암.
그 넓은 도시에서 사람 한 명을 찾는 건 아마 보통 일이 아니겠지요.
정호걸:(차 문을 열어놓고도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10년 전이라는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아, 거 살인사건 났던.
박태길:(10년 전 맞지? 손가락으로 셈해본다) 시간 더럽게 빠르네...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별 일이 다 있다 혔는데.
그때 사람들이 괜히 뒤집어진 게 아니거든. 센티넬이 가이드를 자의로 어떻게 한다는 거는...
정호걸:(한 쪽 눈썹을 가볍게 들어올린다.) 으떻습니까. 지금은 센티넬이신데.
무슨 생각인지 쪼매 이해가 가셔요?
박태길:(차 지붕에 팔꿈치 괴어놓고 막연하게 멀리를 본다.) 아직은... 절대.
근데 지금 일 이렇게 되고서 생각하니까, 내가 다른 쪽은 궁금해본 적이 없네.
가이드는 무슨 마음인가 하는 거,
정호걸:(가이드가 무슨 마음인가, 처음 받는 질문인지라 잠시간은 입을 다물고 있다.) 사람 사는 거이 다 그러겠지만은. 다 사정이 많습니다.
센티넬 하믄 치를 떠는 사람도 있고, 지만 잘났네 허는 사람도 있고요잉.
(그랬다가 이어서 어딘가에 사고가 닿았는지 입꼬리를 씩 올린다.) 혀도 생각하기로는 가이드가 센티넬을 더 많이 생각 헐 겁니다.
봐봐요. 센티넬이라고 하는 거는, (양손을 들어 마임할 준비) 발현되고는 맨날 심지 끝이 타는 신세거든. 이렇게. (치지직 줄어드는 모양 손가락으로 흉내내기)
이걸 덮어주고 늘려주고 가끔 아예 없는 것처럼도 만들어주는 게... 가이드란 말야. 요즘에 약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달라.
개인차는 있지만. 다들 착실히 조직에 붙어있는 게 다른 것 보다도 여기에 가이드가 있으니까. 불가항력 수준으로 목줄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그니까 센티넬은 가이드를 찾는 게 자연스럽지. 그렇게 되지. 근데 가이드는...
불리한 것도 없지만, 위안도 없을 것 같은데.
박태길:(문자메세지의 내용을 되새긴다.) 어떻게 싫은 채로 15년을 붙어있지?
정호걸:(태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끄덕인다.) 가이드는 센티넬 읎이는 가이드가 아니니까는.
암것도 아닙니다, 가이드라는 거. 혼자 있음 그냥 일반인이고. 존재의의가 확실허죠.
15년이나 있다보믄 그런 생각 혔을 겁니다. 박현수 씨 볼 때마다. 이 인간 없음 나는 뭔가. 허고.
(그리고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차에 올라탄다.) 진짜로 무슨 생각 혔는지는 본인헌테 들어봐야 알겄지만은.
박태길:(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차라리 그만두고 그냥 살았으면...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어깨 으쓱하고 따라 탄다. 들어봐야 알지. 호걸의 말이 옳다.)
박태길:
지능
기준치: |
80/40/16 |
굴림: |
84 |
판정결과: |
실패 |
(ㅁㅊ)
박태길:(마른세수 벅벅) 아 나 진짜 생각나는 게 없다. 과부하야.
근데 왜 대암이지? 윤지서랑 연고가 있나, 여기가?
정호걸:생각을 너무 많이 허셔서 그런 거 아녀요. (곁눈질로 태길을 흘끔 보더니) 커피라도 좀 뽑아드립니까?
그냥 무작정 도로 따라 대도시로 온 것 같은데...
박태길:(차창밖을 내다본다.) 가다가 자판기라도 보이면 잠깐 세우죠.
호걸은 바깥을 두리번거리며 조금 더 달리다가, 넓은 주차장 같은 곳으로 들어섭니다.
<대암택시협동조합휴게소> 라는 현판이 걸린 문을 지나자, 같은 라벨을 붙인 택시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기사식당이 딸린 1층짜리 휴게소 건물, 그 옆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고, 택시기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군요.
(지역형실시간업데이트만물사전이라고 할 수 있지)
정호걸:(택시들과 약간 떨어진 자리에 주차를 해 놓는다.) 뭐 드실래요. 블랙
블랙?
박태길:나 밀크로요. 설탕 좀 먹어야지 안되겠다. (말하면서도 눈은 기사들 모인 자리에 박혀 있다)
정호걸:좀 쉬다 갑시다. 하루종일 돌아댕겨븡게 피곤허신가본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판기로 향한다.)
정호걸:(자판기 앞에 서서 밀크커피를 먼저 하나 뽑는 중...)
정호걸:차에서 안 쉬시고. (마침 나온 밀크커피를 건넨다.)
아직 안 정혔는데요. (동전만 넣어두고 가만히 자판기 메뉴를 쳐다본다)
(코코아...율무차...코코아...율무차...블랙...)
(실컷 고민해놓고 맨날 먹는 율무차를 뽑는다)
박태길:(실컷 고민해놓고 맨날 먹는 거 뽑았다...)
(밀크커피 한모금 홀짝 하고, 택시기사들 앞에 가서 선다.)
하늘 기가 막히네요. 그쵸?
태길이 살갑게 말을 걸자, 택시기사들이 태길을 슬쩍 쳐다봅니다.
아는 얼굴도 아니고, 택시기사처럼 보이지도 않는지 의아한 표정이네요.
박태길:(외모판정으로 신뢰감 심어보기 가능?)
박태길:
외모
기준치: |
75/37/15 |
굴림: |
6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박태길:(건실하고 순하게 생겨놔서 어디가서 생긴걸로 안먹혀본적이 없다)
택시기사:이 다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니깐. 이상기후 아이가, 이상기후.
하여간 이런 일만 있으면 또 종교단체 같은데에서 종말이 온다고 지랄을, 지랄을.
박태길:맞습니까. (빙그레 웃고) 올해 억수로 시끄럽지요. 뒤숭숭해가지고.
(앓는 소리를 내면서 옆자리에 낑겨 앉는다.) 어제오늘 열댓시간을 차만 탔더니 허리가, 허리가...
정호걸:(경북 사투리도 하네,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근처에 어물쩍 서 있는다.)
택시기사:쌔파랗게 젊은 사람이 열 몇 시간 가지고 죽는 소리를 한다, 죽는 소리를. (이어서 몇 명의 택시기사가 맞장구를 치며 웃는다.)
박태길:아이고, 이 명함을 잘못 내밀었네. 핸들밥 자시는 분들 앞에 두고. (웃다가 살짝 찡그리며 짭 입을 다신다. 그리고 위례청 신분증 꺼내듦) 다른 것은 아니고요, 공무 한다고 여까지 왔는데. 도움 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택시기사들은 태길의 명함을 받아 저들끼리 휙휙 돌려보더니, 이내 한 사람이 태길을 알아보고 박수를 짝! 칩니다.
택시기사:야~! 맞네! 내가 저 친구를 어디서 봤는데 자꾸 기억이 안나는거라. 뉴스에도 나오고, 어? (옆 사람을 툭툭 치며 동의를 구하다가 크게 웃으며 태길에게 악수를 청한다)
이야. 이거 우리가 아주 귀한 분을 만났네 이거. 윤가야! 종이 하나만 가져다 도라, 내 싸인 좀 받아놓게.
박태길:(매스컴보다 실물이 낫다느니 하는 너스레 자기 입으로 떨면서 한바탕 수다와 사인의 시간...)
태길이 한두마디만 보태도 택시기사들은 왁자하게 떠들기 시작합니다.
정호걸:(태길이 그러는 동안 종이컵 끄트머리를 다 조지고 버리고 왔다)
박태길:(호걸 눈치 슬쩍 살피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 서류가방에서 종잇장을 꺼낸다. 윤지서 사진을 펼쳐보이고) 이 사람 어서 봤다 하시는 분 혹시 있심니까.
어제인가 이 동네로 들어왔다 카데요.
:(태길이 내민 사진을 빤히 쳐다본다.) 야, 이거 손님을 맨날 빽미러로 봐가 정면 사진으로 보면은 우리는 몰라?
택시기사:처자가 누군데 위례청 사람들이 찾아다니고? (봤나? 봤나? 하며 근처로 모여든 기사들에게 사진을 보여준다.)
기사들이 웅성웅성거리다가, 한 사람이 아는 체를 합니다.
택시기사:이거 성림동에서 내려다 준 손님인데. 오늘 아침인가 새벽인가?
막 동트고 나서였던 것 같어.
뭐 뭐 타고 감서 딴 얘기는 안 합니까?
무슨 볼일이다 카는거.
정호걸:(발치에 있는 고양이를 발끝으로 슥슥 쓰다듬다가...동네 이름이 들리면 고개를 든다)
택시기사:젊은 손님들은 볼일을 얘기를 안 하지~
근데 내가 기억을 하는게, 안색이 파리해가지고. 타자마자 암데나 내려주세요~ 하니깐.
성림동이 볼 것도 많고 벽화 있고 해가지고 요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어. 그래가지고 내려줬더니 슝 가데.
택시기사:짐이 있었나? 내 거기까지는 안 봤다.
근데 막 뭐를 싣고 하지는 않았으니깐 맨몸이었납지?
뭐, 대단한 범죄자라도 되나?
박태길:말도 몬합니다. 내 살짝만 알려드릴게.
(속닥속닥) 무단결근.
사무실에 일이 천지빼까리로 밀렸는데 갑자기 날랐다 안하요. 임마 잡아오라고 난리가 난리가.
택시기사:위례청에서 사람이 도망도 치나? 거도 앵간히 인력부족인갑네.
성림동 여서 시내 쪽으로 한 10분만 가. 큰 사거리 나오는데 거서 좌회전해가 30분 더 가면 성림동이다.
박태길:한반도 땅에 대가리수 남는 공무부처 있으모 알려주십시요... 내도 걸로 갈랍니다.
(고개 꾸벅 숙인다.) 감사합니다.
(호걸에게 다가가 낮게) 더 물어볼 거 있으면 지금 빨리.
정호걸:(시내로 10분, 좌회전해서 30분 더. 태길과 택시기사 사이에서 갑자기 묻는다.) 옷차림새는 어땠습니까?
택시기사:(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냥 뭐 모자 쓰고. 까만 옷인데 뭔 옷인지는 모리겠네.
시커매, 하여튼.
정호걸:(멀리서 알아보긴 힘들겠다,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난다.) 여 와보길 잘 혔네요.
박태길:(수고많고 복받으실거고 손님많이받으시고하는 인삿말에 악수 한바탕 하고서 복귀.) 어떻게 또 딱 좋은 자판기 찾아서 세워주셨어요.
(종이컵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차로 향한다.) 가봅시다, 성림동.
정호걸:어째 경북 사투리 잘 허시네요. 여 어디 사셨어요. (결국 쉬지는 못했네, 싶었는지 차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목 스트레칭을 한다)
박태길:그냥 주워들은거. 경상쪽은 서울에도 사투리 그대로인 사람들 많으니까. (따라서 뒷목 주무르기)
좀 듣고 있다보면 옮고 그래. 나 호걸 씨한테도 말투 많이 옮았어. (씩 웃는다)
정호걸:(그른가, 싶어서 눈을 끔벅인다.) 전 사투리 그래 안 심한데.
정히 피곤하믄 나오쇼잉. 나가 운전할라니께.
정호걸:(왜 웃나 싶어 쳐다보다가...태길이 제 말투를 따라하면 별안간 하하하, 하고 웃어버린다) 서울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저으며 차에 탄다)
박태길:서울 토백이라고 무시해브는구마이. (입 튼 김에 한술 더 얹고서 결국은 다시 조수석.)
40분 정도가 지나자, 동네 곳곳에 벽화가 그려진 주택가가 나오는군요.
택시기사의 말로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인 것 같은데, 오늘은 평일 낮이라 그런지 한적합니다.
박태길:(벽화 귀엽다는 생각 중) 동틀녘에 왔으면... 숙소를 잡았을까?
작은 동네를 몇 바퀴 돌다보면 카페, 음식점, 슈퍼 정도가 눈에 띕니다.
콘도 형태의 민박 몇 채, 그리고 대부분은 주택이군요.
정호걸:숙소가 많은 동네처럼 보이지는 않는데...해도 동네가 작네요잉. 쫌 돌아보믄 목격한 사람이라도 찾을 수 있겄죠.
박태길:(또 사진 들고서 사방팔방 돌아다녀야 하나.) 아무데나 내려달라고 해서 왔으면 누구 집에 가지는 않았을거고. 또 옮겨갔으려나...
밥은 먹었겠지. 식당 위주로 돌아보자.
정호걸:그랬으믄 기사 중에 또 본 사람이 있었을 것인데... ... (근처 노면에 차를 세운다.)
발로 뛰어 찾아야하겄네요.
박태길:(끄어어 기지개 켠다) 우리도 뭐 좀 먹어야돼. 하루종일 커피 한 잔 먹고 이러고 있네.
그러고보니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은 채 이 시간입니다.
정호걸:(태길이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순식간에 허기가 몰려온다.)
먹고 살자고 허는 일인데.
갑시다, 밥 먹으러.
박태길:(눈에 보이는 백반집 가리켜 들어가기로) 겸사겸사 물어볼 것도 물어보고.
동네 주민들이 많이 찾을 것 같은 백반집입니다.
점심 때가 좀 지나서인가, 크지 않은 가게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네요.
박태길:둘이요~ (손가락 두개까지 펼쳐보이고 창가 자리에 앉는다)
두 사람이 창가자리에 앉으면, 금세 밑반찬과 백반이 차려집니다.
박태길:(물 따르고 수저 세팅... 물수건 뜯어 눈두덩 닦기...)
정호걸:(일단 밥부터 퍼 먹으면서 창 밖을 가만히 살핀다.)
(맛있음)
지금 이 타이밍에 딱 지나가는 게 보여주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겠는데.
바라기가 좀 염치가 없지?
정호걸:혹시 그래 잘 풀릴지 몰라서 보고는 있는데요.
어째 지나다니는 사람이 읎네요잉.
(야무지게 쌈까지 싸먹는 중) 혀도 이럴 때는 누구 하나 돌아댕기는 게 눈에 띄니까는.
박태길:(빈 접시 들고 종업원에게) 저희 이거 버섯볶음 좀 더 주세요.
식당 주인:예예, 다른 건 더 필요한 거 없으시고? (태길이 내민 접시를 슬쩍 건너보고는 아예 새로 담겨있는 반찬 접시를 내어준다.)
그 여기, 젊은 사람들 요즘 많이 다닌다는데, 평일이라 그런가 한산하네요.
식당 주인:아유, 주말에나 많아요~ 평일에는 조용하지. 다들 출근하고 뭐 하고 하니까.
여름가을에 날씨 좋을 때는 평일에도 좀 있고.
동네 사람들은 조용한 게 나아~
박태길:그쵸. 조용한 게 편하고... (눈 접어 웃다가 윤지서 사진 꺼내든다) 혹시 오늘 이런 사람 돌아다니는 거 못 보셨어요?
짐 따로 없이 혼자서.
식당 주인은 태길이 내민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젓습니다.
식당 주인:글쎄, 나는 본 적이 없네. 오늘 놀러 온 손님들은 두 분이 처음이야.
다들 동네 사람들만 오지.
박태길:(역시 한 방에는 안 되네. 고맙다 하고 다시 사진 집어넣는다)
(호걸에게) 막막하다 막막해.
정호걸:눈에 안 띄게 돌아다닐라는 생각은 있었나 본데요잉. 모자도 썼다 허고, 식당서 밥도 안 먹었으믄.
...편의점 같은 데 갔거나...
정호걸:(태길의 그릇을 가리킨다.) 밥 설렁설렁 드시지 말고요.
(반쯤이나 비우고 숟갈질 느려지던 참(
정호걸:(다 안먹는 법도 있나? 하듯이 쳐다본다.)
박태길:나 입 짧은 거 알면서 그래. 차도 계속 타야 되고...(궁시렁궁시렁...)
박태길:그게 무슨 소리예요 호걸씨는... 왜 갑자기 국가 에너지 절약에 이바지를... (한숟가락 떠서 한참 씹는다)
(반찬이며 찌개는 잘 먹는다만 늘 밥에서 의욕이 죽어 문제.)
정호걸:그래 밥을 깨작깨작 드시는데 어째 키가 크셨지.
박태길:나도 키 클 적에는 잘 먹었어. 다 컸으니까 이제 덜 먹어도 되나보지.
(기어이 두어숟가락 남기고 숟가락 내려놓는다)
정호걸:연비가 좋으시네요잉. (이쪽은 그새 다 비웠다. 더 안 먹나...하고 태길을 보다가)
다 드셨으믄 갑시다.
박태길:(휴지로 입 닦고 일어난다.) 그럼 편의점?
정호걸:편의점인가, 슈퍼인가. 아까 지나옴서 하나 본 것 같었는데...
그짝으로 가볼까요잉.
성림동은 동네 자체가 크고 완만한 언덕처럼 생긴 곳입니다.
박태길:(뚜벅뚜벅 걸어가다보니 슈퍼가 보인다. 미닫이문 열어 들어간다.) 실례합니다~
매대에 각종 과자나 세일 물품이 나와있는 동네 슈퍼입니다.
손님은 없어 한산하고, 주인은 계산대 뒤편에 앉아 졸다가 문이 열리는 방울소리에 눈을 끔벅 뜹니다.
박태길:(과자 코너에서 고래밥 찾아다가 계산대에 올려놓음) 수고 많으세요. 사람 한 명 찾고 있는데. 혹시 오늘 이런 사람 보셨어요? (윤지서 사진을 또 꺼낸다)
슈퍼 주인:(두 사람이 가지고 온 과자와 우유의 바코드를 찍는다.) 이천 백원요.
(그리고 곁눈질로 흘끔 사진을 보더니) 슈퍼가 경찰서도 아니고 와가지고 사람을 다 찾어?
박태길:그게... 신고할 거리는 아니어가지고. (슬쩍 웃는다.)
말재주
기준치: |
55/27/11 |
굴림: |
84 |
판정결과: |
실패 |
(어제부터 컨디션 개작살)
(민간인 상대로 이능력같은건 쓰면 안되지... 라고 생각중)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쓰고싶기 때문이다)
정호걸:(옆에서 가만히 주인을 쳐다보고 있다가, 태길에게로 시선이 옮겨간다. 이 사람...)
박태길:
이능력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5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쓰지 뭐)
(주인을 빤히 응시한다) 오늘 내가 좀 피곤해서.
(말하자면 열매 속을 꺼내기 위해 껍데기의 틈을 찾는 느낌. 제일 얇고, 제일 좁고, 제일 약한. 누구나 제각기 맞서고 있기 두려운 사람이 있다. 태길은 잠시나마 그런 사람이 되어 상대의 자아를 흔든다. 꼭 거칠게 굴 필요도 없다. 제일 편리한 점은 말을 길게 안 해도 된다는 점이고. 알아서 수그리니까.)
사람들은 흔히 태길을 처세술의 달인, 세 치 혀로 천 냥을 갚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태길이 굳이 상황을 말로 해결하는 것이 일종의 상냥함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이지요.
그러나 친절한 방식을 쓰기에는 상황이 너무 크게 번지고 말았습니다.
박태길:(계산대에 사진을 내려놓고 두들긴다. 검지로 톡, 톡, 톡.) 봤어요, 못 봤어요?
태길의 손짓이 버튼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인의 허리가 사진 가까이로 수그려집니다.
슈퍼 주인:아...그게...뭐더라...내가 이 사람을 봤지, 봤는데...
마침 오늘 손님이 별로 없었어서. 네, 제대로 기억하죠...10분 전쯤인가 혼자 와서...
컵라면 하나랑, 생수 하나인가, 무슨 음료 하나인가, 하여튼 그렇게 사 가지고 쩔로 올라갔어요.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공손한 태도로 가게 밖 언덕 위를 가리킨다.)
정호걸:(태길의 옆에서 영 석연찮은 표정으로 주인을 바라보다가, 계산대에서 사진을 슥 치워버린다.) 예, 고맙습니다.
박태길:쩔로? (다정한 투로 따라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산 물건을 챙겨든다.)
(출입구로 걸음을 옮기면서 능력을 푼다. 주인은 살았다, 고 생각할 것이다. 살면서 그런 마음놓임을 느껴보는 것도 꽤 값진 경험이지. 앞으로가 보다 소중하게 보일테니.)
(밖으로 나와서 고래밥 상자를 뜯는다.) 이쪽 계열은 딴것보다,
증거가 안 남아. 그게 편해. (눈꼬리 길어지게 웃는다.)
정호걸:그러십니까. (집어왔던 사진을 태길이 든 서류철 안으로 집어넣는다.)
정호걸:위례청이라 허고 물으면 되지, 그새를 못 참으시고.
박태길:사장 말하는 투가 별로였잖아요. (마치 그게 정당한 사유라도 되는 양. 고래밥 한조각 씹는다.)
정호걸:(암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다가 대답을 안 하고 만다. 가진 능력을 잘 활용하는 것이 센티넬의 일 아닌가. 내 기분 문제랑 엮으면 주제넘은 참견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주인이 가리킨 언덕 위로 걸어갑니다.
박태길:계속 쌀쌀맞다~~ (반걸음 뒤켠에서 따라간다)
박태길:어떡해요~ 혀가 꼬였나 말이 안 나오는데.
팀장도 이러라고 굳이 나 골라서 보냈겠지.
과자 먹어요. 사놓고 안 먹네.
정호걸:(그랬겠지. 손에 든 과자봉지를 부스럭거리다가 그냥 봉지 끄트머리를 잡고 걷는다) 이따 차에서 먹을라고 샀습니다.
이거는 양도 많고.
박태길:그럼 이거 같이 먹자. (고래밥 상자째 내밀어 살짝 흔든다)
정호걸:(태길이 내민 상자에서 고래밥 몇 개를 집어먹는다. 와삭와삭...)
윤지서 만나믄 뭐부텀 물어보실 거에요.
박태길:알려줄까 하는데. 박현수 죽었다부터. 좀 그런가.
정호걸:충격요법 하시게요. 그랬다가 울거나 도망가거나 하믄 어쩌시려고...
박태길:울면 그칠거고... 도망가면 잡으면 되고. 일반인인거. (무신경하게 말한다)
서정현이랑 무슨 얘기 했습니까, 하는 거 물어도 곧이곧대로 안 나올 것 같아서 그래. 조언 있으면 들을게요.
정호걸:(궁지에 몰린 윤지서가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궁지에 몰려 있기는 할까? 어쩌면 가이드라는 숙명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애초에 윤지서라는 사람을 제대로 안 적도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
...어째 뾰족한 수가 안 떠오르네요잉. 어쩐 심정으로 여까지 왔는지를 모르니까는...
(이러니 태길의 방식이 불편한 구석이 있더라도 맡기는 수 밖에 없는거다.)
박태길:신경 안 쓸 것 같기도 해요. 박현수가 어떻게 됐고 그런거.
메세지 봤잖아. 몇 달을 그렇게 매달렸는데 버리고 간 거니까. 마음이 굳어진 거지.
정호걸:현장에서 두 분 봤을 때는 현수 씨가 매달리고 하는 거를 생각도 안 혀 봤는데.
보는 걸로는 사람 모르나 봅니다.
그냥 사람 문제라고만 놓고 봐도 속사정은 늘 모르는 일이지만...
근데 뭐 이건 어느 면에선 반전은 아니긴 하지. 센티넬은 약자가 맞아.
정호걸:(잠시 고개를 돌려 태길을 쳐다보고) 태길 씨는 여태 가이드 꽤 많이 바뀌셨담서요.
그런 일 한 번도 읎으셨응게 교체가 되었을 것인데. 겪어본 것처럼 말씀을 허시네요.
박태길:(잠깐 생각한다) 네 번인가? 호걸 씨 포함.
경험은 아니어도 관찰은 할 수 있고. 아예 모르는 얘기도 아니죠. 나라고 위기가 없었겠어요.
(씩 웃는다) 나 입사하고 초반에는, 가이딩 안 받으려고 온갖 꼼수는 다 썼는데.
정호걸:(마지막 말에 눈썹을 들어올린다.) 왜요? 안 받으심 힘드셨을텐디...
박태길:내 효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가이딩을 빼고도 이 사람을 똑같이 볼 수 있나 없나를 계속 계산하고 있는 게 피곤하더라고.
조종당하는 느낌도 들고 하다보니까. (그러면서 누구보다 대놓고 조종하는 자기 능력은 알차게 쓰는 중)
정호걸:조종. (새로운 표현이 낯설었는지 자기 입으로도 발음해본다.)
박태길:(살짝 손사레) 가이드가 나를 조종한다기보다는. 알죠? 내가 내 기분에 휘둘린다 싶었던 거지.
정호걸:(그런 감각인건가. 가이딩을 불쾌해하는 센티넬들의 말이 무엇이었는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요?
박태길:조직은 가이드 써서 센티넬 조종하는 게 맞고... 시스템이 그래.
(지금? 돌아본다.) 어떠면 좋겠어요.
정호걸:(어땠으면 좋겠다, 막연히 느끼는 것은 있었으나 말로 만들어내기에는 너무 형체가 없다. 더군다나 이런 사건이 엮인 상황에서 의지 같은 소리를 하는 것도 이상하지...)
박태길:(침묵이 길어지자 하하 웃는다) 나 호걸 씨 말 잘 듣잖아.
가이딩도 꼬박꼬박 받고. 개과천선했어요.
정호걸:가이딩을 빼고도 똑같이 볼 수 있나 없나. 거도 잘 해결 됐습니까?
박태길:그건... (고래밥 입에 쏙 넣고 골몰) 그냥 생각 덜 하는 걸로 합의 봤네. 분리가 안 될 문제라.
정호걸:(태길의 답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더 미뤘다간 서울 가겠다.)
박태길:날 도와주는 사람인데 좋아지는 게 맞지. 안 그래요?... (멈추니 따라 멈춘다. 왜? 하는 눈으로 보는 중.)
정호걸:(결심을 하는 것보다 말하는 게 더 어렵다. 제 뒷머리를 북석북석 쓸다가) 요번 일 끝나믄 긴급팀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잘못 들었나. 당연히 잘 들었지만. 온몸의 제스처를 통해 말하는 잘못 들었나. 당연히 내용이 바뀌진 않지만.)
누가 그러래? (가서 엎어버리게.)
...제가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혀서요.
모르는 사이에. (헛 하고 웃음)
뭐가 있었나보지? 나 잘 이해가 안 돼요.
(자기 뒷머리를 꽉 잡았다 놓는다.) 임시나 땜빵이나, 그런 거 아니고.
그냥 간다고?
정호걸:(짧은 숨을 내쉰다. 상대방의 반응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 ...이래저래 생각을 하다 보니까는...
태길 씨는 제가 아니라도 가이딩 면에서는 문제가 없을 것 같으시고... (무슨 말 하고 있는 거냐, 제 눈가를 문지르다 입을 다문다.)
박태길:(머리가 터빈 도는 소리가 날 정도로 돌아간다. 좋은 기억력으로 수상쩍었던 순간들을 낱낱이 되짚는다. 그런다고 대단한 게 나오진 않지만. 내가 지금 화가 난 건가? 살다살다 이걸 모르겠긴 처음.) 이거 어제 얘기의 연장이야?
내가 성에 안 차서. (자꾸 실소가 튀어나온다.) 감 다 잃겠어서, 그...
박태길:내가 호걸 씨 아니어도 그만일 것 같으면 호걸씨여야 하는 센티넬은 누군데?
아, 저기 폭주하는 애들.
걔네는 간절하긴 하지. 맞지.
....
내가 그렇게 답도 없었나? 이런 문제를 혼자 정하고 통보를 하게.
정호걸:...태길 씨는 능력에 비해 가이딩 받는 양도 크게 널뛰지 않으시고... ...한 번 받으실 때 양도 본인이 제한하실 수 있으시고. (설명이랍시고 하는 말이 자꾸 겉돈다. 대체 내가 원하는 게 뭐냐? 파트너가 아주 의지해서 망가지는 거? 책에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거?)
...굳이 제가 아니라도 될 것 같어서.
박태길:(손으로 입가를 감싸쥐어놓고 표정변화가 없다.) 대답 안 했어.
왜 이런 통보냐고.
(당장 느껴지는 가장 큰 문제라면 그 부분이다. 협의가 아니라는 것. 서로 잘 합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이드가 속으로 자신을 잘라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 정호걸의 성격상 한두번. 하루이틀 수틀려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니까. 이건 틀림없이 오래 생각한 내용이니까. 오래 생각하는 동안 그 안에 내가 없었다고.)
(자존심이 으스러진다.)
정호걸:(그게 그렇다. 아주 사소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방바닥 전체에 아주 얕게 깔린 물이라는 걸 알아채고 나면...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마 속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말했으면 박태길은 태도를 바꿔줬겠지. 그리고 어쩌면 그 속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태길은 진심이 아니라도 그것을 가장하는 게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아마 자신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군가가 언덕 위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 시야 한 켠에 들어옵니다.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우와 멘탈터져서 윤지서도못알아봄)
(안중에도 없음)
태길이 상대방을 알아채는 것보다 상대방이 두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빨랐습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여자는 곧장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합니다.
박태길:(뛰는 걸 보고서 알았다.) 윤지서다.
정호걸:(제 때 상대를 알아보았으나 몸이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윤지서가 뛰어가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박태길:(뒤따라... 뛴다. 일은 해야지. 일은 해야하고 말고. 이 일이 끝나면 짝꿍이 날 버린다 하시지만 일은 해야지.)
거기 서세요. (외치는 듯 그냥 좀 크게 말하는 듯)
윤지서는 내려왔던 언덕 위를 올라가지만, 얼마 못 가 길이 끊깁니다.
펜스 아래로 주변 마을 풍경이 보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박태길:(뭐 공들여서 숨었다고 도망은 쳐. 어이가 없네.)
윤지서가 우뚝 멈춰서서 두 사람을 돌아봅니다.
윤지서:...사람 한 번 잘 찾으시네요. 차도 버리고 왔는데...
박태길:(차오른 숨 가누면서 터덜터덜 멈춘다. 두어 걸음이면 닿을 거리다.)
정호걸:도망칠 데도 읎는데 어디 간다고 뛰기를 뜁니까. 얘기 좀 합시다.
박태길:부산 정도는 가지 그랬어요. 사람도 없는 동네 오니까 금방 잡히지.
얘기 할 거죠?...
윤지서:...내가 센티넬도 아니고, 뭘 가지고 있을리도 만무하고.
두 사람만 왔어요?
박태길:잘 된 거 아닙니까. 우르르 와도 서로 좋을 거 없는데.
윤지서:... ...잡아갈거면 기동대 데리고 오는 게 좋을텐데.
두 사람 누가 보냈어요?
박태길:(애초에 왜 도망을 쳤을까? 말마따나 센티넬도 아닌거 위험분자 취급을 받지도 않을 거고, 이 일에 연루된 정황증거 뿐이라면 끽해야 참고인이나 되었다가 풀려났을텐데.) 정팀장이.
그리고 왜 잡혀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뭘 했길래.
윤지서:(정기현, 하고 중얼거리더니 남아있던 경계 자세를 푼다. 그러더니 아예 공원 한 켠에 마련된 나무 테이블로 가 앉는다.)
앉아서 얘기해요.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힘드니까.
박태길:(순순히 따라 앉는다. 뛰었더니 머리에 열이 좀 빠지긴 하네. 호걸에게도 손짓한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윤지서와 마주앉습니다.
박태길:이 일에서 당신밖에 연결고리가 없으니까. 서정현은 없어졌고, 김재욱은 제정신이 아니고, 박현수는...
...
(얘기를 해, 말아.)
정호걸:(태길의 말이 잠시 끊기자,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연다.) 죽었습니다.
윤지서:(두 사람의 시선을 가만히 받아낸다. 하, 하고 실소를 터트리더니) 호걸 씨, 표정 뭐예요.
현수를 내가 죽였어?
난 걔 15년 동안 지켜주던 사람이야.
박태길:(곁눈으로 잠깐 호걸의 얼굴을 본다. 책임감을 요구하는 특유의 표정. 자주 봐왔다. 여느때보다 농도가 짙다.)
정호걸:전화도 안 받으시고, 문자에도... ...현수 씨한테는 윤지서 씨밖에 없잖아요.
윤지서:(가만히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턱을 곧게 괸 채 두 사람을 천천히 번갈아 쳐다본다.)
다 물어봤어요?
전화 왜 안받았냐고?
호걸 씨는, 가이드로 일하는 거 되게 좋아하잖아요.
박태길:(입꼬리가 올라갈 뻔 한 걸 참는다.)
윤지서:그게 본인 보람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난 가이드로써 그게 느껴지거든.
그건 운이 좋은거지. 가이드 적합자인데 일하는 것도 좋아하는 건. 천운인거에요.
(척, 제 몸에 손을 얹는다.) 근데 전 아니거든요.
현수도 지긋지긋하고, 위례청도 지긋지긋하고.
난 하다못해 저 하늘도 지겨워.
그래서 도망쳤어요, 내 행복을 위해서. 가이드 윤지서 말고, 인간 윤지서의 행복을 위해서.
윤지서:(다시 손을 테이블 위로 미끄러트린다.) 이제 궁금증이 풀렸어요?
(따져 묻자면야 수없이 물을 수 있겠지만 관둔다. 그 얘기가 어떻게 해도 지금 자신의 문제로 연결될 것 같아서.)
서정현이 증발한 건 알고 있어요?
없어지기 전에 당신이랑 연락을 많이 했다고 김재욱이 그러던데.
윤지서:(증발 이야기가 나오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입술을 몇 번 씹다가)
그럼요. 알지.
정현이랑 얘기한 게 다 그거 때문인데.
증발, 그거. 증발...그래, 증발이라고 부르는구나...
잘 어울리네...
서정현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어. 맞죠.
뭐가 어떻게 돌아간 겁니까.
윤지서:(무언가를 고민하듯 눈 아래가 솟았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희예.
내 친구에요.
박태길:(표정이 사뭇 굳는다.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윤지서:1년에 한 번 걔를 보러가요. 그래도 친군데. 잘 살아있나 보고, 얘기도 나누고.
근데 얼마 전에 갔을 때는 대뜸 앉자마자 그거부터 물어보더라고요.
지서야, 하늘 빨개졌어? 붉은 오로라, 그거 떴어? 하고...
그 땐 아직 하늘이 이 꼴이 아니었지.
그래서 모른다고 했거든요. 그런 일 없다고. 걔가 자꾸 얼이 빠져있길래...오로라가 뭔데 그래, 하고 물었었어.
그러더니 희예가 이상한 말을 해요.
윤지서:이 시대가 곧 종말을 맞이한다고. 현수 떠나서 너 살고 싶은대로 살아야 된다고. 남은 시간이라도.
(눈이 가늘어진다. 허공에 있는 것을 노려보듯이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지다가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본다.)
불안해지면 정기현 팀장을 찾아가라 하데.
도와줄거라고.
나도 정 팀장 좋은 사람인 건 아는데, 그냥 위례청에 일말의 고리도 안 남기고 떠나고 싶어서.
그렇게 떠나야지, 떠나야겠다. 싶어서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희예가 종말론 같은 거 믿는 애가 아니거든요.
걔는 자기 눈으로 안 본 건 안 믿는 사람인데...왜 자꾸 종말같은 소리를 할까, 사람이 확실히 콩밥 오래 먹으면 미치기는 하나보다. 그랬다가...
점점 몸이 이상해져.
윤지서:몸에서 중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가...어떤 때는 땅으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았다가...
정신이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 치면, 그게 자꾸 풀리는 느낌이 드는 거에요.
(이어지는 말은 꿈결마냥 나긋하고 조용하다.)
내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
이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어.
근데 정현이도 딱 그 때 같은 증상을 겪고 있었거든요.
윤지서:... ...정현이는 착해. 붉은 오로라랑 우리 증상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뭔가 있다, 희예는 뭔가 알고 있는 거다. 도망가야 한다. 내가 설득을 했는데.
끝까지 재욱 씨랑 같이 있다 가고 싶대. 자기가 선택하는 행복이 그거라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그 상황을 재현하듯.) 그런데 결국 원하던대로 끝까지 재욱이랑 같이 있었나봐.
잘 됐네, 정현이는.
그러니까, 떠난 당신은. (지서를 손을 펴 가리킨다.) 그 증세가 이제 없어요?
계속.
(시선이 호걸에게로 옮겨간다.)
정호걸:(윤지서가 말한 내용이 비단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이드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천천히 미간이 좁아지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직. 전혀...
윤지서:(입꼬리를 방긋 올려보이며) 그럼 호걸 씨는 좀 더 사나봐. 하긴, A급이니까.
(따라하는 것처럼 감정 없이 입꼬리를 방긋 올렸다가 내린다.)
윤지서:경고를 해 주는거에요. 미련하게 버티지 말라고...
박태길:번져갈 거라는... (미간을 좁히고 고친다.)번져갈 거라고 믿는다는 얘기네. 서정현 같은 케이스가. 가이드들을 상대로.
공백을 메우자 예상치도 못했던 그림이 나타났습니다.
붉은 오로라와 종말. 설마 그런 단어들이 이 사건에 낄 줄은.
정말 윤지서의 말대로, 가이드들은 서서히 증발해가는 걸까요?
정기현은 무엇을 알고 있길래 두 사람에게 은밀히 조사를 부탁한 걸까요...
박태길:이희예는 그럼 뭐야. 증발을 일찍 알아서 자기 가이드가 없어지게 두느니...
죽였다?
윤지서:그랬나. 희예 생각은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처음에 몇 번을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줬으니까.
(아무리 곱씹어도 당장 할 말이라고 해봤자...) 잘 들었어요.
우리는 정팀장이나 만나러 가야겠네.
윤지서:아무래도 나보다는 정 팀장이 더 많은 걸 알고 있겠죠.
난 나 하고 싶은거 하다 사라질게요.
박태길:(말한 게 다 진실이라면, 윤지서의 죄목이라고 해봤자 무단결근말고 더 있으랴. 끌고갈 것도 아니고 두고 일어나야지.)
뭘 할 거예요.
윤지서:그냥. 혼자 조용히...책임질 거 없이.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 좀 보내고 싶어요.
나 혼자.
(눈을 천천히 감고는 숨을 내쉰다.) 좀 쉬고 싶네요. 잘 가요.
박태길:(느리게 일어난다. 호걸을 보기가 쉽지 않다. 따라오겠거니, 지서를 뒤로 하고 걷는다.)
윤지서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나한테 좀 너무하네. 상황이.
난 화만 내면 될 줄 알았거든. 호걸 씨가 결정한 걸 두고.
정호걸:(반사적으로 미안합니다, 소리가 나오려다가 막힌다. 이쪽도 머리가 어찔하기는 매한가지다.)
두 사람은 윤지서를 찾기 위해 올라왔던 골목길을 내려갑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마쳤습니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겠죠.
박태길:어이가 없네. 정팀장. 내가 아는대로 불랄 때는 오리발을 그렇게 내밀고...
정호걸:가서 또 물어보믄...뭐라도 답을 혀 주시겄죠.
(열받아서 안되겠어. 핸드폰을 꺼낸다.) 전화기 둬서 뭐해.
(자초지종을 듣겠다보다는 그냥 목 닦고 계시라 하겠다는 심보지만. 정팀장 번호를 누르고 통화 꾹.)
뚜르르...뚜르르...뚜르르... ... ...
신호음이 오래 이어지다가, 안내음성이 나오는군요.
(이 양반 생전 전화 안 받은 역사가 없는데. 뭐 둘이 짰냐? 윤지서가 있었던 방향을 공연히 돌아본다.)
박태길:(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커버를 덮는다.) 이거고 저거고 참....
작정하고 안 받는 거 아니겠지.
(그래봤자 본부 가면 자기가 어쩔 건데.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고서 큰 보폭으로 걷는다.) 운전 내가 할 거예요.
정호걸:...뭐, 바쁜 일이 있으실 수도 있고... (허술한 예상을 내놓는다. 차에 다다르면 키를 꺼내 문을 열고) 가 봅시다, 함.
(멀뚱..)
박태길:(키 줘. 운전석 자리에 마주서서 손 내밀고 있기.)
정호걸:여서 서울 올라갈라믄 3시간도 더 걸리는데요. (그러나 거절하지는 않고 태길의 손에 키를 올려놓는다.)
박태길:세시간 운전 자기만 하고 산 것처럼 말하기는. (받고서 즉각 올라탄다.)
정호걸:(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맨다. 하루 내내 운전하다가 조금 어색하게...)
박태길:(박태길이 모는 차는 서울을 향한다... 별로 안전운전은 아님)
(입 꾹 닫은 채로 머리를 쓴다. 정팀장이 왜 전화를 받지 않는가, 같은 어차피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는 안건은 점점 뒤로 제쳐지고 남는 건 금방 두드려맞은 폭탄의 잔해다.)
정호걸:(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지서 씨 말마따나 10년 전부터 이미 누구는 알고 있었다는거믄, 해결책이 없는 거 아닙니까.
박태길:다르지.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거랑 답이 없다는 거랑은.
이희예가 최선을 다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호걸:(
최선을 다하면 해결될 일이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한다. 이희예의 사고를 짧게 따라가본다. 가이드가 사라지면 영영 못 보는 거지만, 죽이면 시신이라도 남으니까...?) ...글쎄요.
(설마 그런 섬뜩한 생각을.)
이희예가 뭘 혔는지까지는 모르잖습니까. 가이드 그래 헌 것 말고는.
박태길:(모르지. 태길은 어쩌면 이희예가 섰을 사고의 출발선에 가 있다. 증발. 가이드가 없어진다. 정호걸이 없어진다...)
(비로소 되새기는 중이다. 가이드 잃은 심경을 안다. 센티넬은 약자다. 내가 그런 말은 왜 했지? 사실이니까 같은 헛소리 그만하고. 예전 파트너를 끼고서는 안 했을 말이잖아.)
(정면만 본다.) 긴급반 간다는 거 취소해요.
정호걸:(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들린 말에 태길을 돌아본다.)
박태길:신청 아직…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치솟는 짜증) 아니 냈어도 뭔 상관이야. 취소해.
정호걸:(살 날 얼마 안남었으니까요? 하는 자기 말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잠깐 참는다.) 뭣 해보시려고요?
박태길:(그간의 가이드. 첫 번째는 그쪽에서 포기했다. 두 번째는 사고로 은퇴. 세 번째는 상대의 태만이 도를 넘어 합의 아래 결별. 그리고 네 번째.)
(드디어 좀 잘 해보자고 생각했더니 왜 일이 이렇게 됐을까? 정호걸이 떠나기로 마음먹었음에 있어 이 증발 문제는 변수가 아니고. 그러니 자신에게 남는 것도 다른 게 아니라) 몰라?
(돌아보면서 빙긋 웃는다.) 아무튼 끝내주는 거.
정호걸:(태길이 빙긋 웃는 모양을 가만히 보다가 머리받이에 머리를 대고 정면을 본다. 윤지서가 말한 증상에 대해 떠올린다. 몸 상태가 나빠지고 능력이 널뛴다. 그것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은 괜찮지만,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미 가이드로써 생은 다 한 셈이 아닌가...)
이 일이 일단락 될 때까지는 있겄습니다.
일이 끝나기 전에 증상이 생기믄 이동 여부랑은 관련없이 가이드는 교체하셔요.
지체없이 말씀드릴텡게.
박태길:이 일 끝날때까지는 처음부터 말했던 거야. 나는 취소하라고 하고 있잖아요.
박태길:(그렇게 얘기가 오가는 사이 평범한 낮의 고속도로에 변화가 생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야에 넉넉히 머무르던 차들이 점점 줄어든다. 어떤 차는 지나치게 빨리 가고 어떤 차는 속도를 늦춘다. 둘이 탄 차의 주변만… 비었다… 깨끗하게.)
할만큼 하고 싶지 않아? 쓸모없어지기 전에.
정호걸:(이번 일이 박태길의 심경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언제는 잡혔겠느냐만...)
어째 그런 소릴 허신대요. (하지만 저 말은 확실히 불안하다. 자신이 저 말을 뱉었을 때와 태길이 뱉었을 때는 문장에 깔린 저의가 분명 다를 것인데.)
할 만큼 허게 해주시는 것이 무리하겠다 소리믄 안 헙니다.
박태길:(차들을 꺼지게 하느라 제법 바쁘게 움직였던 눈이 평정을 찾은 참이다. 호걸의 말을 듣고는 흐흐흐 채신머리 없게 웃는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금반:
박태길:근데 내가 오늘 깨달은 게, 어떤 일은 내가 좋다 싫다… 하는 게 의미가 없더라고. 그냥 일어나버려. 호걸 씨가 긴급반으로 이동한다고 결심한 게 그런 일이고…
내가 앞으로 좀 다르게 살기로 정한 것도 그런 일이고.
정호걸:(어떤 다름인가, 하는 것은 굳이 묻지 않는다. 사실 애초에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가 필요하다는데 어떻게 그걸 뿌리치고 가겠는가. 파트너가 필요하다는데.
마지막까지. 그런거다.)
예, 그럽시다.
(언젠간 그 날이 온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일이라면...최소한 끝까지, 무언가를 책임져보기는 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조금은 속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여전히 체한 것처럼 돌덩이 하나가 남아있기는 해도.)
그럼 제가 어째 대해드려야 하는데요.
박태길:이렇게 대하고 싶다 저렇게 대하고 싶다 생각이 있는 채로 대해봐... (말하다가 열받는다. 자기가 이러면서 나보고 뭐가 어째. 본인이 나 없어도 괜찮게 구니까 자신도 너 없이 괜찮은 인간 해온 것 아닌가. 이 부분에서의 이해관계는 틀림이 없다고 믿어왔건만 통수나 맞았지.)
'보고'는 무슨 뜻인데? 뭘 보시게요.
정호걸:(이렇게...저렇게...막연한 단어가 머릿속을 떠다닌다.) 태길 씨 허시는 거 보고요. 위험한 짓 허시믄 잡아다 말리게.
박태길:(위험한 짓을 하면 된다는 뜻이구나. 어차피 그럴 거였으니까 기뻐한다.)
그라시믄 가이드 관둬야지요.
저 맡은 센티넬 하나 제대로 못 챙긴 셈이니까는.
박태길:뭘 안 하니까 이동한다, 뭐 해본다니까 그만둔다... (기가 차서 맥없는 한탄조다.) 내 탓만 쉽지.
정호걸:이래 안 하믄 꼭 일 치실 것 같으니까는.
제 센티넬이 위험한 거 누가 보고 싶겄습니까.
박태길:(어쨌든 이득 없을 소리는 안 한다. 진짜 안 내키냐느니, 위험하게 굴면 뭐 어쩔 거냐느니 그런 소리같은 건... 행동도 전에 괜히 가자미눈이나 뜨게 할 테니까. 긍정도 부정도 안 하고서 운전이나 한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타고, 승용차는 지체없이 서울로 진입합니다.
늦은 밤이지만, 위례청 본부에는 아직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습니다.
박태길:(팀장실에 불이 켜져있나 아닌가 가늠해보다가 관둔다.) 보고요. (성큼성큼 걸어 엘레베이터로 직행)
두 사람이 로비로 들어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면 얼굴을 아는 직원 몇몇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박태길:안녕 못해요. (웃으면서 대답하고 지나치기)
곧장 정기현의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갑니다.
태길의 대답에도 직원들은 그러려니, 하는 것 같네요.
박태길:(기행을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비법... 바로 늘 이상하게 구는 것이다)
막말로 이렇게 조용히 찾아가주는 것만도 양반이지. 안 그래요?
불투명한 유리 안으로 보니...불도 꺼져 있는 것 같네요.
박태길:(재밌다. 하핫 웃는다.) 어떻게? 때려서? (하지만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웃음기는 씻겨나간다. 몇 번 더 당겨보다가 다시 정기현에게 전화를 건다.)
직원:(복도를 바쁘게 지나가다가 사무실 앞에 선 두 사람을 보고는) 정 팀장님 볼 일 있으세요? 오늘 일찍 가셨는데.
가족 생일이래요. 꽃다발까지 들고.
박태길: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2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지능
기준치: |
80/40/16 |
굴림: |
1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지난 n년여의 시간동안 정팀장이 오늘이 누군가의 생일이라고 일찍 들어간 적이 있는지 반추해봄)
흠...종종 경조사를 대며 일찍 퇴근한 적은 있습니다. 그도 사람이니까요.
작년에는 일이 바빠 가족 생일을 못챙겼다며, 다음에 갚아야 한다는 푸념을 들은 것도 같네요.
하지만 그 생일이 오늘이던가...? 정기현이 자기 사정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말해주지는 않았습니다.
박태길:(그러나 생각해보면 진짜인지가 알 바인가? 박태길은 오늘 안에 정기현을 찾을 작정이고, 가족 생일인 게 사실이면,) 좋은 날에 봉변당해야겠네.
직원:왜? 뭐 보고하실 거 있으세요? 내일 출근하면 하시지. (모르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린다)
박태길:급한 일이 생겨갖구. 알려줘서 고마워요. (직원의 양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은 다음, 지나쳐서 간다. 회사에 없으면 들를 곳은 집부터인가.)
태길과 호걸은 별 소득 없이 위례청 밖으로 나옵니다.
차가운 밤공기가 서늘하게 뺨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박태길:(그냥 본부장 사무실로 직행하고 싶다... 옛정이 뭐라고 내가 이 고생을...)
취객:어이구, 어이구...미안합니다. 사람이. 어어.
취객은 연신 손을 내저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네요.
정호걸:(취객이 넘어질랑 말랑 다가올 때부터 손을 내밀 것 같았다가...순간 휘청인 태길의 어깨를 붙잡는다.) 어어.
취객은 여전히 비틀거리며, 태길을 보는 듯 마는 듯 하더니 비척비척 멀어져갑니다.
박태길:(신경 예민이 극에 달해 괜찮습니다 조심하세요 소리도 안 한다. 그냥 멀어져가는 뒤꽁무니를 눈으로 좀 좇는다.)
그러다보면, 태길의 넉넉했던 주머니에 약간의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박태길:(....?) (뭔가 감이 있어서 대로변에서 비껴난, 사람 눈에 덜 띌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확인한다.)
태길이 자리를 옮겨 주머니에 들어있던 것을 꺼내보면...
좀 지난 모델이긴 하지만 사용감은 많지 않고, 배터리는 반 쯤 충전되어 있고...
박태길:(호걸에게 보여주고... 열어서 확인...)
문자함에도, 연락처에도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박태길:(아까의 취객을 쫓아라도 가야 하나. 정기현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인가...) 뭐가 올 느낌인데. 전화나 문자나.
핸드폰을 열어 이리저리 확인하고 있자면, 태길의 예상대로...
최소한, 태길이 외우고 있는 번호는 아닙니다.
정호걸:정 팀장님일까요잉. (하지만 왜 굳이 정기현이? 눈썹을 비튼다.)
박태길:(모르겠다. 밝아진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가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댄다.)
태길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는 잠시 조용합니다.
박태길:(산타클로스야 뭐야. 친근한 호칭이 그대로라 약간 할 말에 갈피를 못 잡는다.) 얼굴 보고 얘기하지. 이게 뭐예요.
정기현:만나려고 해도 먼저 연락할 방도가 이것 밖에 없었다. 양해 좀 해 줘라.
... ...윤지서한테 연락 받았다. 너희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박태길:(허.) 고맙기는. 왜 안 데려왔냐고 쪼인트 까이고 대거리할 생각으로 놔준건데.
이게 다 뭐예요. 이희예랑은 팀장님 무슨 관계고. 지금 어딨어?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가이드는... (물음표살인마 on)
정기현:야, 그만. 그만. 이걸로도 오래 통화하는 거 안 좋다. 감시하는 놈이 한둘이 아니니까 목소리 낮춰.
정호걸:(지척에 서서 기현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감시라는 말에 또 눈썹이 삐죽 올라간다.)
박태길:ㄱ(가암시? 벌어진 입으로 형태소만 나오고 더 이어지지 않는다.)
정기현:이쪽으로 연락할거니까 그 핸드폰은 버리지 말고, 문자로 주소 하나 넣어줄게.
그리로 가면 차 내 줄거다.
너희 위례청 차 타고 갔었지? 그건 두고 택시라도 타고 이동해.
박태길:(아주 첩보전이 따로 없네.) 007이야 뭐야.
정기현:상상력 좋네. 007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여.
박태길:(하... 잠깐 고개 쳐들고 하늘 본다.) 내가 정이 있고 팀장님 아직 안다고 생각하니까 따라주는 거예요.
지금 상황으로는 누구보다도 제일 수상하셔. 알지?
정기현:만나면 아주 길게 얘기해줄테니까, 일단 가 봐.
나도 믿을 건 너네 밖에 없다.
몸 조심하고.
박태길:따뜻하게나 있어요. (툭 뱉고는 전화 끊는다.)
전화가 끊기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문자가 도착합니다.\
박태길:(헛짓거리이기만 해. 다 들어엎는다... 문자를 읽는다.)
[ 서울 광성구 철계동 월드 모터스 xxx-x ]
정호걸:정 팀장님이 이래 철저하신 분인 줄 몰렀네요.
(완전... ...덜렁이 아니었던가.)
박태길:하루아침에 될 거야, 이게? 준비한 게 몇달인지, 몇년인지...
(그 덜렁이가 말이다)
정호걸:핸드폰에, 무슨...사람도 쓰는 것 같고요잉. (어째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기분이군. 차가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도로를 바라본다.) 택시부터 잡어야겄네요.
박태길:(또 차야) 몸이 아주 시트에 들러붙겠네. (휘적휘적 대로에다 손 흔들어 택시를 잡는다.)
다행히 택시를 잡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주소를 부르면 택시 기사가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하며 차를 출발시키는군요.
박태길:(싹 다 나만 빼고 작당질을 하는 기분. 살면서 느껴본적도 없는데 아주 구리다. 어둡고 딱딱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기대어 도착을 기다린다.)
대체 어디에, 어떤 진실을 이렇게 꼭꼭 숨기고 있던 것인지.
주차장만한 공터를 통째로 부지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작업장 중 한 군데만 불이 켜져 있네요. 약속한 것처럼.
두 사람이 작업장 쪽으로 다가가자, 한 사람이 걸어나옵니다.
박태길:(알아서 말해주고 편하네.) 예. 차 받으라고.
카센터 주인:하여튼 정기현이가 처세술이 좋은가배. 수상쩍시리한데까지 다 오게 하고...있어봐.
(작업장 입구 근처, 작은 책상 앞 타공판에서 차 키를 절그럭거리며 고르기 시작한다.)
박태길:(그 모습을 지켜보다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린다.) 잘 알아요? 정기현이.
(아니고서야 이게 무슨 친근감인지.)
카센터 주인:잘? 잘은 모르지. 오래는 알았지.
이거다. (차키 하나를 꺼내들고 태길에게 건넨다.)
박태길:(받아들면서) 오래라고 하시면, 얼마나 오래.
카센터 주인:(그렇게 말하다가 하늘을 보더니) 아니다, 10년이다. 딱 10년이구만.
딱 하늘 저 꼬라지 났을 때부텀이니까.
어두운 밤하늘에 붉은 오로라가 덧씌워지듯 스멀거리고 있습니다.
박태길:(차키의 금속부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헛웃음이 나온다. 10년? 시작부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카센터를 이용하고, 그러면 나한테도 팁을 쫌 줘야지.
그 자슥은 나한테 연락 딱 한 통 하고 말도 없어서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호걸은 아주 잠깐...)
박태길:(몇 푼 쥐여주고 넘어간다고 안될 것 없다. 그러나 이쪽이 하루종일 말하고 있건대, 저기압이 끔찍하다고.)
10년이 부질이 없네. 정기현씨는 친구 다시 만드셔야겠다. (한손으로 자기 얼굴을 문지르면서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다르게 뜬다. 아주 다르게.) 차 어디있습니까.
안내해.
(주인을 엄지로 짓누름과 다름없이 능력을 써갈기면서 문득 드는 생각. 공무원 삥땅치려는 시민도 협박하면 안되나?)
정호걸:(잠깐, 이 기운은. 뭔가 시작됨을 느끼고 태길의 앞을 막아서지만...아무 소용이 없다. 미간을 좀 찌푸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태길이 주인을 바라보는 순간, 주인의 몸이 군기 잘 든 이등병마냥 꼿꼿하게 세워집니다.
그리곤 롤스로이스를 몰고 온 재벌을 대하듯 깍듯하게, 양 손으로 태길을 안내합니다.
이쪽입니다, 하고 안내했다가 또 공손하게 키를 받아가더니, 다른 차 사이에 끼어있던 차를 공터 한가운데로 빼 놓고 다시 키를 반납하는군요.
번호판도 갈았으니 교통 추적도 안 될 것이고, 선팅도 아주 짙게 해놓았다는 첨언을 빼놓지 않습니다. 마치 태길이 자신의 노고를 치하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요.
박태길:(그렇지. 응당 알맞은 대우를 받는 태도로 주인의 굽신거림을 방임한다.) 거래가 깨끗해야지. 받을 만큼 다 받고서 또 주머니 채우려고 하고 그러면 안되지.
서비스 잘 해주신 거 내가 기억할게.
(주인을 지나쳐가며 등 어림을 툭 치고 차에 탄다.)
정호걸:(태길의 뒤를 따르던 호걸만이 주인의 굽신거림에 목례를 하기는 하지만, 주인은 영 허리를 펼 생각이 없어뵌다.)
태길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공터를 빠져나가는 내내 주인은 '살펴가십시오.' 하며 정수리가 땅바닥에 닿아라 인사를 합니다.
박태길:(룸미러로 눈길을 주면서) 저정도까지 안 시켰는데. 인간이 겁이 많네. (수완 좋은 타입은 대개 저러더란. 굽신거리는 법을 알다보니까.)
정호걸:... (여전히 미간을 옅게 찌푸린 채 다문 입가를 문지르고 있다가, 의식적으로 표정을 푼다.)
아까 도로에서도 그러셨죠잉.
박태길:들켰어? (부디 알아달라는 식으로 써놓고서 발뺌이다)
정호걸:제가 아까
보고요. 라고 허지 않었나요.
박태길:...위험한 짓이 나 위험한 짓 하지 말라는 줄 알았지. 전범위야? 어렵다 그거.
박태길:여태 내가 싫어서 안 넘었죠. 오늘은 좀 넘고 싶어. (안 돼? 라는 눈으로 본다.)
정호걸:... ... ...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다가) 왜요.
왜 넘고 싶으신데요, 오늘은.
박태길:(검지로 목 옆을 가볍게 긁는다) 내가 오래오래 잘해보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는데 그사람이 내가 별로래.
그래서 내일도 넘고 싶고 글피도 넘고 싶게 생겼어.
정호걸:(엄지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댄 채 침묵한다. 그러는 동안 턱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가...몇 번을 반복하더니)
차 좀 어디 세워보이소.
박태길:(흘긋 보고 잠깐 생각한다. 아직 어디로 가라 연락도 안 왔으니...) 그럴까? (그리고서 마땅한 위치를 찾아, 갓길로 차를 댄다.)
정호걸:(태길이 차를 세우자, 천천히 등받이에 기대며 숨을 깊게 내쉬고) 무슨 노력이요?
딱 저 필요하다 생각허는 만큼만 가이딩 받았다가 멋대로 끊어블고, 여그저그 능력 남발허시고, 그러다 나 얌전히 잘 있었다 웃고 있는 거요?
그게 저를 위한 노력입니까?
박태길:(생각이 있으셨겠지. 내가 너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무슨. 그건 바꿔 말하면 네가 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지. 드디어 물꼬가 트인 불만거리 앞에 차라리 흔쾌하다. 기분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의존성 높아지지 않게 컨디션 조절한거고, 능력 남발…(핫 웃는다) 그래 그건 내가 버릇이 나쁘다 치자. 그래도 자제한 게 사실이고.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좀 켕기면 하나하나 시말서라도 써?
정호걸:의존성이요. (하하하, 하고 헛웃음 같은 게 튀어나온다. 그래, 그것 때문에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혹여 김재욱이나 박현수 같은 꼴이 날까봐 말을 안 했더니.)
예, 그래 칩시다. 가이드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지 않고, 혼자 컨디션 조절 허셨다고요.
하믄 저는요?
짝이라고, 파트너랍시고 붙은 센티넬이. 자꾸 저짝으로 멀어지면서 괜찮다, 괜찮다 허는 걸 보고 있으믄 됩니까?
그러다 태길 씨가 아주 뒈져블기 전에만 구해드림 됩니까?
하믄 지금은요. 곧 죽어블거니까 끝장 보자 싶어서 도를 넘고 싶으신 거고요.
정호걸:(거기서 잠깐 말을 멈추고 숨을 쉰다. 심호흡을 하듯이.)
...참 너무하십니다. 예.
제가 이래 말하는 걸 보고 싶으셨던거믄 잘 허셨네요.
박태길:(조용하다가, 말없이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연다. 담뱃불을 붙여 한모금 빨고 뱉기까지가 정리하는 시간이다. 들은 말과 해야 할 말을.)
(뭐부터 말할까. 몰랐던 게 아니라고? 어렴풋이 짚이는 게 다였다고 해도 네가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고. 어딘지 떠 있다고, 그정도는 나도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너도 같은 생각이겠거니 했다고. 애초에 일심동체 완벽한 궁합으로 붙어다니는 파트너같은 건 환상이잖아.)
(위기와 공포를 넘어 무력감을 부풀리는 게 내 능력이다. 능력을 털끝만큼도 안 쓰고도 너한테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을, 미리 다르게 알았더라면 뭐가 좀 나았겠지. 이렇게까지 나한테 최악인 방식으로 말고…)
끝장 보자는 게 맞아요.
그니까... (눈밑을 찌푸린다. 살다 박태길이 할말이 혀 뒤에서 안 꺼내지는 날도 오고.)
증발이니 뭐니 그거때문이 아니라. 어차피 호걸씨가 갈 거고 기회가 안 올거라고 하면.
박태길:한 번쯤은... 맡겨봐야 할 거 아니야. 나는 그러려면 핑계가 필요해.
(이게 알아먹히기나 하겠냐... 눈을 깜빡인다.)
너한테 나 죽을 때까지 보고 있으라는 게 아니라 내가 그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고. 살던 버릇이 이렇게 생겨먹었는데.
(더 얘기하려다가 입을 닫는다. 이건 갱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원래 마음먹은 그대로 똑같이 할 거라는 얘기를 좀 불쌍하게 들려주는 거에 가깝지. 에이씨...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 등받이를 아예 눕혀버린다.)
정호걸:(물끄러미 태길을 쳐다본다. 이런 대화가 오간 후에 태길을 이해하게 되었느냐면, 아니다. 인지와 이해는 다르다. 그러나 정호걸은 인지한만큼 상대를 살필 줄은 안다.) 제가 일전에 말씀 드렸지요.
생각하기로는 가이드가 센티넬을 더 생각헌다고.
그건 집착이나 의존 같은 게 아닙니다. 태길 씨의 위기를 제 위기처럼 생각헌다는 거지. 그건 일체감입니다.
최소한, 제가 태길 씨와 파트너를 하는 동안에는요. 모든 행동의 근본 이유가 태길 씨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말씀 안 드렸던 겁니다. 혹여 저헌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길 씨가 상주 사람들이랑 같은 길을 밟지 않았으면 하니까. (그러더니 태길이 눕혀놓은 운전석 등받이를 세운다.)
내려서 조수석 타이소, 운전할라니까.
박태길:(갑자기 세워진 등받이에 으엌, 들은 말을 붙들어놓긴 한 채로 조금 황당한 눈.)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번번이 자기가 운전한다고 맨날. 나 운전 잘 해.
박태길:(아니 무슨 이 마당에 자겠다고 누웠겠나... 됐다. 내려서 호걸과 자리 바꾼다.)
정호걸:(조수석 등받이를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끝장 보는 거 좋지요.
원하시믄 언제고 봐 드릴 겁니다. 그게 굳이 오늘일 필요 있습니까.
(차를 다시 천천히 출발시킨다.)
박태길:(의문을 표했으나 정호걸이 운전을 더 잘하는 건 맞다. 출발하는 안정감이 다르긴 하다. 담배 마저 피우는 중.) 누가 오늘 어쩐대. 밑준비 하는 거지. 내가 이렇게 보여도 좀 유능하고 그릇이 커서 하루아침에 바닥나지 않아요.
차를 타고 톨게이트를 빠져나가고 있을 때, 마침 정기현에게서도 문자가 도착합니다.
차 받았으면 범연으로 오라고 하는군요. 자세한 주소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주소지를 찾아가보면, 점점 바닷가에 가까워집니다.
박태길:(다 와가나... 싶다. 등받이 한껏 젖히고 누운 채로 차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다.) 뭐 됐다고 생각하지 마요. 나 화 풀린 거 아니야.
정호걸:(화 낸거라고? 생각하듯이 눈만 돌려서 잠시 쳐다봤다가) 그러셔요.
저는 태길 씨 헌테 화 안 났습니다. (표지판을 확인하다가 좌회전을 한다. 또 언덕이로군.)
박태길:(안 나셨겠지. 이 양반은 도대체가 파트너니 뭐니 나한테 강론 읊을 자격이 있나... 또 무슨 사고를 쳐줘야 참신할지나 생각하고 있는 중.)
이놈의 나라는 언덕이 왜 이렇게 많아. 하여튼.
차가 어느덧 언덕배기 근처의 주차장에 멈춥니다.
박태길:(이쯤되면 반갑다고 하긴 해야겠다. 벨트 풀고 벌컥 내린다.)
사지 멀쩡하시네요.
정호걸:(태길을 따라 내리고 정기현에게 다가간다.)
박태길:왔지 그럼 갔어? (추위에 눈밑을 찌푸린다.) 폼잡고 서있지 말고 뭐, 타든가요. 아니면 어디 또 가?
정기현:아니, 나도 할 일이 있고. 너희도 봤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서.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곤 두 사람의 뒤와 옆, 사방을 확인하듯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박태길:(정기현을 째려보는 수준으로 응시하고 있다가 두어박자 늦게 같이 돌아보기 시작.)
정기현:아무도 안 달렸네. 차 갈아타라고 한 게 정답이었나보다.
박태길:(하...) 본론 좀 들어갑시다. 누가. 누가 미행을 달아. 누구한테 쫓기는 건데?
대포폰 대포차, 이런 거에 팀장님이 인맥이 왜 있어요? 딱 10년을. 뭔일이냐고.
정기현:10년 전부터, 위례청이 날 감시하고 있다. (뒷말을 꺼내기 전에 시선이 잠시 하늘을 향한다.) ...희예랑 이채를 파견한 뒤부터 그랬지.
이희예가 정이채를 죽인 건 알고 있지. 자기 가이드.
정기현:(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에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잠시 떨군다.)
그 사건의 계기가 된 일이 있다. 그게 내가 부탁한 일이었어.
...그건 이희예한테 직접 들어라.
박태길:(혼란스러워 관자놀이를 짚는다. 위례청에서? 이희예 사건을 계기로? 그리고) 빵에 있는 사람한테 가라고요?
정기현:이 주차장 뒤쪽에 이채 함 놓은 납골당이 있어. 거기에 있을거다, 지금은.
(하, 이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생각하다가)
이희예는 전무후무한 S급 센티넬이야.
그런 사람을 얌전히 교도소에만 가둬둘 리 없지.
걔는 위례청의 음지나 다름없다.
박태길:...아니야, 그러지 맙시다. 진짜 행여나...
무기징역 때려놓고 뒤에서 써먹었다, 그런 얘기는...
박태길:(미치겠네. 의식도 전에 절로 마른세수를 한다.)
정기현:위례청은 사람 하나 허투루 쓰는 놈들이 아니다. (눈썹을 비틀며 태길을 바라본다.)
희예가 죽었잖아?
다음은 너였어.
박태길:뭔... (하핫.) 뭔 소리예요. 진짜로.
정기현:얼마나 탐냈겠냐. 박태길 하나만 잘 구워삶으면 정계가 다 위례청 손아귀 아래에서 쥐락펴락 할 텐데.
박태길:이희예가 구워삶아졌다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지금... (S급이. 무슨 수를 써서 그렇게 순순하게.)
이희예가 자기 가이드를 죽였잖아. 그렇게 조종을 했다는 거야? 아니면 누명입니까?
정기현:(고개를 젓는다.) 편의를 봐 주는거지. 영치금도 넣어주고, 이렇게...
기일마다 납골당도 오게 해 주고.
(그러다가 입을 딱 다문다.) 나머지는 이희예한테 들어라. 나 같은 민간인보다야 센티넬끼리 얘기하는 게 더 이해가 잘 되겠지.
(몇차례 입을 열었다가 닫지만 의미없는 시간일 뿐이다. 납골당. 말없이 돌아서면서 호걸에게 손짓을 한다.)
정기현:(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본다.) 그래, 이제 가 봐도 되겠다.
나는 또 들렀다 갈 데가 있으니까... ...
얘기 끝나면 서울에서 보자.
박태길:(유명인사를 이런 식으로 대면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정기현의 말에 멈추어) 공사다망하시네.
여태 몸 한개로 어떻게 버티셨대.
정기현:(돌아서 몇 걸음 걷다가, 태길을 돌아보고 어깨를 슬쩍 으쓱인다.) 난 가진 게 몸이랑 시간 밖에 없잖아.
몰라, 나이 먹으니까 이거 밖에 안 남더라고. 눈치랑.
박태길:(정년까지 버티려면 잘 간수하라는 악담같은 덕담을 으레 던질 차례인데. 지금 맥락에서는 할 수가 없다.) ...서울에서 보는 거예요. 길 잃지 말고.
정기현:(그려, 하고 대답하더니 손을 대강 휘적이며 다시 돌아 걷는다.)
정호걸:(돌아가는 기현에게 잠시 인사를 했다가) ...가 보시죠. 거 희예 씨인가. 만나기 전까지는 뭐가 뭔지 알 수도 읎겠네요.
박태길:(코로 크게 숨을 마셔 몸을 부풀렸다가 어깨를 툭 내린다.) 가요.
(주차장 뒤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저쪽 바닷가 가까운 곳에 불이 켜진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층수가 낮은데에 비해 부지는 조금 넓은, 단층짜리 납골당입니다.
모든 주민이 곤히 잠든 마을. 이따금 어느 집 개가 짖는 소리만 멀리서 울립니다.
추모용 생화를 파는 노점상도 방수비닐을 단단히 묶어 다음 장사를 기약하고 있습니다.
박태길:아주 길게 얘기해주긴 개뿔, 자기는 해주는 말도 없네. (구시렁거리며 건물로 다가간다. 한밤중답게 발소리가 크게 울린다. 인적이 보일 때를 촉을 세워 대비하면서...)
(입구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 은은한 조명이 달린 천장. 추모객이 두고 간 생화들...
태길과 호걸의 발소리가 납골당 내부에 울려 퍼집니다.
이...(입술 안쪽을 질근) 이희예씨?
정호걸:(태길보다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옆에서 가만히 걷는다. 소음이 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검은 생머리를 높이 올려묶고, 검정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키가 큰 여자.
태길이 마지막으로 미디어에서 본 것보다 건조한 모습입니다.
박태길:(TV화면으로만 봤던 게 전부인 그 사람. 기다린 적도 찾았던 적도 없는데 드디어 만났다는 소감이 생긴다. 어깨를 단단하게 하고 다가간다.)
박태길입니다.
이명에 걸맞게 태길을 훑는 시선이 수 백 개의 갈래로 나뉘어 당신을 어루만지는 듯 합니다.
박태길:(그 이희예다.... 최초의 그리고 마지막 S급. 본능적인 위압감이 서리고 경의를 갖춰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이쪽은... (호걸을 가리켜.) 정호걸 씨.
이희예:알아. (태길과 두어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선다.)
태길의 주변을 어루만지던 시선이 날카롭게 변화합니다.
태길의 음성을 받아내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두 사람은 이능력, 혹은 정신력을 판정합니다.
박태길:(덜컥 들이마신 숨이 다시 나오지 않으려 한다.)
이능력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3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정호걸:
정신
기준치: |
80/40/16 |
굴림: |
50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것 같던 이능력이 천천히 거두어집니다.
이희예:(이내 호걸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가만히 턱을 쥐고 이리저리 돌린다.) 용하다. 난 반쯤 죽일 생각이었는데.
무서워?
정호걸:(순식간에 온 몸이 식은땀으로 푹석 젖었다. 호흡을 몰아쉬느라 몸이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이희예의 질문에는 눈가만 꿈틀거린다.)
박태길:(지켜보던 눈에 점차 저항감이 담긴다. 이쪽이 어쩌다 대면하게 되었다 해도 화풀이 장난감이 되는 데에 동의한 건 아니야. 뭐하는 짓이지?)
(다가가 이희예의 손목을 쥔다.) 일반인입니다.
저한테 하시죠. 얘기든... 뭐든.
이희예:(태길이 손목을 쥐고도 시선이 돌아가는 것이 한 박자 늦다. 천천히 눈썹을 둥글게 올리더니, 손을 떼고 펼쳐보인다. 나 물러나, 하듯이.)
미안.
신기해서.
(그리고 이어진 미소.) 난 가이드가 없거든.
이희예는 천천히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습니다.
박태길:(안다. 모두가 알지. 왜 없는지도...)
그러더니 곧 몸을 돌려 또각, 또각. 복도 끝에 있는 대리석 계단을 내려갑니다.
스치듯 이희예가 나왔던 복도를 보면...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군요.
박태길:(흘긋 눈길을 준다. 감시역 하나가 전부였다고?) 구속구도 없네요. (말한다. 어떻게 그게 되냐는 물음까지 담아.)
이희예:(계단 아래까지 내려가서 태길을 돌아본다.) 내 기분이 나빠지면 안되니까.
따라와.
이희예는 마치 제 집인양 접견실 안으로 들어가 앉습니다.
유리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가 마주보며 놓여 있습니다.
박태길:(대인에 서투르고 조용한 성격이라고 들었었다. 지금은 아주 다르군. 감옥밥이 사람을 바꿨는지 아니면...)
박태길:(호걸을 먼저 앉히려 이끈다. 틈새에 가볍게 이마를 훔쳐주고 눈을 들여다본다.)
정호걸:(한 순간에 몹시 피곤한 기색이 되었다가, 태길이 눈을 마주치면 입꼬리를 쓱 올려보인다.) 앉으시죠.
(소파 팔걸이를 짚고 천천히 소파에 앉는다.)
박태길:(이희예의 장난질 한방에 심사가 보통 상한 게 아니라 속으로 욕 몇마디 한다. 들리면 들으라지. 따라앉는다.)
이희예:(태길의 중얼거림을 읽었는지, 아닌지. 가만히 두 사람을 보다가 묻는다.) 지서가 어디까지 말해줬어?
박태길: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데요. 이 자리는 본인이 요청해서 생긴 겁니까?
기현 팀장이 고른 게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서.
어디까지라고 해도 별 거 없죠. 당신이 면회 중에 오로라를 찾았고, 얼마 뒤부터 이상한 감각이 찾아왔고, 그래서 떠났고.
같은 증세로 서정현도... 사라졌고.
더 궁금하면 당신에게 직접 들으라 하던데요. 윤지서도 정팀장도.
이희예:(태길이 이야기하는 것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다가)
오로라는 종말이야. 인간이 불러 온 종말이지.
센티넬과, (태길을 본다.) 가이드의. (호걸을 본다.) 보존을 위해서.
정호걸:(눈썹만 들어올린다. 튀어나올 말은 태길과 같은 것이었기에.)
이희예:위례청은 60년대 초에 설립됐어. 70년부터 관공서에 인력을 투입했고.
그렇게 야금야금 국가안보의 자리를 처먹은 지 10년.
국가에서 퍼다 먹은 연구비로 위례청은 센티넬과 가이드의 기원, 능력, 발현, 상호관계...
효과적인 인력 관리를 위한 건 전부 연구했어.
그리고 80년대 말에.
(주먹을 쥐고 소파 팔걸이를 땅! 두드린다.)
박태길:오로라 얘기입니까? (인상을 찌푸린다.) 그게 종말의 징조인지는 어떻게.
현 세대의 형질 검사 결과. (허리께에 손을 둔다.)
구 세대의 형질 검사 결과. (머리 옆에 손을 둔다.)
시간이 지날 수록 센티넬과 가이드의 능력이 점점 약해져.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마다.
정기현이 연구결과를 토대로 그래프를 만들고, 미래를 예측했다.
이희예:그 날 나온 답은 하나였어.
몇 십년 뒤, 센티넬과 가이드는 완전히 사라진다.
청장은 정기현을 쪼았지. 해결해라, 해결 못하면 알아라도 와라. 원인을.
그렇게 특별히 편성된 수사팀이 셋.
정기현, 나, ...정이채.
박태길:(약해지고 줄어드는 이능력자. 꺾이는 위례청의 입지....)
...소득이 있었습니까?
(아니겠지, 그야.)
있었어.
우리는 센티넬과 가이드의 기원을 찾아냈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 하나를 찾았지.
범읍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노인인데... ...조부 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고 했어.
어느 날부터 우물 물이 마르고, 하늘이 붉게 물들고. 마을에서 귀신 들린 아이들이 태어났다고.
이희예:입에서 불을 토해내거나, 어른들의 속 소리를 읽어버리거나, 장정 서넛이 붙어도 못 드는 돌덩이를 들거나.
100년 전 쯤인가 그랬다더군.
정호걸:(천천히 이희예의 설명을 따라가며 느릿하게 턱가를 문지른다.)
이희예:당연히 그것도 범읍이었지. (허공에 대고 대답한다.)
방금 나한테 안 물어봤니? 얘가 우물이 어딨었냐고 하길래. 그게 누구야? 하여튼.
박태길:(때아니게, 본인에게도 피곤한 능력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희예:마침 그 우물이 오로라의 근원지라는 걸 알아냈지.
난 살 만해. 거기서 괴물의 흔적을 발견했거든.
(말을 뚝 끊었다가 하, 하고 한숨을 쉰다.)
이희예가 이제서야 완전히 능력을 거두었다는 것이 느껴지는군요.
박태길:(드디어 신뢰라도 생겼나?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알 수 없다. 뒷목을 주물러 푼다.)
줄인다고 줄였는데요. 나름.
이편이 훨씬 좋긴 하네요.
이런 건 나중에 얘기하고, 그 괴물...
...외계인이라고 해야할까. 아직도 그건 모르겠다. 어쨌든 무언가가 붉은 오로라를 몰고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그 결과로 거기에 오염된 아이들이 태어났다는 것까지 알아냈어.
그게 센티넬과 가이드의 기원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100년이나 흘렀어. 당연히 이 땅에 앉은 기운은 희석되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은 구 세대만 못한 능력을 가지게 됐지.
그러다 언젠가는 능력이 사라진다.
능력자 개체수가 줄어드면 줄어드는거지, 하루아침에 증발까지 가는 건 극단적이네요. (하나만 하지)
그 때 난 착했어.
정기현도 착했고.
곧이곧대로 위례청에 보고했지.
이희예:위례청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다. 다시 뜨인 얼굴은 무언가를 떠올리듯, 노려보듯. 살벌한 기운을 띈다.)
괴물을 다시 불러들이기로 했다.
.....
박태길:(제정신인가 싶은데 놀랍지는 않을 때 가장 열이 받는 법. 손으로 자기 하관을 감싼다.)
오로라를 불러들여 땅을 오염시키면, 센티넬과 가이드의 명맥은 지켜지지.
그 대신, 그 기운을 받지 못한 인간들은.
미쳐 죽거나, 병이 들어 죽거나,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죽어버려.
그래서 범읍은 유령도시가 됐다.
박태길:...그것도 처음부터 확인 된겁니까? 기원을 찾아냈을 때부터?
이희예:아니. 이건 정기현이 후속 연구를 하고 나서 알려줬어.
대신 오로라를 부르는 것을 막으면...
너희는 더 이상 센티넬도, 가이드도 아니게 돼.
나도 역시.
언제 증발할지는 모르지. 1년 뒤? 2주 후? 아니면 당장 내일?
박태길:(미동없이 테이블에 대고 눈만 깜빡이고 있다가 입을 뗀다.) 정리 좀 할게요. 10년 전에 위례청이 인위적으로 첫번째 오로라를 불렀고, 그리고서 부작용이 확인됐는데,
그래도 두번째까지 만들었다는 얘기가 맞나요.
걔네가 미쳐 죽는 걸 무서워 할 것 같아?
아니야, 이미 미쳐있는 놈들은 무서울 게 없어.
권력에, 돈에.
박태길:자기네들 부품을 만들려고, 위례청을 존속시키려고... 생사람을...
이희예:곧 죽을 노친네들끼리 너희 목숨을 쥐고... (두 사람의 사이로 주먹을 쥔다. 마치 목줄을 당기듯.)
정호걸:(옆에서 가만히 무릎 근처에 손을 모으고 있다가) 그렇다 혀서 정이채 씨는 왜 죽였습니까?
이희예:(호걸의 질문에 모든 동작이 우뚝, 멈춘다.)
이희예:(눈이 두루룩, 굴러가 호걸을 바라본다.)
...이채는... ...
너무 강해서...
나 없이도 잘 살 것 같았거든.
(이어진 말이 속삭이듯이 흘러나온다.) 난 미쳐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서웠어...
(아무리 관대하려 해봐도 센티넬이라는 놈들은 왜 죄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지금 이 소리는...) 미쳤어?
(소파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올라선다. 태길을 내려다보며)
이채 같은 사람이, 내 파트너 가이드가 아니면.
나 같은 미친년 옆에 왜 있어야 돼?
(천천히 쭈그려앉아 태길을 들여다본다.)
야.
아프기 전에.
박태길:(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눈에 담긴 건 경멸과 저항이다. 목소리가 나옴에 서슴이 없다.) 개소리를....
이게 낫다고? 사람 죽이고 해마다 뼛가루에 대고 인사하니까 지금이 덜 아프다고?
이희예:...아파. 죽을 정도로 아파. 아니, 죽는 게 덜 아프겠어.
나한테 최고의 형벌이 뭔 줄 알아? 살아있는거야.
이채를 죽이고, 내 손으로 죽여서 이채가 없는 세상에서.
나 혼자 존나 살아있는거야.
박태길:살아있는 겸사겸사 위례청 뒤도 닦아주고. (어이가 없어서.)
이희예:(양 손으로 태길의 어깨를 붙잡는다.) 미친년놈들끼리 이러지 말자.
이어서 주변의 공기가 온 몸을 짓누르듯 무거워지더니, 바늘처럼 숨구멍 하나하나마다 틀어박힙니다.
박태길:(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대로 잡혀있다. 나도 당당하지 않다. 알고 있지만...)
....!
가시같은 손이 태길의 머리와 심장을 헤집습니다.
태길이 핑계 없이는 꺼낼 수도 없도록 꽁꽁 숨겨놓은 해저까지 도달합니다.
감히 문장으로 만들어 본 적도 없던 것들이 명징하게 태길의 귀에 때려박힙니다.
박태길:이... 헉. (다급하게 허벅쥐를 움켜쥐고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이희예의 손목을 밀어내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나가. 그만해. 낱말이 되지 못한 단음이 목구멍에서 신음처럼...)
이능력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1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꺼...져... (집중해. 집중해. 밀어낼 수 있어. 집중...)
(그러나 간신히 세운 칼날은 꺾일 때는 지푸라기처럼 맥없다. 지난 날의 자만과 증명이 모두 부질없다.)
내 손으로 죽여 시신이라도 남기면, 흔적이라도 볼 수 있잖아.
이희예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태길의 온 몸을 울립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머리끄댕이를 잡은 것처럼 날카로운 손이 쑥, 하고...
정호걸:(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는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의 1초가 될락말락. 그러나 이희예의 통제 하에서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사력이 필요했다. 몸을 까닥이는 것에 성공하자마자 이를 악물고 태길과 이희예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한 손이 태길의 몸에, 한 손은 이희예의 멱살을 붙잡고 온 힘을 다해 테이블로 내리찍는다.)
태길의 속을 훑던 손이 잠시 멈칫, 하다가 위아래의 방향을 잃고 솟구칩니다.
박태길:(버림받기보다해치는게낫다내가뒷모습만볼거라면누구도보지못하는편이낫다내가너에게한없이작아지는것보다는그렇게나초라한존재가될바에야그냥전부지우자치워버리자그편이오히려견딜만할거야이건누구의잘못도아닌나의본성이...)
(그리고 이희예가 내리찍힌 순간에. 익사의 위기에서 건져진 것처럼 커헉 숨을 토한다.)
이희예:(테이블 위에 불안정하게 앉아있던 것이 그대로 넘어가며 머리가 처박힌다. 그러나 당초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는 폼이, 미쳤다 하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다.)
박태길:(소파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으로 헐떡인다. 소용도 없이 가슴을 움켜쥐었다가, 경악에 떨리는 눈으로 호걸의 손을 봤다가, 웃음소리가 고막을 넘어 뇌이까지 찢어놓으려는 것 같고...) 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스스로에게 불분명하다.) 하지마. 큰일나. 나가.
(정호걸을 빼내야 한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강렬하다. 그러나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나?)
정호걸:(이희예의 멱을 쥔 손에 더 이상의 반항이 느껴지지 않자마자 곧장 양 손으로 태길의 귀를 틀어막는다. 시야를 가로막듯이 몸을 마주보고 시선을 마주치려 한다.) 태길 씨. 박태길. 여 보이소.
박태길:손... 손대지... (고개를 비틀면서 빠져나가려다 잡힌다. 제발. 보고싶지 않아. 구역감이 치밀고 줄어들지 않는다. 충혈된 눈을 감아버린다. 꺼져가는 음량으로) 머리아파...
정호걸:
가이딩(A급)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78 |
판정결과: |
실패 |
가이딩(A급)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5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박태길이 잠겼다. 범람과 침수는 다르다. 그곳에서 빠져나오려 팔다리를 휘적여봐야 끝에 남는 건 익사 뿐...양 손에 힘을 주고 단단히 붙잡는다.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무릎으로 태길의 양 다리를 누른다. 태길의 음성이 쥐어짜내는 것처럼 작아지자, 그대로 끌어당겨 단단히 안는다. 크게 호흡한다. 물에 뜰 수 있도록. 태길의 몸통 하며 머리를 안은 피부 끝에서부터 천천히 흘려보낸다. 호흡에 맞춰서.) 눈 감아도 됩니다. 숨만 쉬어요.
숨만 쉬어요, 숨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천천히, 소리내어 한다. 박태길은 알아야 한다. 언제고 어디서고, 자신이 가라앉으면 붙잡을 줄이 있다는 것을. 따라올라와 숨을 돌릴 부표가 존재한다는 것을. 설령 절벽에서 고의로 뛰어내리더라도 내가 그것을 두고보지 않고, 설령 내 생명줄에 손가락 하나만 걸치고서라도 당신을 끌어올릴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박태길:(몸은 긴장을 다 놓지 못했고 힘만 있다면 당장에 밀어낼 것처럼 뻣뻣하지만. 멀어지고 싶다는 의지를 감아쥐고서 무언가가 흘러들어온다. 한번도 이 느낌 앞에 갈급해본 적 없다. 조금씩만. 적당히만. 등잔불에 타죽는 나방 꼴이 될새라 한사코 선을 정했다. 맡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기어이 왔다.)
(말 좀 들어. 그렇게 말하고 싶다. 네가 몰라서 그래.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르니까 멍청하게… 그러나 숨만 쉬라는 말은 얼마나 분명하고 미더운지. 호흡이 천천히 폭을 맞춰간다. 찢어졌던 머릿속이 형체를 찾는다. 호걸의 옷을 쥐고서 생각한다. 세 번만. 세 번만 더 숨을 마시고 떨어지자. 하지만 그 결심이 자꾸 미뤄진다. 세번이 다섯 번이 되고 여덟 번이 된다. 그러는 사이에도 정호걸은 똑같이...)
(부드럽고 단단하다. 이래서 널 놓기 싫었지. 새로 이해한다.)
(가시가 박힌 것처럼 곧추섰던 등근육이 풀어졌다.)
정호걸:(불안정했던 호흡이 차츰 돌아오고, 옷깃을 쥔 손에 힘이 돌아온다. 심장이 제대로 박동한다. 여러 번 이름을 부르던 소리도 천천히 잦아든다. 태길이 안정을 찾자 이쪽도 급히 마련한 것이 거진 고갈된 게 느껴진다. 조금만 더. 바닥에 있는 것을 닥닥 긁어서라도 좀 더 단단하게 만들자. 곧 연료를 소진한 것 마냥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붙잡는다.)
(태길의 등을 두어번 두드리더니 천천히 몸을 떨어트려 마주본다.) 좀 낫지요.
박태길:(여전히 눈밑은 벌겋고 목은 메였다. 너무 많이 빨아들였다. 영 낯설고 거북하게, 체한 느낌과 비슷한것도 같은 차오름 속에서 얼굴을 닦아낸다. 좀 낫다, 그 말이 적당하다. 갈무리하듯 길고 길게 숨을 내쉰다.) 덕분에요.
(그러나 바로 뒤따라서 나오는 투덜거림.) 사람 말을 듣는 꼴을 못 봐.
정호걸:(투덜거리는 것을 보니 괜찮다. 익숙한 어조가 들리자마자 씩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태길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우뚱 소파에 앉는다. 다행입니다, 하는 소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온다.)
박태길:(나아졌다고 해도 씻은듯이는 결코 아니다. 당한 여파가 절절하게 남아있는 머리통을 잡고 관자놀이를 누른다. 그러다가 드디어 이희예에게로 주목을 돌린다.) ...좋은 거 보셨네.
이희예는 어느새 웃음을 지우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기분이었어.
박태길:(착잡하기도 하고, 부적절하게도 겸연쩍기도 하다. 이희예가 주입한 동질감이 서서히 가라앉되 여전히 앙금처럼 고여 있다.) 호되게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근데 난 이제 다른 쪽으로 이해가 안되거든….
좋아요. 분통이 나서 죽였다고 치고. 그러고서 위례청에 협력하고 종말에 대해 함구한 이유는? 차라리 다 까발리는 게 낫지 않았어?
그럼 여러 센티넬이 비통해졌을텐데. 당신이랑 비슷하게.
박태길:(종말을 막느냐 방기하느냐의 이지선다.) 정이채는 종말을 막자고 했었습니까?
박태길:…나 말이에요. (호걸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이쪽한테 한번도 내 능력을 쓴 적이 없거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사이가 틀어졌어도 똑같았겠지. 나도 모르게 생긴 일종의 성역처럼.) 이희예씨는 어때. 정이채가 당신같은 미친년 곁에 남아줄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건 알았던 겁니까?
박태길:(예상 범위를 벗어난 대답에 잠시 말을 잃는다. 일부러 피할 필요조차 없이, 나에게 당하지 않을, 나에게서 안전할, 그런 사람이 존재했고 가장 가까이에 있어줬다는 것. 그건 꿈같은 일이다. 정신계 이능력자에게 그 이상의 축복은 아마도 없다. 그런데...)
...왜 그랬어?
(이해가 안 가. 한탄조의 헛웃음을 나오는 대로 두고 미간을 좁힌다.) 정말 왜 그랬어?
난 온 세상 사람을 다 알 수 있는데, 이채만 모르니까.
말은 누구나 쉽게 해.
죄송하다, 사랑한다, 고맙다.
그런 건 9할 정도 거짓말이야.
정호걸:(태길과 희예를 얼마간 번갈아 쳐다본다. 두 사람이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어디에서 동질과 이질을 느끼는 지 이쪽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러고보니 가끔 생각했었다. 저 똑똑한 사람이 왜 되는대로 가이드를 부리지는 않는걸까, 하고.)
겁이 나니까 그래 해버리셨다는 거네요.
이채 씨가 거짓말 헐 사람인지는 안 따져보시고서.
이희예:(눈 밑이 꿈틀거린다. 태길을 보며) 네 가이드 입단속 시켜.
나 실수로 사람 죽여.
박태길:(입꼬리만 올린다. 입단속.) 될 것 같으면 내가 이렇게 잡혀살지 않아요.
(왜 좀 더 용기내지 못했습니까. 감옥에서 나와 매번 향하게 되는 게 고작 여기일 거면. 그렇게 매번 후회만 할 거면. 거짓말을 믿는 보통 사람들이 아무리 어리석게 보였어도, 정이채 앞에선 당신도 그냥 보통 사람이었던 건데. 믿어봐야지만 확인도 할 수 있는...) 이제 아무것도 상관 없습니까? 위례청을 막냐 막지 않느냐 그런 거요.
이희예:그래, 상관 없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다가) 나한테는.
막고 싶어?
위례청으로 돌아갈 건가?
박태길:(눈을 굴려 멀리 천장을 본다.) 내 가이드가 정하는 대로 할 거야, 나는.
(그리고 아마도 이미 길은 하나뿐일 것이라. 당신은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겠다.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보통 사람이 될 준비.)
(옷매무새를 정리해가며 일어난다.) 실수 안 해줘서 고마워요.
정호걸:(태길이 일어나면, 잠시 이희예를 바라보다가 따라 일어나고는) 무섭기로는 이채 씨가 더 무서웠을 겁니다. 위례청 막자 허는 거.
죽을 각오니까는.
박태길:(이쪽은 인사 안 하고 호걸의 팔을 가볍게 이끈 다음 등돌려 나간다.)
이희예:(두 사람을 잠시 보다가 등에 대고 말한다.) 위례청 지하.
거기에 장치가 있어. 잘 가.
(무슨 장치인지야 가서 보면 될테다.) 오케이.
두 사람은 이희예를 뒤로 하고 납골당을 나섭니다.
수평선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빛이 모래사장을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종말이 다가오는 것 치고는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박태길:(햇빛을 보려니까 확 졸려지는 기분. 기운이 다 빠지긴 했지. 눈을 문지르다가 벅벅 비빈다.) 그래... 이제 우리끼리 얘기합시다.
어쩔래요.
정호걸:(주차장으로 향하다가 잠깐 멈춰선다.) 가야지요, 위례청.
이래 두고 봤다간 나라 요절 납니다잉.
박태길:(그렇게 말할 거 알았다. 알긴 했는데.) 아 좀. 나라 문제 전에 본인 문제잖아. 내가 다 서운하게 그럴거야?
정호걸:... ... (태길의 말에 제 뒤통수만 좀 긁다가) 예, 그러기는 한데.
아까 태길 씨 가이딩 할 때, 쪼매 안심혔습니다.
여즉은 잘 되는구나 하고.
박태길:내가 센티넬 아니게 되는 게 먼저일지도 몰라. (무엇보다 먼저라는 것인지는 비껴 말한다.) 그거 생각하니까 나는...
(혀 옆뿌리를 쯧 찬다.) 영 아리까리하네. 아까운 것도 같고.
정호걸:이제 말로 차 빌리고 허는 것 못하니까요? (작게 웃는다.) 새 인생 산다 생각허심 되지요.
위례청 읎어지면 당장 무직 아닙니까.
박태길:정확히 그거지. (뻔뻔) 나라에서 어떻게 좀 챙겨주지 않을까? 본청 해산해도 공무원인데.
(아무래도 좋은 소리나 주워섬기다 호걸을 빤히 본다.) 후회 안 되겠냐는 거야. 내 말은.
정호걸:(그 말에는 잠시 고민한다. 매일 트는 해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런 감각이 선득하게 다가오다가도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멀어진다.)
...실감이 안 나서요.
병이 들거나 아주 날을 받아놨으믄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생각만 하던 것을 입으로 뱉고나니 그제서야 진짜인가, 싶다. 죽는다기보다는 사라진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
박태길:(다같이 죽는 것보다야... 살 사람은... 사는 게 맞지. 나빠봤자 일반 사람으로 돌아갈 뿐인 자신은 애초에 발언권을 얻을 문제조차 아니다. 그래도.) 싹다 망한다는 것도 실감 안나기는 똑같잖아.
정호걸:그렇다 혀도, 사람들이 다 죽어나간다는데 입 다물고 있을 수 있는 사람 몇 읎을 겁니다.
몰랐으믄 몰라도. 알았으니 어쩔 수 없지요. (천천히 걸어서 차 앞까지 도착한다. 태길을 돌아보더니)
제가 무서워가지고 울고 떨고 허는 거 보고싶으셔서요? (짧게 웃는다.)
내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다시) 김재욱 같을지, 박현수 같을지, (아니면 이희예 같을지, 거기까진 말하는 대신에 마른침을 삼킨다) 내가 모르겠어서 그래.
내가 울고 떨까봐 그래. 내가.
정호걸:(태길의 답변은 예상하지 못했던지 잠시 얼굴에 난색이 앉는다.)
... (뭐라고 약속을 할 수도 없고, 떠나지 않겠노라 으름장을 놓을 수도 없고, 하물며 앞으로는 센티넬이나 가이드조차 아닐 것 아닌가.)
(공연히 뒷목만 자꾸 긁적인다. 마땅히 좋은 방안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있어야 하는데 그땐 반드시 내가 없다.) 그래 되기 전에...
실컷 겁내둡시다.
다 참다가 홧병이 되는 거라는데, 좀 덜 참으믄 그보다는 낫겠죠.
웃으면서 헤어지지는 못혀도, 태길 씨가 그래 된다 생각하믄 영 마음이 불편해서.
박태길:(말이 나오길 기다리며 어째 더 추워서 팔짱을 끼고 있다가,
실컷 겁내둡시다, 거의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천천히 웃는다.) 나 무서우면 신경질 장난 아닌데.
박태길:(소리내 웃기)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여줬지. 얼마나 참았는데.
그래도 자신있으면 호걸씨 말대로 하고.
노력해보겄습니다.
박태길:(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선심쓴다는 표정이 된다.) 호걸 씨 노력이면 값이 좀 나가긴 해. 받아줄게요.
(손을 휘적여 타라는 시늉을 하고 자신도 조수석으로.)
상황이 급박하다는 걸 아는 것처럼 도로 위는 휑하고, 차는 빠르게 달려 서울 근교에 입성합니다.
어느 종교단체에서 주장하는 종말과는 사뭇 다릅니다.
하늘을 찢는 나팔소리도, 땅을 여는 북소리도, 신의 음성도 없습니다.
푸르던 하늘의 색이 점차 옅어지다가,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박태길:(다시 빨개져달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하늘이 어두컴컴해지자, 오로라는 기다렸다는듯이 강렬한 빛을 발산합니다.
정호걸:차가... ...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도무지 갈 생각을 않는 앞차를 보다가, 불길함을 감지한 듯 태길을 본다.) 태길 씨.
길을 바쁘게 걷던 행인들도 맥 없이 쓰러져버립니다.
박태길:팀장님 살아계시네. (문자를 보고서 덥석 말했지만, 마지막 음절이 제대로 끝맺기도 전에 끊긴다. 하늘이 끓는 피 같고...)
인간의 제어를 잃은 차가 전봇대를 들이박거나 인도를 침범한 뒤에야 멈춰섭니다.
도시의 잔잔한 소음이 순식간에 소름끼치는 정적으로 바뀝니다.
정호걸:(염병,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가 곧장 안전벨트를 풀고 내린다.) 뛰어갑시다.
두 사람이 멈춘 곳은 위례청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도로입니다.
박태길:(차 안에서 볼 수 있는 어디를 둘러봐도 혼돈. 찰나지만 눈이 갈피를 잃고 흔들린다. 대답도 없이 같이 내려 뛴다.)
(그놈의 종말이라는 게)이렇게 당장이라고는 안 했잖아!
정호걸:두 번째라 뭐가 되도 빨리 되나 보죠! (붉은 빛이 점멸하는 도로 위를 건너간다.)
박태길:(지하의 장치. 그걸 찾아야 한다. 순식간에 숨이 차오르게 위례청을 향해 뛰면서 다급하게 정기현에게 전화를 건다. 안받으면 작살낸다.)
기현이 연락하라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면...
박태길:(거침없이 입밖으로 나오는 육두문자. 종말새끼 그새 통신부터 끊네. 커버 거칠게 닫고 그냥 뛴다.)
(주변은... 더 심해지고 있나?)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위례청에 도착합니다.
살갗을 에는 한기가 새어나오고 있습니다. 익숙한 한기입니다.
(숨이 턱까지 차서는 곧바로 목청이 높아져주지 않는다. 문앞에서 무릎을 짚고 좀 가다듬은 후에야) 팀장님! 있어요?!
(재고 따질 것 없이 일단 안으로 들어간다. 한기를 향해.)
급히 안으로 들어가면, 복도로 가는 벽 안쪽에서 절반쯤 몸을 내민 김재욱이...
다른 센티넬을 향해 날카롭게 벼린 결정을 퍼붓고 있습니다.
김재욱:왜 이렇게 늦어!!! (태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함을 지른다)
박태길:뒤지게 뛰었습니다! 바깥 꼴을 봐라!! (냅다 맞고함)
김재욱:안에 팀장! (남는 손이 없자 제 옆에 있는 회의실 문을 발로 뻥 찬다)
박태길:(몸을 낮춰 다가가, 회의실 문 안으로 몸을 디민다. 정기현을 찾는다.)
정기현 씨 살아계시면 대답!!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쓰러진 사람 한 명과, 문가에 기대 있다가 태길이 문을 여는 것에 조금 떠밀려 엉거주춤하게 앉은 사람 한 명이 보입니다.
그리고 엉거주춤하게 두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박태길:몇 시에 오라고 말을 미리 해주든가...! (그와중에 말대답은 놓치지 않아가며 정기현에게 다가간다. 상태를 살피느라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어떻게 된거야.
윤지서:아까 하늘 이상해지자마자 쓰러졌어요. 다른 직원들도 그렇고...
그러다 갑자기 떼로 몰려들어서 저 지랄이야.
나도 뭔 상황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정 팀장이 설명한 거 똑같이 읊을게요. 이해 못했어, 나도.
본부 지하 전기실 안쪽 계단 아래에 장치가 있다. 이 장치라는 게 대체 뭐야?
정호걸:(손을 이리저리 휘적인다.) 저희도 뭔지 모릅니다. 하여간 그게 원인이라대요.
박태길:부수면 되겠지. 패서 말 안듣는 기계 있나.
(팀장을 이대로 둘 수는 없고, 일단 밖의 저것들부터 어떻게... 회의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머릿수를 가늠해본다.)
복도에 있는 인원은 김재욱을 제외하고 네 명.
제일 앞에 금강불괴 능력을 가진 센티넬이, 그리고 그를 방패삼아 염화 센티넬이 하나. 두 사람의 가이드들이 동행하고 있습니다.
정호걸:어째 센티넬들이 직접 막을 줄은 몰렀는데...그새 뭐라 구슬리기는 혔나 봅니다.
박태길:나도 얘기가 이렇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네.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일어선다. 김재욱이 저지하고 있을 뿐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면 만만한 레벨은 아니다. 그러니까… 강하게.)
이능력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3, 41, 33 |
+2: |
극단적 성공 |
+1: |
극단적 성공 |
0: |
극단적 성공 |
-1: |
보통 성공 |
-2: |
보통 성공 |
아무래도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건 재욱에게도 벅찼던 모양입니다.
박태길:(뒤에서 재욱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낮게 속삭인다.) 이때다 싶을 거야. 그때 얼려요.
(그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집중을 조각내고 의지에 물을 탄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 올 거다. 내가 합류한 다음부터 어딘지 이상하지. 김재욱은 조금만 더 하면 처리될 것 같고, 네 능력에는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뒤는 확인했어?)
(너희 뒤의 가이드 말이야. 안전한 게 맞아?)
위례청이 이 짧은 시간에 이들을 뭐라고 구슬려 꾀어냈는지는 뻔합니다.
이들이 지하로 내려가게 두면, 너희들은 끝이다. 자신 있나?
그러나 그보다 태길의 질문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주춤한 사이, 재욱이 재빠르게 그들의 손과 발을 얼려 동상마냥 벽에 부착해 놓습니다.
땡큐, 여기는 이제 알아서 할 테니까 빨리들 내려가.
박태길:(호걸을 데리고 지하로 향한다. 물론 가이딩보다는 완력이 필요해서다.)
지하로 내려오는 길은 텅 비어있었지만, 곧 반대편 복도 계단에서 우레같은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수십 명의 센티넬과 가이드가 계단과 복도를 가로질러 두 사람을 에워쌉니다.
열 명 남짓인가, 생각하면 그 수가 점점 더 늘어서...
박태길:(...환각계 센티넬인건 아닐까 하는 희망회로를 잠시.)
(아닌거지?)
박태길:
이능력 Roll
기준치: |
75/37/15 |
굴림: |
2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꺼져.)
(엎드려... 가만히... 물러나.)
(어차피 못 이겨.)
(첩첩산중을 향한 짜증을 담아 날카롭게 사념을 퍼트린다.)
태길이 흘려보낸 전류가 공기를 타고 번져갑니다.
위례청이 언제 우리 목숨 귀하게 생각해 준 적 있어?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혈혈단신으로 본부에 처들어와?
생각한대로 능력이 나가지 않아 애꿎은 기물에 화풀이를 하는가 하면, 극심한 공포로 인해 식은땀에 푹 절어 몸이 굳거나, 태길 가까이에 서 있던 몇몇은 아예 기절해버렸습니다.
정호걸:이래 무리하시다가 쓰러집니다. 적당히 하고 갑시다. (비틀거리는 사람들 몇몇을 밀어 복도에 길을 튼다.)
박태길:(너무 썼다. 속 안 좋아. 입을 덮어 막고서 호걸이 터준 길을 따라 걷는다. 도중에 누군가가 쏜 눈 먼 가시에 맞을 뻔 한 걸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여차하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게 이 능력의 유구한 문제점.)
정호걸:(가이딩을 할 상황이 아닌지라 태길을 곁눈질로 보더니 반쯤 감싸고, 반쯤 부축해서 복도를 통과한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명패가 걸려 있지만,
오늘 두 사람보다 더 중요한 관계자는 없지요.
철제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어둑했던 주변이 불그스레한 빛으로 밝아집니다.
박태길:내가 관계자다 *발... (다소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며 명패를 지나친다.)
(어떻게 생겼냐. 좀 보자.)
두 사람의 의문은 계단 끄트머리를 밟은 순간 해결됩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봐야 할 정도로 높은 장치입니다.
마치 바벨탑처럼 생겼는데, 중앙에 통유리 형태의 원형통이 박혀 있습니다.
그 안에는 보글거리는 기포가 올라오는데...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무리봐도 뇌입니다.
유리 속의 액체가 점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박태길:(뭐? 목도한 얼굴이 절로 찌그러진다.)
보고 있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습니다. 능력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 장치 때문?
박태길:모르긴 몰라도... (숨을 가다듬는다) 딱 저거 깨라고 있어주는 것 같다.
정호걸:(마찬가지로 인상이 일그러진채 장치를 바라본다.)
저 건드려도 되는 거 맞습니까? (조심스럽게 장치에 다가간다.)
박태길:(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고. 저걸 어떻게 깬다지. 밖에 있는 놈들 중에 쓸만한 놈 하나 데려올까... 궁리해보는 중)
만져보게요?
가까이 다가가자, 장치 주변으로 붉은 스파크가 입니다.
PC가 장치 파괴, 혹은 해제를 선언할 경우 '화상 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장치에 걸린 주문은 장치를 건드리는 즉시 발동되며,
라운드마다 정신력으로 대상과 대항 판정을 해서 이겨야 합니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더욱 강한 스파크가 시전자를 덮칩니다.
매 라운드마다 PC 또는 KPC가 교대하여 시도할 수 있습니다.
박태길:(한참을 뇌를 응시한다. 그리고는 호걸을 물리고 자신이 다가간다. 이것에 만약 지성이 있다면… 해봐야지.)
(난 너를 죽일 거다. 그 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서...)
(장치의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댄다.)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6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6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박태길: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1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98 |
판정결과: |
실패 |
그러자 부글거리는 뇌가 태길에게 어떤 미래를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위례청을 무너트리고, 국가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해명을 하려 해도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미쳐버렸고, 누군가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습니다.
박태길:(처음엔 아무 느낌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점점... 어떤 순간으로 빨려들어가는 감각. 생생한 거짓이 정신을 휘감는다.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 차있다… 자신에게 당한 인간들의 심경을 조금쯤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은 예방주사를 맞고 왔거든. 어느 S급한테.)
그 간단한 동작 하나만으로도, 거짓은 비산하여 허공을 찢어놓습니다.
전원이 내려간 듯 내부가 완전히 깜깜해집니다.
장치의 소음도, 부글거리는 소리도 사라져 정적만 남았습니다.
(짚었던 손을 떼고 장치를 올려다본다.)
정호걸:마지막이라고 일 열심히 허셨나본데요. (보이진 않지만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려있다.)
박태길:(는 무슨. 말이 끝나자마자 비척거리다가 사실상 쓰러져 앉아버린다.)
정호걸:어어, (태길이 풀썩 앉는 소리가 들리자 소리로 위치를 짐작해 태길의 어깨를 짚는다.) 그러니까 무리허시고.
박태길:(암흑속인데도 눈앞에는 시퍼렇고 시뻘겋게 색채가 있다. 심장이 귓속에서 펌프질을 한다. 이거 오랜만이다...)
무리 안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체온이 닿은 자리를 더듬어 호걸의 손을 잡으려다...)
(이 양반도 지금 상태가... 그 생각에 멈칫.)
정호걸:(태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짐작하고서 먼저 손을 잡는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퍼뜩 받으쇼잉.
박태길:말 꼭 그렇게 해야겠어요...? (하지만 맞는 말이지. 에라 하고 손을 꾹 마주 잡는다.)
정호걸:(이번에도 역시 천천히, 손끝에서부터 흘려보낸다. 막히는 것 없이 강에서 바다로 물을 흘려보내듯이.)
박태길:(마른 진흙이 물을 먹는 것처럼 빨아들이는 감각이 편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 쉽게 바뀔리 없다. 그래도 얌전히. 그나마 착하게. 피하지 않고...)
그렇게 잠시 앉아있으면, 천천히 건물에 전력이 돌아옵니다.
완전히 꺼진 장치, 거대한 지하실 가운데 두 사람만 앉아있습니다.
정호걸:(미소 띤 얼굴로 태길을 보고 있다가,) 나갑시다. 밖에 어째 됐나.
박태길:기분 좋아보이는 거 좀 별로다 어째... (호걸이 당겨주는 힘에 의지해서 털고 일어난다. 나가보자.)
쓰러진 센티넬과 구급함을 든 가이드들이 있는 복도를 지나,
1층 로비로 돌아오자 힘 없이 의자에 일어나 앉은 정기현과 김재욱이 두 사람을 반깁니다.
윤지서도 불만스레 앉아있긴 하지만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괜한 소릴 덧붙이지는 않습니다.
박태길:(오늘만큼은 저 소리가 정말 어이가 없다...)
정기현:이 정도면 개국 공신인데 훈장 안 주나... (길게 기지개를 켜더니 테이블에 푹 엎드린다.) 어우, 피곤해.
어느새 바깥은 붉은 오로라가 사라지고, 청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박태길:내가 저 장치한테 말걸어보니까... 세상이 나를 죽이네마네 할거라던데요.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길거리에는 어리둥절한 시민들과, 사고처리를 위해 눈 뜨자마자 달려온 경찰들이 즐비합니다.
정호걸:(슬쩍 태길을 쳐다본다) 말 험하게 혀는 오로라네요잉.
박태길:안 들키면 그만이겠지. 내가 부순 줄 아무도 모르면 되는거잖아.
이어서 태길 또한 그 탄식의 이유를 알아챕니다.
그것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감각입니다.
(멍하게 가만 섰다가, 눈에 걸리는 아무나... 집중해서 응시한다.)
태길의 사고와 의지는 태길의 몸 안에서만 돌아갈 뿐.
정호걸:(태길을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눈썹을 비튼다.) 왜요?
박태길:(아무것도 닿지 않고,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는다. 잡히던 것이 잡히지 않는다...)
호걸 씨가 말해서 부정탔잖아.
(호걸의 비틀린 눈썹을 바라본다.) 끝났어, 나.
정호걸:(아하, 하고 잠시 눈을 굴리더니...한 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태길의 등을 두어번 두드린다) 거 잘 됐네요. 바로 새 인생 살고.
박태길:심경 모른다고 쉽게 말한다 진짜. (어깨를 틀어 그 손길을 밀어낸다.) 거기 재욱 씨, 똑같아?
김재욱:(손을 쥐락펴락, 자기 볼을 문질러보더니) 기분 이상하네.
그래, 잘 됐어. 이제 당당하게 홀로서기 하라고. (마찬가지로 태길의 등을 두드린다)
박태길:(이 인간들이 단체로 왜 이러냐고. 대판 못 볼 거 봤다는 표정을 하고 아예 걸음을 옮겨 피한다. 그리고는 반 혼잣말로) 이럴 줄 알았으면...
(이희예랑 대판 붙기나 해볼걸. 당하기만 한 게 억울해지는 순간.)
정호걸:(뭔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나본데, 하고 가만히 태길을 보다가...이제야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다. 하품이나 한 번 한다.)
쉽시다, 오늘은.
박태길:(쉽시다, 라니. 짝 맺은 이래 처음 듣는 소리 아닌가 한다. 이제는 짝일 수 없지만.)
(방금까지 온전했다가 칠푼이가 된 기분인데. 그러나 유일하게 기대되는 점이라면...) 그거 할 수 있게 됐네.
가이딩 빼고 가이드 보기.
박태길:(팔꿈치를 머리 뒤로 두고 쭉 당겨 기지개를 켠다. 으드드드.) 몰라요.
친구부터 시작합시다. 천천히.
이제 센티넬과 가이드는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앞으로 두 사람은 불완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겠죠.
서로의 역할에 대해 이해를 구할 필요도 사라지고,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누군가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